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족(2) >
물고, 할퀴고.
좀비들은 오직 오크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하운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유세현이 좀비들에게 하달해 놓은 명령 덕분이었다.
[인간과 거대괴물을 제외한 모든 것을 죽여라.]
보스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주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죽인다. 허나, 놈들은 지성도 있고 바보도 아니었다.
한쪽이 자신을 공격해 열세에 몰린 상황에서 다른 한쪽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되려 도움을 준다면 우선공격 순위에서 밀려난다.
즉 지금의 하운드에게는.
치지직!
콰광!
전격을 가득담은 노란빛무리가 오크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캬오오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하운드의 속공.
낙뢰를 휘감고 있는 하운드가 무자비하게 발톱이 휘두를 때마다 정예오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보스몬스터만 있다면 차분히 대응이 가능 했겠지만.
“취익, 껍질만 남은 시체들이!”
오크들은 좀비들을 깨부숴나갔다. 그중에서는 오크들의 모습을 한 좀비도 있었다.
으득.
데오펠의 이가 뿌득뿌득 갈렸다.
이 섬에서 그가 유일하게 위협을 느낀 생명체, 유세현.
놈은 카취와 더불어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 강했다.
그리고 그 행보 또한 너무 기이하고 이상했다.
섬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인간들을 데리고 반격을 시작하더니 늪지대를 부수고 법칙을 깨부수다니.
섬에 뿌려져 있는 지배자의 법칙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지도 않은 채.
규격외의 존재.
이번에야 말로 놈을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전부 알고 있었단 말인가. 놀아났다는 말인가!
“이 빌어먹을 인간 놈이...”
배틀엑스를 쥐고 있는 데오페의 손아귀에 힘이 꽉 들어갔다.
어떻게든 추격해 죽인 뒤 이곳에 왔어야 했는데.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침착함을 되찾은 그는 곧바로 케르젠에게 통신을 보냈다.
[케르젠...]
[왕이시어 서두르셔야 될 것 같습니다. 폭풍이 그곳으로 쏠리면서 가루다들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지금은 말에 복종하고 있는 상태지만 정찰하려고 하는 인원들이 한두 마리가 아닙...]
[...놈이 이곳에 나타났다.]
[...그게 무슨!]
[내가 놈들을 처리할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라. 지금 부딪치게 되면 피해가 막심하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겠습니다.]
답을 들은 데오펠은 눈앞에 달려드는 구울을 박살냄과 동시에 암흑투기를 전개했다.
한층 누그러지는 기세.
그 순간 능선의 위에서 생존자들이 사용한 광역스킬이 일대를 뒤덮었다.
“폭격단참!”
“칼날의 바람!!”
콰과광!
생존자들도 무척 강해졌기에 위력은 무시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유세현이 제일먼저 앞장서 적을 향해 나아가자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지드먼은 그 장면을 보며 입술을 질끈 곱씹었다.
사실 그는 유세현을 돕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이 의심이 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증거물품은 없다지만 그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는 딸과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싸우고 싶지 않다. 피할 수 있는 건 피해가고 싶다.
그러나 인원 대다수가 그를 돕겠다고 한 이상, 소수들은 어쩔 수 없이 선택에 따라야만 했다.
다 같이 라면 모를까 나뉘어 나오게 된다면 게이트 파편을 전부 모으기 전에 필히 당할 것이기에.
지드먼은 자신의 딸을 향해 속삭였다.
“루시아, 절대 무리하지 말거라. 너무 앞으로 나서지도 말거라. 저자는 강하기에 저렇게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거다. 알겠니?”
루시아는 그 말에 유세현의 등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말은 언뜻 들으면 다 맞는 말이었다.
허나, 아버지는 알까.
지금까지 강한 자들은 되려 뒤에 서서 나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어요.”
“좋다. 이 애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주마.”
루시아와 지드먼도 뒷사람에 떠밀려 발을 뻗었다.
* * *
유세현은 적을 뚫고 카취, 아니 데오펠의 앞에가 섰다.
구울이나 생존자들의 움직임으로 보건데 암흑투기가 전개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로만 듣고, 관망경으로만 보았지 대면하는 것은 처음인 둘.
유세현을 주시하는 데오펠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뭐야?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스킬이란 건 무기와도 같다.
자신이 들고 있을 때는 적을 벨 수 있지만, 적에게 넘어가게 되면 자신 또한 베일 수 있는 것.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영향을 받는 것처럼은 안 보인다.
암흑투기를 한 곳에 집중시켰음에도 무용지물.
‘도대체 저놈은...’
어둠속성 저항력 SSS랭크의 위력.
“네놈 곱게 죽을 생각은 절대 꿈에도 꾸지 말...”
데오펠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 유세현이 발을 내딛었다.
엄청난 속도.
관망경으로 관찰할 때도 빨라보였지만, 직접 마주한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데오펠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카취의 스텟이 유세현보다 낮을 것이라고.
‘폭주!’
치지직!
도끼와 검의 대결.
데오펠이 착용하고 있는 이 도끼는 가루다족 가리움이 유적을 클리어하고 얻은 것으로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경도와 강도에 특화 된 타입이라 웬만한 아이템으로는 버틸 수 없는 것이 정설이지만.
루베르크는 마신구 답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유세현은 전신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처음 2존에 떨어졌을 당시, 그의 힘 스텟은 80%를 약간 웃도는 상태였다. 그래서 2존에서는 마땅히 얻을 만한 코인이 D랭크까지 떨어져버린 마력코인 밖에 없었다.
허나, 지금은 좀 다르다.
티끌모아 티끌이라지만, 가루다와 오크 각 B랭크에 달하는 적의 정예들을 끝없이 베고 또 벤 결과 그의 스텟은 89%까지 올라 있었다.
10%의 차이는 하늘과 땅.
폭주를 사용했음에도 밀리자 데오펠의 눈가에 실핏줄이 섰다.
“너 이노오오옴!”
데오펠은 결국 비스트까지 발동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스킬들을 동시 사용했다.
도끼에 이글거리는 불이 붙고, 발에는 바람이 휘감긴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큰 차이점.
지배자인 데오펠은 스킬사용의 제약이 없었다.
“크하아압!”
후웅!
온 힘을 다해 유세현을 살짝 밀쳐낸 그가 손을 뻗었다.
[정신지배]
수많은 정예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스킬.
흩뿌려져 나온 연기가 유세현을 순식간에 감싸자 그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뭔가가 꾸역꾸역 침투하는 감각.
이와 비슷한 느낌을 이전에도 한 번 느낀 바가 있었다.
장사월이 사용한 스크롤에 당했을 때.
쉬이익!
유세현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자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연기가 빠른 속도로 흩어졌다.
데오펠은 재차 달려들었다.
그래, 지치지 않았으니 아직 정신지배가 통할리가 없지.
그리고 놈은 언제나 예상외의 존재였다.
그러니 카취 때처럼 직접 잡아먹는다.
일단 먹기만 한다면 놈도 저항할 수 없을 터였다.
자신은 그림자 종족 데오폴론의 왕. 데오펠이었으니까.
쾅! 쾅!
검과 도끼가 부딪칠 때마다 미사일이 터지는 파공성이 뿜어져 나왔다.
죽이고 죽이는 살육전.
정신지배에 걸려있던 오크들이 데오펠을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유세현은 루베르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오크들의 육신이 부패되어 으스러진다.
데오펠도 지지 않고 마력을 전개해 중력을 강화시켰다. 유세현의 몸이 한순간 휘청거리는 반면, 그 주위에 위치해 있던 생존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땅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쿠우우웅!
“끄아아악!”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눈동자와 짓이겨지는 육신.
데오펠은 오크들의 죽음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자신의 종족이 아니니까. 장기 말에 불과하니까.
계속 치열하게 이어지는 접점.
형세는 아주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오크 쪽이 아닌 유세현 쪽으로.
그가 손을 치켜세우자 죽었던 오크들이 일어나 동료를 향해 달려들었다.
데오펠의 눈가가 씰룩였다.
아직도 더 일으킬 수 있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마력 효율인가.
유세현이 일부러 마력을 조금 불어넣은 덕택이었다.
어차피 오래 써먹을 수는 없는 놈들이니까.
물론, 이렇게까지 한다 하더라도 권능이 개화하지 않았더라면, 언데드 레이즈의 등급이 상당히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은 일은 상상조차 못했을 일이었다.
실제로 스킬을 획득한 초반부에는 사용하기가 굉장히 껄끄러울 정도였고.
그때.
-캬르르르.
하운드의 서글픈 괴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쿠궁!
쓰러지는 육체.
맞붙던 데오펠과 유세현이 동시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에서 보상이 나오는 거지?
이것만큼은 데오펠도 몰랐으며, 유세현 또한 추측이 불가능했다.
몰아치던 폭풍이 잠든다.
터져 나오는 환한 빛.
유세현과 데오펠이 있는 곳으로 부터 우측으로 500m가량 떨어진 장소였다.
타다닥!
누가 뭐랄 새도 없이 질주하는 두 사람!
속도는 천마군림보를 운용하는 유세현이 훨씬 빨랐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속도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건 아니다.
훨씬 더 가까이 있는 인원들이 있었으니까.
“왕이시어 제가 아이템을 획득해 놓겠습니다!”
물론, 유세현도 보험을 들어놓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카텐과 케드리나가 소리쳤다.
“아이템! 누구라도 좋으니까 아이템부터 챙기세요!”
개떼거지처럼 몰려드는 두 종족.
좀비와 오크, 생존자들의 시체가 산을 쌓는다. 그 와중 먼저 지배자의 팔찌에 손을 얹은 것은 데오폴론이었다.
“크하하하! 왕이시어 제가! 제가! 해냈습니다!”
지이잉!
동시에 강력하게 퍼져 나오는 세뇌의 파동.
생존자들은 제자리에서 머리를 쥐어 잡고 고통스러워했다.
게거품이 밀려 나오고 흰자위가 드러난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텐의 검이 유세현을 향했다. 케드리나도 자세를 잡았다.
그 외에도 주위에 있던 모든 인원들이 병장기가 그에게 향했다.
“크흐흐. 잘했다! 데루오나!”
등 뒤에서 놈에 대한 칭찬이 울려 퍼졌지만, 유세현은 멈추지 않았다.
빼앗겼다면 다시 빼앗는다.
저 아이템이 왕에게 넘어가기 전에.
쉬이익.
유세현의 몸이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여갔다.
* * *
“이쪽으로 오거라 루시아!”
지드먼이 루시아를 끌어당겼다.
그가 향하고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거대한 포탈이 열려 있었다.
폭풍의 탑, 아니 이 지배자의 섬이 완전 클리어 되며 외부로 나아갈 수 있는 게이트가 자동적으로 열린 것이었다.
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포탈 안으로 뛰어 들었다.
“이, 이건 아니야! 난 애초부터 싸우기 싫었다고! 난 잘못 없어!”
“나, 나도 같이 가!”
그러나 도망치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루시아의 시선이 저편으로 향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듯 적진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유세현.
“아버지. 우리도 가서 싸우죠.”
“뭐? 안 된다! 이미 진 싸움이야! 가봤자 개죽음...”
“아버지. 그건 우리끼리 넘어가도 똑같지 않을까요?”
“......”
“계속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이 앞에 뭐가 있을지. 분명 사람들의 말처럼 지금까지 보다 더한 적이 있을 거예요. 물론, 강한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들 중 대다수가 우리가 경험한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해요.”
그녀가 경험한 사람들은 이용 할대로 이용해 먹고, 마지막에는 버리는 자들이었다.
이런 사람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앞으로 눈에 씻고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드먼은 살짝 놀랐다.
‘이 팀원들에게 마음을 연 건가?’
판도라로 넘어 온지 약 4년.
튜토리얼에서 그 사건이 터진 이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니...아직 이 아이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건 본적이 없다. 그렇다면...’
유세현 때문인가.
“그래...네 말이 맞구나. 그리고 어차피 소수로 넘어가봤자 구름섬 같이 일정한 장소로 떨어지는 게 아닌 바에야 생존 확률은 비슷비슷하겠지.”
마음을 바꾼 지드먼이 방향을 틀었다.
그는 알테리아 대륙에 있을 때부터 줄곧 딸의 행복을 바랐다.
알비노를 마녀, 마족의 후예라고 보지 않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길 바랐다.
허나,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이 세계로 떨어진 후로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지독한 불신과 상처만을 남겼다.
이제는 이 세계가 척박하여 행복해 지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마음의 안식만큼은 찾았으면 했다.
그런 그녀가 이 팀을 바란다면...
승산이 없어도 자신은 싸워 주리라.
그게 아비 되는 도리.
그가 거침없이 오크들에게 달려든 순간.
퍼어엉!
거대한 폭음이 일대를 광활하게 메웠다.
* * *
트드드득.
유세현이 팔을 당기자 데루오나의 오른팔이 끊어지듯 뽑혀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진동하는 데루오나의 눈.
“크으으으...이게 무슨...어떻게...어떻게! 팔찌의 보정을 받는 나의 정신지배를!”
유세현은 눈만 살짝 씩 찔끔 거릴 뿐 답하지 않았다.
놈의 정신지배는 무척 강했다.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골이 깨지는 것 같았으니까. 만약 데오폴론의 왕 데오펠이 사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확신할 수 없다.
< 멸족(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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