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로(3) >
예를 들자면 기본 스텟이 무척 높다던가. 월등한 속성저항력을 지니고 있다던가.
“크으...뭐, 뭐야? 이 괴물은!”
-캬오오오!
-슈우욱!
생존자들을 적으로 인식한 놈들이 미친 듯이 돌격해왔다. 공간이 비좁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회피할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
“미, 미친!”
“스킬! 스킬 날리세요 빨리!”
-슈슝!
-쿠궁!
동굴이 흔들릴 정도의 폭발이 이어졌으나 놈들이 멈추는 일은 절대 없었다.
드리우는 커다란 아가리.
“으아아...”
놈들은 인원들을 무차별적으로 집어삼켰다. 아니, 거의 들이 마셨다고 봐도 무방했다.
유세현이 위치한 장소에도 놈들이 마수가 뻗혔다.
그는 재빨리 등에 올라타 루베르크를 내리 꽂았다.
-치이익.
울려 퍼지는 마찰음.
놈들의 표피세포는 축축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럼에도 무척강한 경도를 지니고 있었다.
보통의 생존자라면 결코 뚫을 수 없는 내구력.
물론, 그래봤자.
높이 팔을 치켜든 유세현이 재차 루베르크를 내리 꼽았다.
-지지직.
샛노란 체액이 터져 나와 수정을 물들인다.
-캬아아아!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놈의 육신.
유세현은 그대로 부패의 어둠을 사용해 루베르크의 짧은 검신으로는 닿지 않았던 내장과 소화기관들을 완전히 작살냈다.
-쿵!
거대한 육신이 나뒹굴고, 코인이 주위를 가득 메우자 그 커다란 입속에서 생존자들이 뛰쳐나왔다.
“허억 허억...사, 산건가?”
-키아아아.
한 마리가 쓰러지자 난동을 피우던 놈들은 황급히 몸을 틀었다.
자신보다 상위의 포식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코인을 흡수한 유세현의 눈이 번뜩였다.
놓칠 수야 없지.
하나, 둘.
그는 길을 따라 뒤쫓으며 놈들을 도륙해나갔다.
그렇게 더 죽이기를 4마리.
이제 남은 것은 한 마리였다.
‘꽤나 멀리까지 도망쳤군.’
그러나 흔적을 쫓을 수는 있다. 생존자들이 퍼 부운 스킬이 생체기가 났는지 체액이 이곳저곳에 묻어있었으니까.
유세현은 우선 막무가내로 뒤쫓으려하는 지드먼의 어깨를 낚아챘다.
분노의 찬 표정을 보아하니 상황은 짐작이 된다.
“제가 쫓을 테니. 인원들과 수색이나 계속 재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 없네. 같이 가세...”
지드먼의 말이 뚝 끊겼다.
착 가라앉은 유세현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
그 모습은 마치 분수를 알라는 것 같았다.
가봤자 도움이 안 된다고. 제 역할이나 다하라고.
책임은 다한다.
허나, 유세현은 여전히 이기적이었으며 사람이 좋은 것 또한 아니었다.
몸을 획 돌린 유세현이 아린을 향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영감님께서 지휘를 맡아 다시 수색을 재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알아서 찾아 가겠습니다.”
“알겠네.”
그가 자리를 박찼다.
* * *
수정으로 이루어진 산.
그 아래로는 찐득찐득한 위액이 흐르고 있었다.
-툭!
천장에서 위액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치이익.
매직 랭크 따위의 갑주는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강력한 산성.
먹힌지 30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살아남아있는 인원이라고는 루시아와 남성 생존자 5명밖에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자아아앙!”
터져 나오는 욕설.
사람들은 한탄했다.
이곳을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고.
“젠장, 지드먼씨만 아니었어도...아니 그런 새끼가 폭포에만 들어오지 않았어도...”
“지금 일이 이렇게 된 게 전부 세현씨 탓이라는 겁니까?”
4명의 남성은 지드먼의 팀이었고, 한 명의 남성은 2존부터 유세현과 함께해온 생존자였다.
“그럼, 아니라는 겁니까? 놈이 이곳에 들어와서 이 사단이 난건데?”
“그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뿐입니다. 아시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다 죽는다는 걸.”
논리적으로 다 맞는 말이었지만, 현재 4명의 남성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죽을 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스스로를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뭐 어쩌라고? 결과적으로는 더 빨리 뒤지게 생겼는데! 아니면 형씨는 뭐 이곳에서 빠져나갈 좋은 방법이라도 알고 있는 건가?”
“......”
그 말에 루시아가 주위를 한 번 더 되돌아봤다.
위장은 어찌나 튼튼한지, 되려 위협스러운 위액만 더 내뿜을 뿐 그들의 스킬로는 뚫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식도로 되돌아가는 정도인데...굳게 닫혀있다.
“세현씨가 구하러 올 겁니다.”
“오긴 뭘 와! 왔으면 벌써 왔겠지! 다 뒤진 거 안보여? 너도 지금 바로 저기 둥둥 떠다니는 코인이 되고 싶냐!”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인데.”
“그니까 합쳐서 뭘 할 거냐고! 할 수 있는 게 있긴 있는 거냐고!”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 속에서 한 명은 완전히 정신을 놓은 듯 보였다.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웅얼거림.
“내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데...어? 내가 어떻게...”
부릅뜬 남성의 눈빛이 쪼그려 앉아있는 루시아를 향했다.
“너...이거 어떻게 책임 질거야 어? 니 아버지가 유세현이라는 새끼를 따라 가자고만 안했어도 이런 일은...”
“애꿎은 여성분에게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결정이고 자시고 지드먼씨에게 선택권을 준건 당신들 아닙니까.”
“크크크...선택권? 그래...그렇지...주긴 줬지...”
그 후로 정적이 감돌았다.
출렁거리며 파도치는 위액.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수정의 산은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있었던 6명도 이제는 빽빽이 붙어 앉아야 되는 상황.
남성이 루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여기서 죽게 될 거야...그 잘나신 네년의 아버지 때문에 말이지.”
“또!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
“지랄하지 마.”
갑작스럽게 일어난 남성의 발이 다른 남성의 가슴을 그대로 후려쳤다.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 일.
더 높은 스텟과는 상관없이 균형이 무너지며 육신이 위액의 바다로 추락했다.
-치이익!
“크아아악!”
남성은 미친 듯이 바둥거렸다. 그런 그를 발로 차 넣은 남자, 췽차오가 루시아를 향해 툭 말했다.
“안 구해줘? 네 아버지를 옹호하다가 저리 된 건데? 아니면 왜? 아~맞아 너 남자랑 접촉하는 거 정말 혐오하는 년이었...”
말이 끝날 새도 없이 루시아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위액의 산성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사체가 가라앉으며 코인이 터져 나온다.
췽차오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그래도 도와주려 하긴 했네?”
“야! 췽차오! 이게 무슨 짓...”
“아 좀 닥쳐 나카무라. 너도 선비 짓이냐? 어차피 우린 끝났어. 못 살아나간다고. 그러니까 어차피 뒤질 바에는 재미나 보고 뒤지자고 어? 너도 이년이랑 한 번 하고 싶어 했잖아?”
췽차오가 3명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3명은 머뭇거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래, 씨발. 어차피 뒤질 거...”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비노.
알테리아 대륙에서는 태어난 그녀는 지금까지 쭉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왔다.
붉은눈은 불운와 함께 마족의 상징이었으니까.
덕분에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은 기본이었고,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는 때때로 구타도 이어졌다.
아버지, 지드먼 아인셰르가 필사적으로 보호했지만, 그럼에도 무용지물.
그런 그녀에게 마음의 벽이 생긴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리라.
허나, 신기하게도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판도라에 떨어진 이후 만나게 된 현대인.
그들은 그녀를 되려 아껴주고 보호해주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좋았다.
지드먼도 달가워했다.
이런 건 완전 처음이었으니까.
허나, 당연한 말이지만 현대인들도 이러는 이유는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살짝 신비해 보이는 분위기.
단순히 붉은눈과 흰백발만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들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리라.
그리고 마침내 터진 사건.
그때부터 루시아에게는 대인기피증에 이어 남성공포증이란 병도 생겼다.
그녀는 미친 듯이 마수를 잡아 코인을 흡수했다.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남자에게 눌리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협동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말을 걸지 않았으며, 남자의 사적인 접근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행동 때문이었을까?
루시아가 손을 뻗자 투명한 방벽이 남성들의 앞을 막아섰다.
췽차오가 실소를 내뱉었다.
“허...그 따위 조악한 방어마법으로 우리 넷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냐? 야! 저거 먼저 깨부수고 눕히는 놈이 1등으로 하는 거다!”
“하! 떨어지지나 말아라. 짜샤!”
-파바밧!
췽차오가 제일 먼저 달려들었다.
마력이 일렁이고 주홍빛의 막이 검을 감쌌다.
레어 SS랭크의 속성부여스킬.
다른 인원들도 저마다 스킬을 사용했다.
마력의 한계가 분명한 동급의 스킬로는 방어 불가능.
이강호가 사용하는 레전더리 급의 쉴드나 혹은 유니크 등급에 달하는 상위방어 마법만이 상쇄가 가능한 것인데, 그런 스킬은 좀처럼 얻기 힘들다.
루시아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허나.
-치이이이익!
-챙!
전부 튕겨져 나간다.
“어? 씨발 뭐야?”
“존나 좋은 스킬인가 본데?”
“야! 쳐! 그까지 것 하나 못 부수겠냐!”
4명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허나, 그 방벽은 좀처럼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금도 가지 않는다.
루시아가 천천히 다가오자 되려 4명은 뒷걸음질 치는 신세가 되었다.
“씨, 씨발 뭔데?”
“야! 야! 더 강한스킬!”
“단일기로는 이게 최고라고! 남은 건 광역기 밖에 없어!”
“허! 이 병신들이! 비켜 내가한다!”
-쉬이이!
췽차오의 검이 빠르게 진동하며 굉음을 내뱉었다.
비록 E랭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유니크 등급의 스킬.
[파쇄진궁]
-치이익!
-트득.
갈려나가듯 막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개년아 포기해라! 시간도 없는데 쫌 즐기고 뒤지자고! 어?”
살짝 찡그려지는 루시아 인상.
그 순간 막이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나갔다.
마치 스킬에 의지가 있는 것처럼.
놈의 접근을 거절하듯!
고유특성.
[아이기스의 방패]
“어...어?”
“이 미친놈아 뚫을 수 있다며!”
“야! 점점 다가오잖아! 뒤에 위액이라고!”
“씨발...이게 무슨...”
4명은 어느새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앞은 깨지지 않는 방벽.
뒤는 위액.
“야! 그냥 뛰어넘어서 뒤로 돌아가!”
한 명이 도약한 순간.
그녀의 앞을 막아주고 있던 무형의 막이 더욱 높이 치솟아 올랐다.
-텅!
그대로 부딪쳐 추락하는 남성.
“미친! 어떻게 스킬이 변화...야! 나 좀 잡아줘! 이대로는 너희랑 충돌한...”한 발 더 앞으로 내딛은 그녀가 살짝 몸을 틀었다.
-텅!
2차 충돌이 일어나며 추락하는 남자의 방향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서있는 수정에서 위액으로.
-치이익.
“끄아아악! 올려줘! 빨리 올려...”
비명을 듣는 췽차오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했다.
뚫을 수도 없고 넘어갈 수도 없다.
“내, 내가 잘못했다. 안 덮칠 테니까 스킬 좀 풀어라!”
“......”
한 걸음. 또 한 걸음.
췽차오는 그것이 마치 사신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진짜! 안 덮친다고 미친년아! 우리 다 죽으면 너 혼자 남게 되는 거라고!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그러나 루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 지드먼을 제외하고는 항상 혼자였으니까.
그러니 혼자가 되는 건 전혀 두렵지 않다.
-텅!
“이런 미친년이...끄아아악!”
3명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루시아는 몸을 쪼그렸다.
고유특성을 스킬에다가 적용하면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친다. 그래서 원래는 정말 최후의 최후에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트르륵.
난리법석을 피어댄 덕에 어느새 위액은 발목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이윽고 수정이 완전히 위액에 잠겼다.
그녀의 몸을 보호막이 감쌌다.
-치이익.
버티고는 있다지만, 언제까지 가능할까.
시간이 흐를수록 막은 점점 벗겨져 갔다.
루시아는 직감했다.
여기서 죽을 것이라는 걸.
‘끝...인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감정이 요동쳤다.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거 차라리 어릴 때 죽었더라면 아버지도 그 고생은 하지 않았을 터인데.
달싹거리는 입술.
자신을 잃고 고통스러워할 아버지를 떠올린 루시아의 눈가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 누구라도 좋다.
설상 그것이 자신을 평생 동안 괴롭힌, 진짜 마족이라 할지라도.
-쿠우우웅!
그 순간 루시아의 육신이 앞으로 홱 쏠렸다.
< 수로(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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