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붕괴(5) >
죽는다.
김주희가. 이강호가.
자신이 드래곤에게 닿기 전에.
‘안돼!’
용의 숨결이 대지를 뒤덮으려는 순간.
빙제의 시선이 김주희를 향해 스르륵 돌아갔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살짝 쳐진 눈매와 미미하게 올라 간 밑 입술.
“역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구나.”
-파앗
순식간에 도약한 빙제가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눈을 시리게 만드는 빛이 쏟아져 나온다.
그 어떠한 존재의 접근도 거부하는 것 같은 너무도 새하얀, 순백의 냉기.
그것은 주위의 수중기, 아니 공간자체를 얼려가며 브레스를 향해 날아갔다.
남아있는 내력과 진원진기를 모두 쏟아 부운.
지금의 빙제를 있게 해준 절기.
[빙백신장(氷白神掌)]
-치지직!
빙백신장은 스스로를 승화시키며 화염의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열기는 다시 빙백신장을 감싸더니 빠르게 잡아먹어 들어갔다.
그 광경을 확인한 셀론의 날카로운 동공이 파르르 지진을 일으켰다.
고작해서 몇 초에 불과하지만 브레스의 진로를 막아내다니!
거기까지 생각한 셀론은 아차 싶었다.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흉흉한 어둠이 바로 앞에서 넘실거렸다.
드래곤인 셀론조차도 섬뜩하게 느낄 정도의 엄청난 살기.
“죽어라.”
브레스를 사용한 도중이라 완벽하게 회피할 시간은 없었다.
-쉬이익!!
-슉!
스쳐지나가듯 셀론의 육신을 통과하는 천마광룡참과 부패의 어둠.
[어?]
셀론은 눈을 깜빡였다.
당한 것이란 말인가? 드래곤인 자신이?
하지만 전혀 고통이...
그 순간 왼쪽어깨부터 가슴까지 양옆으로 축 갈라졌다.
[크아아아아아!]
드래곤의 강력한 회복력이 두 살을 이어 붙이려고 하지만.
-치지지직
어둠이 방해한다.
아니, 되려 살을 갉아 먹고 있었다.
-슈우욱.
-쿵.
추락한 빙제가 김주희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빙백신장이 닿지 않은 곳은 이미 불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육신.
“하, 할아버지!”
김주희가 빙제의 몸에 붙어있던 불을 끄기 위해 계속 손을 대려는 순간.
“멈춰! 김주희!”
이강호가 버럭 외쳤다.
김주희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서, 선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빨리 불을 꺼야...”
“그 불은 그렇게 해선 못 잡아! 손을 대면 옮겨 붙을 뿐이야!”
“...예? 하, 하지만...저 지금 마력이 하나도 없는데...”
여기 있는 모두가 마력을 전부 소진했다.
진원진기인가 뭔가 하는 것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다면 몰라도.
김주희는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
그때, 아퀼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쉬이익.
엄청난 양의 물이 생성되어 빙제를 감싼다.
김주희가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도 마력이 없었을 터인데.
“너...”
“......”
아퀼라가 시선을 휙 돌렸다. 그 사이 이강호가 고통을 호소하는 빙제의 몸을 살폈다.
상처 틈으로 들어간 불길이 내부를 완전히 휘저어버려 상태가 무척 심각하다.
아무 치료도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이라면...
“으으으...”
덜덜 떨리는 빙제의 손이 김주히의 얼굴로 향했다. 김주희는 황급히 그 손을 잡았다.
“하, 할아버지.”
“끌끌. 어떠더냐 내 빙백신공이...”
“...정말 멋졌어요. 그 어떤 것보다도.”
“...그래, 내 빙공은 최고지.”
빙제가 손을 휙 그었다.
-치지직
손가락 선을 따라 공간이 찢어진다.
이강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건...아공간 포켓?’
그 속을 뒤적이던 빙제가 팔을 뺐다.
그의 손에는 책 한권이 잡혀 있었다.
아이템 명: 빙백신공(氷白神功) 비급서.
등급: 에픽 [SS Rank]
상세정보: 북해빙궁의 빙제가 직접 저술해놓은 비급서입니다. 후계자를 위하여 하나하나 세밀히 풀어져 있어 보다 더 쉽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순 사용시 레전더리[SS Rank]로 등급이 하락합니다.
비급서를 김주희 앞에 내려놓은 빙제가 툭 말했다.
“가지거라.”
그 말에 김주희의 눈가가 재차 떨렸다.
“...할아버지.”
“끌끌끌. 왜 그러냐. 이것 때문에 그간 나를 졸졸 따라 댕겼던 것 아니더냐.”
맞는 말이었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처음 그 짜증스러운 것도 감수해가면서 졸졸 따라다녔다.
기뻐야 되는데.
분명 기뻐야 되는 게 정상인데.
심장을 비수로 후벼 파듯 가슴이 쿡쿡 쑤셨다.
“왜, 왜...이걸 지금 주세요. 다 잘 끝나고 주시면 되잖아요.”
“끌...크윽. 그때는 늦는단다 아가야...내가 스스로의 몸 상태도 모를 것 같으더냐? 난...이곳에서 죽는다.”
“......”
“그렇다면 죽기 전 나도 여기에 존재했다는 흔적 하나 정도는 남겨야 되지 않겠는냐. 그래서 주는 게다. 결코 네가 좋아서 주는 건 아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하지 말거라.”
눈물 맺힌 김주희의 입가은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눈치 빠른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한 말은 행여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뚝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빙제의 얼굴을 적셨다.
빙제가 그녀의 머리를 향해 손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마.”
그가 중얼거렸다.
“천(天)에서 내려온 서리가 새벽을 가라앉히니 그 속에서 순백(純白)의...”
그건 구결이었다.
한 자, 한 자. 모든 의미가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김주희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흐느껴 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있어 가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력만 일삼는 아버지도. 자신을 두고 도망친 어머니도.
만약 그런 그녀에게도 약간 얄미운 할아버지가 존재했더라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알림창이 떠오른다.
[빙백신공(氷白神功)의 구결을 익히셨습니다.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빙백심법(氷白心法)을 승계 받았습니다.]
“...살아 남거라. 주희야.”
빙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무수히 많은 코인이 주위를 밝게 빛냈지만, 그중에서 스킬 코인은 단 한 개도 없었다.
* * *
[카아아아아! 인간! 인간주제에에!!]
셀론의 발광이 이어졌다.
유세현은 극한의 움직임을 보이며 날아오는 마법을 회피했다.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이제 남은 지속시간은 많아 봐야 1분.
‘그 안에 끝을 본다!’
[천마반탄기(天魔反彈氣)]
검으로 상대방의 무공을 되돌려 치는 천마신공에 하나 밖에 없는 방어 절기.
-치지직!
튕겨져 나간 파이어 블래스트가 셀론을 향해 되돌아갔다.
셀론은 재빨리 쳐내려했지만.
치명상 때문에 몸을 가누기 힘들다.
‘젠장...내가 어쩌다가...’
회복이 안 된다.
계속해서 좀 먹는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마왕의 힘을 사용하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마왕.
반드시 지금 처리해야 한다.
‘놈도 한계는 있을 터.’
그 한계가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 셀론은 블링크를 사용하려 했다.
허나.
“넌, 못가.”
-쿠우웅!
흔들리는 셀론의 정신력과 비례해 어마어마한 압박이 육신을 옭아맨다.
[크으으으 네노오오옴!]
전력을 다해 다가온 유세현이 천마광룡참을 운용하려던 찰나였다.
-치지지직!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갑자기 쩍 갈라졌다.
마치 종잇장을 찟듯.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커다란 손톱.
-푹.
그것은 셀론의 심장이 위치해 있는 곳을 정확히 가격했다.
광소가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하! 어디로 사라졌었나 했더니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크으으윽.]
셀론이 황급히 그 팔을 붙잡았다.
힘을 빼는 순간 드래곤하트가 박살날 것이다.
비등비등한 완력.
허나.
그 순간 균열이 더욱 갈라지며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쫙 찢어진 입과 눈. 그리고 앞으로 솟아난 4개의 뿔.
그것은 분명 얼굴이었다.
“크흐흐. 놓치지 않아!”
-슈슈슉!
-파바밧!
균열 내부에서 날아온 수십 개의 못이 셀론의 몸을 정확히 꿰뚫는다. 유세현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크흐흐! 용케 지금까지 잘 도망 다녔지만 이젠 끝이다 도마뱀!”
그 말에 셀론이 낭패어린 표정이 되었다.
[크으으...내가 고작 인간 때문에...]
“뭐? 인간?”
그제야 드래곤의 부상을 발견한 놈의 눈이 유세현을 향했다.
순간적으로 꿈틀거리는 미간.
“뭐냐 이놈은? 어떻게......”
[크아아아! 이렇게 되면 다 같이 가자!]
셀론의 눈이 일순간 번뜩였다.
그 순간 교인, 일행 너나 할 것 없이 인원들의 눈앞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지역, 페레온의 붕괴가 시작됩니다.]
[완전 붕괴까지 남은 시일, 14일.]
-쿠구구궁!
대지가 요동쳤다.
유세현은 입을 악물었다.
붕괴라니?
설마 이 땅을 먹어 놓은 게 드래곤이 이었단 말인가!
유세현이 몸을 돌리는 순간.
[크하하! 이미 늦었다!]
그새 아공간에서 무엇인가를 꺼낸 셀론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콰드득.
무엇인가가 박살나는 소리.
-슈우우!
그들의 바로 옆으로 지금까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법진이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마법진이 원의 형태를 뛰고 있다면, 이것은 꾸불꾸불 형태가 불분명하다.
“이건!”
[크흐흐흐! 어딜 가려고! 우리는 다 여기서 죽는 거다. 마족아!]
이번에는 손을 빼내려는 마족을 역으로 셀론이 붙잡았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유세현은 남은 마력을 이용해 전력으로 지상을 향해 달렸다.
김주희가 외쳤다.
“선배니이임!!”
“알림창 봤으면 뒤돌아보지 말고 뛰기나 해!”
그 사이 위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빠져나가려는 마족과 붙잡으려는 드래곤.
-콰아앙!
그 파공성이 여기까지 미친다.
“이거 놔라!”
-파바바밧!
허나, 드래곤은 아무리 맞아도 놓지 않았다.
더 나아가.
[네놈도 못 간다!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유세현이 있는 장소를 향해 역중력을 걸었다.
마력을 전부 소비한 그로서는 대응해볼 여지가 없었다.
약간 늦게 출발한 김주희와 유세현의 몸이 붕 떠오른다.
그 순간.
마법진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범의 아가리처럼.
내부는 온통 어둠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마족이 고함을 질렀다.
“이딴 곳에서 그걸 사용하다니 정녕 미친 거냐!”
[어차피 죽으면 이 아이템도 끝이다.]
“크으으...네놈...이 팔 값은 너의 동족에게서 받도록 하겠다...잘 가라.”
마족은 깊게 박힌 자신의 팔을 잘라냈다.
셀론이 황급히 잡아 보려 했지만.
-스스스.
이미 마족은 눈앞에 없었다.
균열은 블랙홀처럼 셀론의 몸을 점점 잡아먹어 나갔다.
유세현은 그것을 잠시 바라봤다.
‘저거에 빨려 들어가면 죽을 가능성이 높다.’
무조건 빠져나가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건.
진원진기.
얼마의 마력을 잃어도 상관없다. 우선은 살아남아야 한다.
처음 사용해 보는 것이었지만 천마 덕택 일까 의외로 진원진기를 끓어 올리는 것은 쉬웠다.
“하아압!”
그는 지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을 집중에 사용했을 뿐인데 그새 블랙홀의 근처까지 몸이 다다라있다.
드래곤이 본의 아니게 틈을 막아주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꺄아아!”
그는 우선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김주희를 재빨리 받았다.
“서, 선배님?”
“꽉 붙잡아. 탈출한다.”
그는 허벅지가 터져라 죽을 힘을 다해 발을 내딛었다.
허나 어찌나 흡인력이 강한지 좀처럼 나아가지지 않았다.
무공이 부족한 게 아니다.
순수한 근력이 딸린다.
거기다가 뻗어오는 셀론의 마수까지.
[크으으 못 간다!]
유세현은 곡예를 부리듯 셀론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갔다.
천마군림보 정도나 되었으니 이정도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 아니었더라면 진즉 빨려들어 갔을 터였다.
범위는 그리 넓지 않은지 인력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조금. 조금만 더하면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땅을 딛은 순간이었다.
[귀혼마패지(鬼昏魔覇指)!]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미세하게 얇은 섬광하나가 둘의 앞을 스쳐지나간다.
폭발과 함께 또다시 붕 떠오르는 몸.
저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이강호가 보였다.
“아...”
둘의 몸은 암석과 함께 범위 권으로 서서히 빨려가고 있었다.
마력도 다 사용한 상황.
체력 때문에 더 이상 진원진기를 끓어 올릴 수도 없었다.
바둥거리는 김주희가 눈에 띈다.
그녀는 창과 비급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다.
실소를 내뱉은 유세현은 손에 쥐고 있던 루베르크를 놨다. 그리고는 곧바로 헤엄치듯 김주희를 향해 다가갔다.
“서, 선배 거, 검이!”
“괜찮아. 그것보다 이게 중요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김주희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김주희는 그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다.
“선...배?”
유세현이 몸을 획 틀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정말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말이지.”
-후웅!
김주희가 채 말을 이을 새도 없이 그녀의 육신이 엄청난 기세로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어...”
그녀는 순간 어벙한 표정이 되었다.
뻥긋거리는 유세현이 입이 시야에 들어온다.
강풍에 의해 뭐라 하는지 들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귓가에는 분명 또렷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살아라.’
-쉬이익!
유세현의 육신이 루베르크와 함께 저편으로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 붕괴(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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