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족(1) >
‘그래, 출구가 꼭 마지막에 있으란 법은 없었지.’
구름섬도 출구는 7층이 아닌 6층에 존재했다.
‘노린 건가.’
병력이 분산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뭔가 느낌이 싸하긴 했었다.
놈들이 바보가 아닌 바에야 자신이 진형파악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유세현이 한 생각은 어느 정도 정답이었다.
현재 카취의 몸을 완전 잠식한 데오펠의 머릿속으로는 통신 스킬을 사용한 부하의 보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놈들이 제 6팀을 공격했습니다. 병력을 잃긴 했으나 이로서 인간 놈들도 출구의 존재를 알아챘을 겁니다.]
[크크크, 그래 관망경을 통해 직접 보았다.]
빛을 보여줘 그 빛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아이템을 손에 넣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할 정도로만 개체수를 조절한다.
[케르젠. 네가 가리움의 육신을 먹어라. 이제 끝이 머지않았다.]
[알겠습니다. 왕이시어.]
* * *
-띵~ 특.
-띵~ 특.
파편조각을 튕기고 받고를 반복하는 유세현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습격 성공으로 인해 얻은 767개의 파편조각.
그 덕에 생존자들은 잔뜩 들떠있었다.
앞으로 약 10번만 반복하면 지옥 같은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것.
때문에 어느 이는 적들의 눈을 피해 파편을 모으러 가자고 건의를 하는 상황까지 오기도 했다.
수동적으로 따르던 이들이 능동적이게 바뀌게 된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되었다는 점에서 보통이라면 쌍수를 켜고 좋아해야 될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다.
유세현이 상황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한다고 했을 때, 집단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것도 앞으로 많아봐야 서너 번 정도일 것이기 때문.
그리고 서너 번 정도로는 놈들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다.
어느새 옆에는 아린이 다가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까부터 표정이 어둡네만.”
마법사라서 그런지 역시나 뛰어난 관찰력.
[아린 하이워커]
키만의 뒤를 이은 대마법사이자 자신이 구한 꼬맹이. 그리고 그런 유세현 일행의 행동에 깊이 감화되어 사람들을 위하게 된 자.
마땅히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 지금, 이 노인에게 만큼은 털어놓고 조언을 구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잠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허, 말해보게나.”
유세현은 주위를 한번 쓰윽 훑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데오폴론이라는 종족. 그들이 원하는 아이템과 목적까지.
아린은 신기하게도 경악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턱수염을 쓸어내린 그가 말을 이었다.
“흠...그걸 막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는 게로군. 그런데 생존자들은 탈출만을 바라보게 되었고.”
사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언데드 레이즈를 사용해 부활시킨 좀비들이 있었으니까.
스텟도 놈들 것을 그대로 물려받아 강하지만.
문제는 지능이 낮다는 것.
때문에 변수를 고려하자면 생존자들은 있는 편이 당연히 훨씬 좋았다.
“......”
침묵으로 답하자 아린이 난데없이 미소를 지었다.
“생존자 전원에게 한 번 말해 보는 게 어떻겠나.”
“......”
답을 들은 유세현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습성을 잘 안다.
이기적인데다가 욕심은 많고,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지 않으면 대다수가 나 몰라라 한다.
더군다나 지금 걸려있는 것은 자신의 목숨!
지금까지야 퇴로가 없어 따라온 것일 테지만 도주라는 최선책이 있는 지금 누가 자신을 따르겠는가.
약간 비약하자면, 말하는 순간 칼이나 날아오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아린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왜, 말해도 안 따라줄 것 같은가?”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허허, 당연하다니. 나는 자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아린이 턱수염을 쓸어내린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까지 그 엄청난 무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왔네. 절대 해내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을 차례대로 돌파해왔지.”
그것과 지금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아린의 입에서 곧바로 반문이 터져 나왔다.
“물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네를 따를 거라고 말하는 건 아니네. 되려 처음에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으니 불만이 많았지. 답답했으니까. 하지만 말일세...자네가 하는 일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네. 그리고 무척이나 정확했
지. 늪지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약한 상태에서 싸워야 했을 테고 그랬으면 더욱 죽었을 것이네. 그리고 이는 2번째 제단으로 향했을 때도 마찬가지네. 분명 억지로 뚫는다는 선택도 있었지만 자네는 인원들을 생각해서
다른 해결법을 찾으려 했지. 하지만 사실 이런 건 다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고 내가 사람들이 자네를 따를 거라는 생각하는 제일 큰 이유는 말일세...”
“......”
“자네는 공정하고 합리적이야. 그리고 변함이 없지. 튜토리얼부터 구름섬, 그리고 이곳까지. 내 스스로 리더라 자칭하는 자를 수 없이 많이 봐왔지만 그 누구도 보초를 서는 리더는 없었네. 그리고 그건 2존에 있을 때의 나
도 마찬가지지. 처음에는 섰지만 나중에는 서지 않았어. 반면, 자네는 이것 말고도 스스로가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
아린이 유세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자네는 말일세. 이미 이들에게는 영웅이자 훌륭한 리더일세. 지금까지처럼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해보게나. 지금까지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해준다면...그렇다면 이들은 분명 자네를 따를 것이라 생각하
네.”
유세현조차도 마음이 동할 정도의 정말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허나.
‘만약 실패하면 서너 번조차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도박수.
허나, 말하려면 지금 해야만 했다.
서너 번 이후에 말해봤자 그들의 마음은 돌아섰을 테니까.
유세현은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그래, 언데드 레이즈를 되찾은 이상 꾸역꾸역 혼자서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사람들을 어설프게 써먹을 바에야 차라리 안 쓰는 것만도 못하겠지.
또한 그들이 자신에게서 벗어나 파편을 모으기 시작한다면 필히 놈들과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때 자신은 이득을 취하면 되었다.
“알겠습니다. 말해 보도록 하죠.”
적 군세의 위치를 확인한 유세현은 인원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그가 이렇게 모두를 직접 모은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무척이나 당황해했다.
“여러분들께 할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를 하자.
-꿀꺽.
수백 명의 인원들이 침을 삼켰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유세현이 말을 이어갔다. 중간에 토를 달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되려 처음으로 설명하는 이유에 무척 경청하는 모습.
바위 위에 서서 설명을 마친 유세현이 생존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실로 각양각색이었다.
주위를 잠식하는 정적.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세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럼 그렇지.
언데드 군단만으로 놈들을 친다. 그리고 아이템을 강탈한다.
그가 몸을 홱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함께 하겠습니다!”
적이 들으면 어쩌려는 건지, 카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거리가 멀고 폭풍소리 때문에 닿진 않겠지만.’
이렇게 되면 아린까지 포함해 세 명인가.
허나, 목소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저도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계획은 확실히 있으신 거겠죠?”
하나, 둘. 동참하겠다는 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한 사람이 아예 선동을 했다.
“유세현씨가 아니었으면 어차피 이곳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또한 여기서 놈을 못 조지면 판도라 외부에서도 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확실히 하고 가죠!”
“맞습니다! 유세현 씨가 없었으면 올 수 없었을 겁니다! 같이 싸우죠! 좀비도 있겠다 우리들을 엿 먹인 놈들에게 철퇴를 내려줍시다!”
“우와아아아!”
울려 퍼지는 함성.
유세현은 믿기지 않았다.
정말 따라온다는 것인가.
힘들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까지처럼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껏 한 번도, 단 한 번조차도 상상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유세현이 살짝 손을 들자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
“저와 함께 가시겠다는 분들은 지금 즉시 우측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움직였기에 이동하고 자실 것도 없었다.
“그럼 일단...”
“놈들을 치러갑니까?”
“자리부터 옮기겠습니다.”
매서운 바람소리가 어느 정도 커버를 쳐준다지만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유세현의 말에 사람들은 맥이 빠졌지만, 이런 세세한 것 또한 유세현의 큰 장점이었다.
사람들은 유세현을 따라 이동을 개시했다.
* * *
동서남북에 위치한 4개의 유적에서 얻을 수 있는 특수 아이템, 지배자의 고리 파편.
탑 상층부, 이 자그만 한 세계의 최북단에는 이 고리파편에 딱 맞는 틀이 비치되어 있었다.
데오펠은 천천히 틀로 다가갔다.
“크크크크.”
쫙 벌려진 입에서 비릿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틀 안에는 가리움이 미리 넣어둔 2개의 파편이 있었다.
이제 자신의 파편을 넣고 튀어나오는 놈만 잡는다면...
얻을 수 있다.
그토록 원하고 원하던 증폭기, 지배자의 팔찌를.
데오펠은 마지막으로 케르젠과 교신을 했다.
[인간 놈들은?]
[지금은 정확히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만 어제까지만 해도 파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남동쪽에서 포착했습니다. 우리들의 감시를 잘 벗어난 것을 보니 놈은 생존자들과 함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크크, 그렇단 말이지? 좋아. 아주 좋아! 가루다들의 병력배치는? 잘해놨겠지?]
[예, 물론입니다. 기후가 좋지 않아 관측이 힘들기는 하지만 대규모의 병력이 한 번에 움직인다면 필히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가루다들은 현재 경계선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크들와 가루다가 마주친다면 전투가 일어날 테니까.
“시작하겠다! 준비해라!”
“예!”
확신을 얻은 카취, 아니 데오펠은 남은 파편을 틀 안에 껴 넣었다.
-치지직!
전역에 몰아치던 폭풍이 잦아들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적란운이 점점점 일대를 물들여간다.
한 층, 두 층.
어찌나 층층이 쌓이는지 빛을 전부 흡수해 세상이 암흑천지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내려치는 낙뢰.
-콰광!
거친 소용돌이와 함께 15마리 가량 되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와 흡사한 형상.
탑의 주인이자 최후의 파수꾼.
[릭 하운드]
놈들의 전신에는 털 대신 전격이 흐르고 있었고, 크기도 25m정도로 상상도 못할 정도로 거대했다.
“놈을 공격해라!”
“우와아아아!”
수많은 정예오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운드들의 스텟이 얼마나 강한지 대다수의 오크들은 놈이 발을 휘두를 때마다 픽픽 쓰러져나갔다.
결국 형세는 데오펠이 나서고 나서야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래비티와 암흑투기의 콜라보는 장난이 아니었다.
한 놈, 두 놈.
점점 쓰러져간다.
이제 남은 놈의 수는 2마리.
“흐아아압!”
150명가량 되는 오크전사들이 도약해 동시에 배틀엑스를 내려찍자 척추가 부서지며 하운드의 육신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이젠 1마리.
데오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제 곧이다. 곧!
이놈만 잡으면....
그 순간 죽어있던 하운드의 시체가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르르 떨리는 데오펠의 눈동자.
이 스킬은?
저 높은 산, 능선 뒤에 자취를 감추고 있던 유세현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팔을 치켜 들어올렸다.
-캬아아아아!
좀비들이 폭풍처럼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날개가 정상인 몇몇 좀비는 날아서 돌진하는 상황.
“어떻게 저놈이 여기에!”
생존자들이 유세현를 따르기로 결정한 이후.
그들은 많은 일을 했다.
제단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에 퍼져있는 가루다와 오크들을 습격해 사냥하고, 데오폴론을 교란시키기 위해 이 모든 행동이 파편을 얻기 위한 것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가리움을 뒤쫓아 발견한 제단.
오크들이 통과하려면 가루다 쪽에서 군세를 물려주어야한다.
유세현은 잽싸게 팀을 분할했다.
하나는 아린이 이끄는 더미 팀과 하나는 자신이 이끄는 습격 팀.
아린이 약화된 법칙 덕에 마나스캔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에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물론 아린의 팀원의 수는 1/4정도로 꽤나 적은 숫자였지만 화려한 마법과 언데드를 일부 붙여 뒀기에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 멸족(1)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