< 전멸(4) >
사람들은 그 누가 굳이 외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땅바닥에 철썩 달라붙었다.
치지지직-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을 뒤흔든다.
그나마 빗겨나가는 경로라 다행이지 만약 직격 당했다면 아마 레피아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크으으으!”
“으아아악!”
재수 없게 날아온 통나무에 휩쓸린 2명의 생존자의 몸이 일순간 붕 떠올랐다.
촤자자작.
순식간에 조각조각 나뉘는 육신.
“헉!”
깜짝 놀란 생존자들은 허겁지겁 땅에 손가락을 박아 넣는 조취를 취했다.
같은 행동를 취한 레피아가 고개만 살짝 돌려 두 사람의 안위를 살폈다.
아린과 루시아.
아직까지는 둘 다 무사했다.
그녀는 곧바로 폭풍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각도 때문에 보이는 것은 딱히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숲 내부에서는 상상도 못할 격전이 펼쳐지고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
파앙! 파앙!
서서히 수그러들고 있는 폭풍과는 별개로 파공성은 더욱 커져만 갔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개 작살난다.’
폭풍은 피아식별 없이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기에 알비론이나 특이개체의 활동 또한 제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풍이 멎는다면?
더해서 두 사람의 전투에 휘말린다면?
레피아는 포켓에서 예비 장비 하나를 꺼내 상공으로 던졌다.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가까스로 활동은 할 수 있을 정도.
“다시, 출발한다!”
레피아가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콰앙!
으드득-
거대한 고목의 몸통이 부서지며 그 사이에서 두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몸이 새까만 연기에 둘러싸여 있는 남자였고, 또 하나는 인간 형태를 하고 있는 괴조였다.
상황은 남자가 괴조의 창을 간신히 방어해낸 모습.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카르베스의 말이 생존자의 귀로 똑똑히 들려왔다.
[이제 완전히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군.]
유세현은 이를 악물고 온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챙!
하지만 여지없이 막힌다.
순간적으로 스쳐 보이는 생존자들의 모습.
‘젠장.’
0.1초도 안 되는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높은 민첩 스텟 덕분에 그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대피시키고 싶었던 인원이 이곳에 몰려 있다는 것을.
그런 마음을 대변하듯 레피아의 입에서도 걸쭉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헤드리아 와는 전혀 다른 외관.
그리고 유세현을 밀어붙이는 능력.
눈앞에 있는 놈이, 이전 유세현이 거론했던 또 다른 직속호위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에 갈등이 요동쳤다.
계속 나아가야 되는가. 아니면 유세현을 도와야 되는 것인가.
‘젠장. 어떻게 해야 되지?’
만약, 유세현을 돕는다면 이들은 목표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허나, 지금 유세현을 돕지 않는다면...
[그만 포기해라.]
휘이익-
치이익-
카르베스의 창과 유세현의 검이 격돌했다.
카르베스가 힘을 더하기 무섭게 점점점 굽혀지는 유세현의 무릎.
그는 정말 위태위태해 보일 정도로 밀리고 있었다.
레피아는 결단을 내렸다.
‘역시 안 되겠어!’
모든 이들을 뒤로하고 유세현을 돕기로 한 것!
아린도 중요하고, 루시아라는 여자도 중요하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유세현 이었기 때문.
허나.
그녀가 달려든 순간.
유세현이 간신히 창을 쳐내며 말했다.
“계속 가세요.”
“뭐?”
“계속 가라고!”
유세현은 아직 버틸 재량이 있었다.
또한 레피아와 협공한다고 놈을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 또한 너무 지쳤으니까.
그러니 최대한 살려 이곳에서 벗어난다.
그것이 지금의 목표.
“......”
“빨리!”
“큭!”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튼 레피아는 돌파하기 시작했다.
알비론이 앞을 가렸지만 물러서는 일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푹-
“으아아악!”
죽어나가는 동료의 죽음을 넘어서 계속 나아간다.
운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살겠다는 의지가 기적을 만든 것일까.
아린과 루시아, 지드먼, 카텐, 케드리나를 포함한 9명의 생존자는 무사히 다시 목표지점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뛰어!”
그들은 일제히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키이!]
다시 접근한 특이개체의 특수능력이 날아들었다.
수는 총 3개로 주먹만 한 크기를 지닌, 송곳 같이 날카로운 뼈였다.
하나는 레피아가 잽싸게 쳐냈지만 나머지 두개는...
“...?!”
날아오는 뼈를 확인한 카텐이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허나, 안 그래도 상대적으로 스텟이 낮고, 물의 저항력으로 인해 느려진 그가 완벽히 반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푹-
복부로 날아와 박히는 송곳.
‘큭.’
그는 놀란 표정이 된 케드리나와 아린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손을 휘저었다.
그때였다.
수면위로 비치는 수많은 그림자.
생존자들은 그것이 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특수능력.
이번에는 40개가 넘는 뼈송곳이 그들이 있는 장소를 향해 재차 날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경악하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0.1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찰나 카텐의 눈이 순식간에 두 명을 살폈다.
우선은 아린.
그의 곁에는 레피아가 있었기에 새삼 안심이 되었다.
그녀라면 스스로를 지기키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방어할 것이기에.
하지만 케드리나는...
푸부북-
여러 개의 송곳이 카텐의 육신을 난자했다.
그런 그의 앞에는 케드리나가 있었다.
눈이 두 배 만큼 커져 있는 그녀.
놀란 표정이 말해주었다.
왜 그랬냐고.
왜 감싼 것이냐고.
사실 카텐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한 명이 죽는 게 났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몰랐다.
아니, 사실 이런 것은 전부 변명.
카텐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콤비를 이루며 옆에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그는 부상을 살폈다.
확실한 중상.
오장육부가 아예 작살이 났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강에 뛰어든 수많은 알비론들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상태였다.
카텐은 가라는 뜻에서 케드리나 향해 손을 휘저었다.
“......”
허나 케드리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똑같이 손을 휘젓고 있을 뿐이다.
빨리 오기나 하라는 듯.
카텐은 조심스럽게 중지를 들어 올렸다. 기분 나쁘도록 비웃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알비론을 바라봤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울상이라도 짓는다면 마음이 무척 아플 것 같았기 때문.
‘덤벼라 개새끼들아!’
그는 다가온 알비론 한 마리를 베었다.
이곳이 자신의 묘지.
누군가를 지켰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아니, 되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의식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물살에 떠내려가는 육체.
카텐의 시야에 순간적으로 루시아와 지드먼이 비쳐보였다.
상처는 없는 것이 특수능력을 방어하는 데는 어찌어찌 성공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알비론에게 붙들린 모양이었다.
카텐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그들을 구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왼쪽 팔이 찢겨나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신체가 많이 손상되어 전혀 아프지 않았으니까.
카텐은 부녀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뭍길로 나가라는 뜻.
둘은 카텐의 많이 놀란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몸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지드먼과 루시아.
그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 * *
“젠장! 이제는 무너트려야 돼! 놈들이 이곳에 들어오는 바람에 얼마나 죽었는지 알아?”
“맞아! 이래서는 이곳에 들어온 게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고!”
“안돼요. 기다리세요.”
“으...”
수로의 내부에서는 검은꽃과 생존자들이 대치중이었다.
통로를 무너트려야 된다는 생존자들의 의견을 검은꽃들이 여태까지 억지로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물속을 응시하던 한 생존자가 외쳤다.
“뭔가 또 오고 있는 것 같아요!!”
“큭! 다들 준비하세요!”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이번까지 치자면 벌써 3번째 침투였다.
선제타를 가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들은 입구를 빙그르르 둘러쌌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포.
파앗!
물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언제고 목을 내려칠 준비를 하고 있던 생존자들의 어깨가 움찔 거렸다.
나타난 것이 알비론이 아닌 사람이었기 때문.
레피아와, 아린, 그리고 케드리나.
이 장소에 도착한 인원은 딱 세 명뿐이었다.
“좋아 무너트리자고! 이젠 정말 다 온 거야!”
“잠깐!”
“...잠깐은 개뿔!”
“우리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레피아가 다급히 외쳤으나 생존자들은 이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발동되는 광역스킬.
잔여 마력을 모두 쏟아 부운 것이었기에 아무리 레피아나, 검은꽃들이라고 해도 막을 수 없었다.
퓨퓨퓽!!
콰광! 콰과광!
떨어지는 암석.
마구잡이로 날린 스킬은 천장뿐만 아니라 통로 그 자체에도 균열이 가도록 만들었다.
순식간에 메워지는 통로.
레피아의 살기어린 눈빛이 생존자들을 향했다.
“야...내가 기다리랬지.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아?”
생존자들이 움찔거렸다.
허나, 지지 않고 소리쳤다.
“왜! 무슨 짓은 무슨 짓! 살 수 있는 사람은 살아야...”
“유세현이 없었으면 너흰 이미 다 죽은 목숨이었어.”
“하! 그렇겠지! 하지만 놈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 꼴을 당할 일도 없었어! 제국군이 왜 중간에 이탈 한 건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할 줄 알았냐!”
“......”
단검을 쥐고 있는 레피아의 손아귀에 꾹 힘이 들어갔다.
그들의 말은 확실히 옳았다.
확실히 놈들의 눈에 뜨인 유세현이 없었다면, 군락지를 쉽게 부수고 귀환할 수 있었겠지.
허나 알베타스와 싸우고 있는 이상,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일 뿐 언젠가 놈들과 마주치기 마련이었다.
즉, 결국에는 모두가 감당해야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책임을 모두 유세현에게 전가하고 행동을 합리화 시키려 하다니.
이건 기다리고 안 기다리고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다.
정신상태의 차이.
레피아는 개인적인 감정까지 포함하여 눈앞에 있는 놈들을 깡그리 죽여 버리고 싶었다.
저벅. 저벅.
그녀의 발이 생존자들을 향해 나아가자, 생존자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뭐? 뭐? 우리가 틀린 말했어? 그리고 지금의 네 상태로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아?”
“넌, 너희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구나.”
허나 레피아는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검은꽃들이 잽싸게 말렸기 때문.
“언니 참으세요. 이미 발생한 일이에요. 지금 이놈들을 죽여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맞아 언니! 지금은 짜증나더라도 힘을 합쳐야 돼!”
“......”
레피아의 눈이 생존자들의 얼굴을 향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내뱉었다.
“네놈들 면상. 똑똑히 기억했다.”
“......”
수로에 싸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 * *
‘크윽, 이제 다 대피한 건가?’
강을 슬쩍 흘긴 유세현은 날아오는 창을 온 힘을 다해 쳐냈다.
어느새 두 번째 사용한 마족화도 풀려가고 있었다.
마력도 이제는 10%정도로 간당간당한 상황.
그는 잽싸게 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급급하여 하지 못했던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저 앞에 생존자가 있긴 있다.’
허나 그 어디에도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통로로 추정되는 게 있긴 있었다.
하지만...
‘무너진 건가? 아니, 무너트렸군...’
레피아나 팀원들이 벌인 짓은 결코 아닐 것이다.
나머지 생존자가 그렇게 했겠지.
너무 어이가 없지는 않았다.
제국군이 이탈한 순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했었으니까.
역시 인간들의 대부분은...다 똑같다.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야겠군.’
천마혈사장으로 뚫어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허나, 그것은 같이 죽자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은 만약을 대비해 알아놓은 다른 경로로 향하는 게 났다.
물론, 그전에 카르베스부터 따돌리는 게 우선이긴 하지만...
쉬이익-
좀처럼 쉽지가 않다. 아니, 쉬운 정도가 아니라 무척 어렵다.
게다가 육체도 한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무조건 해내야만 한다.’
카르베스의 창이 아슬아슬하게 유세현의 목젖을 스쳐지나간 순간이었다.
암석 틈으로 새까만 그림자가 꿀렁꿀렁 빠져나왔다.
유세현은 레피아의 고유특성 잠영술이라는 것을 단번에 캐치해낼 수 있었다.
< 전멸(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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