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취(2) >
쇄도하는 검!
“그 몸에서 얌전히 기어 나오시지.”
“...?!”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케르취, 아니 데레오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란 말인가!
나오라니?
아주 잠깐, 고작 1초 정도 생각에 잠겼던 것에 불과하건만 루베르크의 검신은 어느새 데레오트의 목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빌어먹을 인간 놈이!”
-퍼엉!
거친 기합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몸을 살짝 뒤로 물린 유세현이 짧게 혀를 찼다.
‘파동계열 스킬인가?’
파동계열 스킬은 육안으로 좀처럼 확인이 안 된다는 점과 무척 빠르다는 점에서 상대하기 번거롭다.
저항력이 높아 약한 파동은 무시해도 되지만...
제법 스킬의 등급이 높은지 위력이 좋다.
데레오트가 창을 풍차처럼 회전 시키며 유세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르쿠라의 몸을 다루는데 미묘하게 어설펐던 데레아펜다과는 달리 데레오트는 완전 적응했는지 자세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챙! 챙!
이어지는 3초간의 접전.
기세 좋게 공격을 취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유세현이 어찌나 빠르고 강한지 데레오트의 창술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우 상단 휘두르기. 좌하단 찌르기.
전부 받아쳐낸다.
아니, 그전에.
‘크으...이게 대체 뭔 힘이냐!’
잘 키워 놓은 케르취의 힘 스텟은 가르쿠라보다도 살짝 높았다.
B랭크 50%.
이 정도면 판도라 본토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도 무척 높은 능력치에 속한다.
대부분 C랭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최후를 맞으니까.
이전 인간과 펼쳤던 전쟁에서도, B랭크 30%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무척 드물었다.
기껏해야 기사단이나, 무림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그런데 어떻게 본토도 아닌, 지배자인 자신들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이 섬에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이 존재한단 말인가!
-후웅!
육중한 검에 튕겨져 나간 데레오트의 팔이 한순간 허공에 붕 떴다.
기회!
‘자, 나와라.’
몸을 빙그르르 돌려 회전력을 더한 유세현의 검이 재차 데레오트의 목을 향했다.
흑뢰검을 사용했다가는 데레오트가 재수 없게 소멸할 수도 있었기에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그때.
-쿠우웅
어마어마한 중력이 유세현의 육신을 짓눌렀다.
카취의 짓이었다.
유세현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새 여분의 도끼를 쥐어든 카취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놀아나기 싫다는 듯.
아니, 사실 카취의 머릿속에는 유세현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허나, 인간의 말 때문에 흔들려 동료 전사를 죽게 놔두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세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나오는 게 정상이지.
시선이 다시 데레오트를 향해 돌아간다.
데레오트는 그 순간 오한을 느꼈다.
‘이 인간...정말 예삿 놈이 아니다.’
마치 이강호가 눈앞에 있는 느낌.
‘전력으로 단번에 끝낸다.’
데레오트가 사용하는 케르취의 육신이 얇은 막을 씌우듯 점점 밝은 빛으로 뒤덮여갔다.
케르취만이 지니고 있는 유니크 SS랭크 등급의 스킬.
[홀리블레스]
이 스킬은 힘, 체력, 민첩 스텟을 어마어마하게 증가시켜주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전사들 중, 케르취의 육신을 데레오트에게 준 이유.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점점 커지는 몸.
곳곳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저 미친놈이 저걸 왜 사용해? 쟤 폭주 컨트롤 못하잖아!”
“젠장! 눈깔이 뒤집힌 건가? 전부 물러나! 휩쓸린다!”
그러나 변화를 마친 데레오트는 정확히 유세현만을 공격해 나갔다.
폭주는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지만, 케르취는 애초에 의식이 끊긴 상태였기 때문.
“어...어? 저놈 이제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건가?”
“...글쎄...그런 거 같은데? 전혀 반응하지 않잖아?”
“그럼 도울까?”
“가자!”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정예병들.
카취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
냉정한 자신도 불안정한데,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케르취가 폭주를 다루다니.
-펑! 펑!
유세현의 루베르크와 케르취의 창이 맞부딪칠 때마다 상상할 수 없는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폭주와 홀리블레스, 두 스킬의 시너지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힘 스텟이 정말 장난 아니게 올랐다.’
B랭크 70~75%에 정도에 달하는 힘.
‘정말 좋은 육체에만 잠식하는군.’
그래도 자신의 상대를 될 수 없다.
유세현은 그리 판단하고 있었다.
녀석의 창술은 이강호에 비하자면...
-촤자작.
순식간에 벌어진 틈을 날카롭게 파고든 허벅지, 복부, 루베르크가 전신을 난자했다.
빠르게 쌓여가는 데미지.
“크윽!”
데레오트는 경악을 터트렸다.
이래도, 이래도 밀린다는 말인가?
이놈은 대체!
기회를 살핀 유세현은 가르쿠라를 상대했을 때와 같이 놈의 목을 움켜 쥐려했다.
그런데 그 순간.
천마의 잔상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자신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경로를 이용해 검을 내려치는 모습.
천마의 검법을 익힌 뒤, 정말 간혹 가다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천마를 믿는다.’
팔을 어깨에 붙인 그가 무릎을 굽혔다.
그는 곧바로 손목도 살짝 아랫방향을 향해 틀었다.
회전 올려 베기!
-치지직!
“크아아악!”
복부부터 쇄골까지 일자로 잘려나가는 육신.
유세현은 감탄했다.
‘방어법까지 고려한 거였나?’
자신보다 몇 수 앞을 바라보는 검법.
데레오트는 온건한 오른손을 이용해 벌어지는 육체를 황급히 쥐어 잡았다.
너무도 심각한 타격.
방금일격으로 심장도 함께 잘려나갔다.
‘젠장...이 몸은 더 이상 전투 불가다...’
그나마 다행인건 계속 붙잡고 있으면 회복력 때문에 붙을 것이라는 것.
놈도 힘을 많이 사용했으니, 나머지는 카취에게 맞긴 다면...
그 순간.
-솨아아아.
루베르크에게서 튀어나온 어둠이 데레오트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트드득.
새까맣게 변해가는 근육.
재빨리 떨어진 전사들이 혀를 찼다.
“젠장...저 빌어먹을 어둠 때문에...”
그 사이 유세현의 검은 데레오트의 목을 재차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이 몸과 함께!
-사르륵.
순식간에 빠져나온 데레오트가 케르취의 등, 허리, 발을 거쳐 지면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덥석
“어딜 가려고.”
유세현의 우악스러운 손이 데레오트를 꽉 움켜쥐었다.
데레오트는 정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퍼버벅.
순식간에 때려 제압한 유세현이 케르취에게서 나온 코인을 순식간에 흡수했다.
[유니크 SS랭크 홀리블레스를 익히셨습니다.]
[마심원이 신성스킬 홀리블레스를 거부합니다. 스킬이 제거됩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하필 나와도 신성스킬이라니.
유세현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데레오트를 붙잡고 있는 팔을 들어 올리자 오크들이 눈을 연신 깜빡였다.
가만히 있었다면 몰랐겠지만, 유세현의 행동에 의해 그들도 케르취에게서 빠져나오는 데레오트를 본 것이다.
“이놈이 누군지 아나?”
“......”
“바로 이 섬의 지배자다. 이놈들은 상대의 몸을 잠식할 수 있는 특수 능력을 지니고 있지.”
오크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유세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캐치한 것!
더 이상 듣기 싫은지 한 오크가 무기를 고쳐 잡았다.
“취익, 인간!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 구나. 내 직접 네놈의 두개골을 아작 내어 케르취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
다른 수십 명의 오크들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때.
카취가 손을 들어올렸다.
“조금 더 놈의 말을 들어보자.”
“카취! 지금 이건 놈에게 휘둘리는...”
“하지만 저놈은 실제로 케르취의 몸에서 나왔다. 그리고 너희도 최근 느끼고 있었지 않았나. 케르취가 뭔가 이상해졌다는 걸.”
“......”
실로 좋은 분위기다.
유세현은 케르취의 차고 있던 투박한 목걸이에서 관망경을 떼어내 카취를 향해 던졌다.
“이건?”
“뭔지는 직접 정보를 읽어봐라.”
카취와 근처에 있던 일부 오크들의 시선이 관망경을 향했다.
“이, 이건...”
살짝 떨리는 음색.
본디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아이템 정보는 함부로 읽을 수 없다.
주인에게서 강탈하거나 혹은 허락 했을 때만 비로소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그들이 여태까지 관망경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이유였다.
카취의 인상이 별안간 와락 구겨졌다.
“네놈...”
그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을 본 이상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음을.
이 순간 이들은 좋으나 싫으나 데오폴론이 장악한 오크 족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진실을 파헤친 대가.
유세현은 카취를 향해 다른 아이템 하나를 던졌다. 근래 강한 마수를 사냥하면서 운 좋게 얻은 기록수정구였다.
“그걸 주도록 하지. 회유하는데 도움이 될 거다.”
“......”
카취의 팔뚝에 불끈 힘줄이 솟았다.
치욕.
그러나 그가 기록수정구를 부수는 일은 없었다.
“도대체 뭔데 그러는 거지! 카취! 우리에게도 아이템을 줘봐라!”
수많은 오크들이 빙그르르 둘러싼 자세를 유지한 채 외쳤다.
카취는 관망경을 쭉 돌렸다.
“이건...”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진다.
하나 같이 똑같은 반응.
유세현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기위해 데레오트를 향해 말했다.
“깨어난 거 알고 있다. 자, 네가 직접 오크들에게 말해봐라”
[......]
묵묵부답.
“말하기 싫다는 건가.”
유세현은 데레오트의 몸을 찢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고통을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크아아아악!]
데레오트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결국 몸속에서 코인이 터져 나올 때까지 절대 불지 않았다.
제 딴에는 신의를 지킨 것이겠지만, 아쉽게도 대다수의 오크들은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침묵은 긍정의 의미였으니까.
유세현은 몸을 획 돌렸다.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
카취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저 인간은 강하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여 놔야 된다.
사르륵 올라가는 팔.
허나, 그 자세가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이대로 놈과 전투가 벌어질 경우.
‘막대한 피해가 나온다.’
케르취가 오크로드의 명령에 의해 토벌을 나선 이상.
오크로드도 감염 되었다고 가정해야 한다.
제콸 등 믿을 수 있는 수하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수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
하나하나 적을 거르고 부족을 다시 재통합해야 되는 이 상황에서 정예병은 한 명, 한 명 무척 귀중한 전력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기에 유세현이라는 인간 또한 겁 없이 등을 돌린 것이다.
‘유세현이라...’
오크들은 멀어져가는 유세현을 한동안 주시했다.
* * *
‘이걸로 오크들은 한동안 마음껏 움직이지 못한다.’
적어도 가루다와 오크, 두 세력에게 동시에 공격당할 일은 면한 것이다.
카취란 놈은 좋은 스킬도 가지고 있는데다가 스텟도 높으니 잘하면 정말 오크들을 구해낼 수도 있겠지.
그렇게되면 상당히 또 귀찮아지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유세현은 오크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지금 중요한건 오크족의 유적 공략을 조금이나마 늦췄다는 것!
4개의 유적의 공략이 완전히 끝나면 중앙에 거대한 탑이 생긴다.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증폭기.
이 이름 모를 증폭기는 정신계 능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줘 지배력을 상승시킨다고 한다.
데오폴론의 손에 들어간다면 대다수가 놈의 수하가 되는 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시간싸움이었다.
< 카취(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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