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락지(4) >
사실 유세현이 얼굴만 비쳤다면 알라함은 이렇게까지 열이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오지 않아 알라함은 신나게 털렸다.
높은 직위에 강한 무력.
주둔군의 사실상 넘버 투인 자신이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꼬투리만 잡혀봐라...’
자신의 말을 무시한 쓴맛을 겪게 해주리라.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 한 알라함이었지만, 정작 유세현 본인은 어제 일에 대해 티끌만큼도 마음도 담아두지 않고 있었다.
그의 온 신경이 집중 되어 있는 것은 군락지.
당연한 말이지만 파괴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그래야지만 놈들의 위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고, 활동범위를 넓힐 수 있으니까.
때문에 문제는 지금 하는가, 혹은 나중에 하는 가였다.
무리한 공격으로 인해 놈들의 군세야 약해진 때이니 타이밍은 딱 맞았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스텟이 낮은 스카이레블...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을 터인데.
게다가 지금은 모아둔 언데드 병사들도 없다.
물론, 언데드 병사보다 이들이 훨씬 강하고, 전투 중 생성이 가능하다는 것 고려할 때 상관은 없을 것 같긴 싶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찜찜해.’
적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느낌.
레피아가 먼저 의견을 꺼냈다.
“난 당연히 지금 공략하는 게 맞다고 봐. 적이 많이 약해졌으니까.”
“역시 그렇죠? 그럼 세현씨는?”
남궁시영의 시선이 이번에는 유세현을 향했다. 유세현은 차분히 입을 뗐다.
“저는 개인적으로 추후 공략하는 게 났다고 생각합니다.”
“......”
그 말에 레피아와 남궁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뜻이었으나, 방금 전의 말은 객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말한 것이 아닌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을 토대로 한 것이었기에 딱히 설명해 줄 만한 것은 없었다.
그저 느낀 바를 말할 뿐.
“아...스카이레블이 약했던 게, 그게 마음에 걸리신 거군요.”
“예.”
또한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모든 것이 딱 맞아 떨어질 확률이 과연 몇 %나 될까?
그러니 이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짐짓 고민하는 남궁시영. 그녀는 다시 한 번 레피아에게 물었다.
“언니는 그대로 찬성이신가요?”
“아니, 잠깐만...유세현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나도 좀 뭔가가 찜찜해...시영아 루시아씨가 한 말 기억하지?”
“공격하는 척...”
“......”
남궁시영이 결론은 내놓았다.
“저희 입장은 반대입니다.”
“예?”
다들 놀란 모습.
남은 두 세력은 찬성 쪽으로 기운 상태였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들어보고 싶군요.”
그들은 처음부터 괄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궁시영은 제멋대로인 무림인들을 다룰 수 있는 현명하면서도 강한 여자였고, 지금까지 해온 업적 또한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알베타스의 침공당시 그녀가 아래로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이윽고 거론된 스카이레블의 스텟.
제법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닌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백작, 알데우스 로아드.
“뜻은 잘 알겠으나 너무 기우 같군요.”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하대했지만 무림인에게 만큼은 존대를 했다.
길드 연합의 대표, 키란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2 대 1. 끝났군요.”
“이제 바로 어떻게 인원을 투입시킬지...”
그들은 곧장 다음 주제로 넘어가려했다.
허나. 그때.
“그러면 이번 공략에 저희들은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는 장내.
알데우스와 키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무림인들은 일반 생존자들이 정해놓은 룰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그만큼의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
아니, 정확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남궁시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은 가만히 두고 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세현도 따라 나서려는 그때.
“자네는 그냥 여기 남아 있도록 하지?”
알라함이 훅 치고 들어왔다.
“어차피 자네는 무조건 참가해야 될 텐데.”
“......”
유세현은 차분히 고개를 돌려 알라함을 응시했다.
비릿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거부하도록 하겠...”
“후후, 거부는 공적을 쌓았을 때나 할 수 있는 거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유세현이 말을 끝내기도전 알라함이 되받아쳤다.
논리정변한 말이었다.
확실히 지금 그들은 알베타스 진형에서 체류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단순히 살아남은 것은 공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레피아의 팀처럼 스스로 적진으로 들어가 작전을 펼친 것이 아니었으니까.
유세현은 지금이라도 서쪽대륙을 안정화 시킨 것을 밝힐까 하다가 말았다.
기록용 수정구슬이 없는 이상, 드론을 보여주더라도 믿지 않고 우기면 끝이기 때문.
남궁시영도 이것만큼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세현씨...”
미안한 듯 쳐다보는 그녀.
‘어쩔 수 없군.’
유세현은 결국 수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리한 작전이었다면, 이곳에서 나와 알베타스의 진형으로 되돌아갔으면 되돌아갔지 결코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찜찜한 감각만 내려놓고 보자면 이건 확실히 최상의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인원들도 약한 게 아니라, 무척 강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작전에 참가하도록 하죠.”
유세현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남궁시영이 앉았던 자리에 착석하자 알라함은 기분이 되려 더욱 나빠졌다.
이런 걸 의도한 게 아닌데.
군락지의 규모에 따라 팀의 선발이 이어졌다.
지원자는 의외로 많았다.
괜찮은 상황인 지금, 미리 공적을 세워두면 행여나 생길지 모를 다음 작전에서는 빠질 수 있는 우선권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위! 바위! 보!”
결국 가위바위보까지 이어지는 치열한 경쟁.
마침내 팀이 차출되자 그들은 포지션을 세분화 시켰다.
역할은 크게 3개로 나뉘었는데,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시선분담조.
군락지를 파괴할 때 동안 바깥에서 버텨주는 방어조.
그리고 동굴에 직접 들어가 놈들을 깨부수는 침투조였다.
그중에서 유세현의 팀은 침투조에 속했다.
그의 팀원이 약할 것은 고려한 것인데, 내부를 지키고 있는 혼종하고 알비론들만 제거한다면 칼락크 자체는 감염충의 모체인 케르가나와 똑같이 큰 전투능력이 없기에 쉽게 잡을 수 있다.
뭔가 굉장히 손해 본 것 같은 알라함.
그가 싫어하는 것 같아 옳거니 하고 몰아 붙였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냥 내비 둘 걸...’
그래야 다른 것으로 몰아붙일 수 있었는데.
괜히 공적만 올려주게 생겼다.
군락지를 치는 시기는 다음날 통이 튼 직후였다.
이때가 알베타스의 움직임이 그나마 제일 둔한 때라고 한다.
“둥지 잘 지켜라.”
“알았어. 그러니 너도 뒤지지나 마라.”
“어후, 이놈이 재수 없게.”
보초병들이 작전병들을 위로했다.
사실 스스로 지원 했다지만, 가고 싶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좋은 작전이라 할지라도 사상자는 꼭 한 명씩 발생하기 때문.
단지 나중을 위하여.
자신은 걸리지 않겠지.
자신은 죽지 않겠지.
가위바위보를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가는 것이다.
이윽고 시작된 작전.
방어조와 침투조는 수색대가 알아낸 통로를 거쳐 은밀하게 움직였다. 시선분담조는 정반대로 향했다.
인원수가 많아 도중에 들킬 가능성도 염려해 두었는데, 움직임이 좋아서 그런지 다행이도 들키는 일은 없었다.
-키르르.
알비론 특유의 콧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일단 숨죽이고 대기했다.
조금 있으면...
-키륵!
-키르르르!
어깨를 움찔거린 알비론들의 시선이 일제히 풀숲 저편을 향했다.
시선분담조가 향한 장소였다.
-투두두두!
흡사 개떼처럼 우르르 몰려 사라지는 이들.
이전보다 줄었다고는 하나 꽤나 많은 숫자였다.
방어조와 침투조는 더욱 나아갔다.
허나, 200m정도 더 다가갔을 무렵.
-키륵?
배회하던 알비론 한 마리가 그들을 발견했다.
방어조의 팀장 케레온과 침투조의 팀장 알라함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속전속결.
“가자!”
샤샤샤샥!
주위에 있던 알비론을 순식간에 베어 넘긴 방어조와 침투조는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방어조가 상대하는 동안 침투조는 나아간다.
유세현의 뒤를 레피아와 검은꽃들이 바짝 따라 붙었다.
그녀들은 이 전장에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기꺼이 유세현을 위해 움직인 것이다.
“순식간에 끝내자.”
“그러도록 하죠.”
자르고 베고.
여기까지 잘 숨어든 데다가 전부다 강자들이라 동굴에 도달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맡아봤던 악취가 코끝을 찔러왔다.
알라함이 어둠속에서 튀어나온 알비론을 베어버림과 동시에 외쳤다.
“전부 부숴버려라!”
“가자!”
-쿠구구궁!
침투조의 인원들은 거대한 동굴이 울릴 정도로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나타나는 수많은 갈림길.
이미 다 말을 맞춰났기에 인원들은 망설임 없이 바로바로 흩어졌다.
동굴은 무척 깊었다.
마치 끝없이 이어져 있는 느낌.
그리고 이것이 바깥에서 동굴을 무너뜨리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이상 무너트려봤자 어차피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직접 가서 확실하게 처리한다.
아린이 계속해서 날리고 있던 빛의 구슬에 움직임이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꿈틀거리는 것이 갈락크가 틀림없었다.
팀원들은 잽싸게 모퉁이를 돌았다.
“......”
마주치기 무섭게 와락 일그러지는 팀원의 표정.
칼락크는 자포동물, 그중에서도 해파리와 굉장히 흡사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다만 큰 차이가 있다면, 놈들은 사지가 끊긴 여성을 몸에다가 반쯤 박아 놓은 상태였는데 수십 개의 촉수가 온몸을 유린하고 있다는 것.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그런 장면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쾌락 어린표정이 되어 비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 주위로 가득 차 있는 오물와 자그만 한 알.
이 알이 태어나는 것이 혼종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역겹지?”
툭 한마디 내뱉은 레피아가 소리 없이 다가가 칼락크와 함께 여성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유세현의 팀원들은 살짝 당황했으나 곧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분명 이들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고 했었다.
“으으!!”
“빌어먹을 알베타스!”
팀원들은 병장기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베고, 베고, 또 베고.
이미 알고 있었고, 다짐도 해놨지만 마음이 결코 편치는 않았다. 이들도 여러 존을 지나서 어렵게 어렵게 이곳까지 다다른 것일 텐데.
콰과광!
순식간에 놈들을 도륙내고 동굴의 끝을 확인한 이들은 천장을 박살냈다.
두 번 다시 이 장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는 것.
그들은 입구를 향해 뛰었다.
알라함은 이미 작전을 수행하고 빠져나와 있었다.
임무의 완수.
이제 남은 것은 귀환하는 것뿐이었지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알라함의 표정은 결코 좋지는 못했다.
“젠장...”
어둠이 드리울 정도로 상공을 까마득히 뒤덮고 있는 스카이레블.
그들이 둥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몇 부대는 꺾어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한다.
알라함은 사고가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본래 한 번 침공 후에는 항상 일정한 텀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격전이 치러지고 있기에, 놈들도 정비를 해야 했던 것.
그런데 저 병력의 수.
저건 아무리 봐도 즉흥적으로 모은 숫자가 아니었다.
< 군락지(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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