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붕괴(4) >
새까만 어둠이 자욱하게 퍼져있는 공간.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쯧. 미련한 제자야. 너는 정말 불쌍하다 시피 무공에 재능이 없구나.”
등 뒤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진 않다.
“덕분에 내가 직접 나서야 되었지 않느냐!”
성질을 잔뜩 내는 천마는 내뱉는 말과는 반대로 웃고 있었다.
한걸음 떨어져 전부 지켜보고 있던 유세현이 미소를 지으며 툭 말했다.
“그래서 별로셨습니까. 스승님.”
“에이이~! 이놈이 말이라도 못하면...”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유세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제 몸을 움직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천마가 튀어나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천마 또한 실소를 내뱉었다.
“네놈은 정말 본좌가 본 놈들 중에 가장 재능이 없는 놈이다. 기껏해야 장사월과 비등비등할 정도지.”
순수한 실력으로 부마존이라는 직위에 올라갈 정도라면 사실 재능이 엄청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재능이란 것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니 만큼 유세현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천마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위대한 스승이 모자란 네놈을 위해 선물을 하나 두고 왔다.”
“...무슨.”
“예끼 이놈! 그런 건 가서 직접 보거라! 본좌가 일일이 설명해 줘야겠느냐!”
천마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져만 갔다.
각자 본래의 있어야할 장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련한 제자야.”
“......”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구나.”
그 답지 않게 약간의 쑥스러움이 담겨 있는 말투였다.
유세현은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 * *
정신을 되찾은 유세현은 곧바로 몸 상태를 살폈다.
천마가 그 강한 스킬을 여러 번 사용했음에도 마력이 고갈되지 않았다.
효율의 차이.
그는 선물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력이 회로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흔히 말하는 십이정경과 기경팔맥.
그동안 그는 천마심법을 이용해 어둠의 마력에 패도의 힘을 담았을 뿐 몸 자체에 순환시키지는 못했다.
타인이 운용하는 것을 눈으로 보긴 했으나 너무도 세밀하여 번번이 실패한 것.
허나, 완전하진 않지만 현재 유세현의 혈맥의 일부에는.
-쉬이익.
어둠의 마력이 순환되고 있었다.
‘좋은 선물을 받았군.’
허나, 감상에 젖어 들어 있을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쿵!
발길질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유세현이 곧바로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도대체 무어냐 저 괴물은...”
드래곤의 커다란 육체를 본 빙제가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간과 인간끼리의 대결구도였다.
그는 장사월이 죽는 순간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허나,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캬아아아! 이 미꾸라지 같은 놈들이!]
-콰앙!
불의 비가 사방에 빗발친다.
말이 불의 비지 사실 이건 비라고도 할 수 없었다.
쏟아지는 불의 비 크기 하나하나가 무려 수백 년 된 종유석만 했으니까.
“크으윽! 저건 대체...”
“크아아악!”
약간 떨어진 곳에서 관전하던 수준 낮은 교인들은 그 여파에 휩쓸려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이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단 두 가지 뿐.
백령처럼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거나.
아니면, 맞서 싸우거나.
마력을 약간 회복한 김주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당장 도우러 가야 돼요. 저건 아무리 봐도 둘만으로는 무리에요.”
속도, 힘. 그리고 마법.
김주희가 보기에 드래곤은 큰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유세현보다 재빨랐으며 힘도 강했다.
지금 두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회피하고 있는 것은 정말 운이 좋아서.
아니, 실력과 스킬이 받혀주지 않았더라면 당장 나가 떨어졌으리라.
“가서 어쩌려는 게냐. 저들처럼 괴수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겠느냐?”
“...적어도 보좌는 할 수 있을 테죠.”
“흠...”
빙제도 이번에는 말릴 수 없었다.
확실히 이젠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알았다. 가자꾸나.”
빙제가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이었다.
-스스슥.
수십 명이 그들의 주위로 착지했다. 10위권은 아니지만, 100위권 내에 드는 인원들로 마교에서 전부 한가닥 한다는, 상당히 성깔 있는 이들이었다.
“네놈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헤치려고 온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그럼 뭣 때문에 온 게냐?”
“이런 상황에서 너무도 당연한 걸 묻는군.”
교인은 딱 잘라 말했다.
빙제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그래, 마교에는 이런 놈들이 있다.
자리를 건, 신념을 건 사람끼리의 대결에는 끼어들지 않으나, 다른 괴물이 설치는 것은 절대 방관하지 못하는 자들.
오직 힘만을 추구하여 목숨이 아까운지 모르는 놈들.
“천마의 제자와 창잡이에게 우리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전해라. 그럼 우리는 우리끼리 알아서 놈을 대적하겠다.”
“좋다. 약조하지.”
“그럼, 먼저가라. 바로 뒤 따르겠다.”
-사사삭.
빙제를 포함한 아퀼라, 김주희, 그리고 깨어난 남궁시영이 이동을 개시했다.
* * *
-쉬이익!
-쿵!
날아온 꼬리가 유세현의 복부를 향해 정확히 날아들었다.
중력마법과 주위의 화염 등 여러 가지 상황들이 복합하여 얽히고설켜 회피가 불가능하다.
검을 휘두를 틈도 없었기에 유세현은 팔을 들어 가드했다.
-콰드득.
“크윽!”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이어진다.
A랭크의 스텟을 지니고 있는 놈은,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게 판도라 최강자로 군림하는 드래곤의 저력.
만약 상대하는 이가 이 둘이 아니었다면 채 10초도 버티지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유세현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기까지가 지금상태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남은 것은 마력을 폭발시켜 마족화를 사용하는 것.
마족화를 하게 되면, 종족 특유의 특수 효과를 받을 수 있어 신체의 빠른 회복이 가능하다.
허나.
‘그래도 이길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만큼 스텟의 차는 압도적.
그때였다.
“선배님이이임!”
김주희와 함께 전혀 모르는 인원 다수가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번씩 본적은 있었던 것 같다.
단지 인사만 나누고 헤어져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뿐.
“너 왜 이곳에...아니 그보다 이자들은?”
“괴물을 잡겠대요! 공격만 하지 말아달라고...”
유세현의 시선이 교인들을 향했다.
자신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강자.
‘하려면 지금뿐인가.’
“하아압!”
이윽고 교인들이 여러 갈래로 퍼져 공격을 시작했다.
사방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절기.
[귀찮은 인간 놈들!]
허나, 그중에서 몇 명은 채 빛을 보기도 전에 드래곤의 손과 꼬리에 의해 싸늘한 주검이 되어야만 했다.
“김주희 너 마력 얼마나 있냐.”
“많이는 없어요. 8%정도.”
“그럼, 정령화는 못 사용하겠네.”
“예.”
“그럼, 운디네만 소환해놓고 피해있어.”
“예?”
“이놈은 무공이 없는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너 저 꼬리 피할 수 있겠...”
-후웅!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처럼 꼬리가 날아왔다.
유세현은 부서진 팔을 억지로 움직여 김주희를 끌어안은 뒤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서, 선배님!”
“크윽. 내말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유세현은 김주희를 밀쳐냈다.
동시에 힘을 개방했다.
[크하하하! 다 찢어 죽여주...]
한참 광소를 내뱉으며 교인들을 압살해 나가고 있던 셀론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 기운은?
-솨아아아!
3개로 나뉜 천마광룡참을 확인한 셀론은 황급히 블링크를 탔다.
거대한 육체가 상공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날개를 펼쳐 곧바로 비행을 이어가기 시작한 셀론이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다 고갈되던 마력이...]
그 순간 유세현의 몸에서 칠흑의 어둠이 흩뿌려져 나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권능.
흑암(黑暗).
연기가 그 거대한 몸에 살짝 닿자.
[그, 그건!]
셀론이 황급히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의 육중한 몸 밑에 그와 비등될만한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무려 8서클.
기상조차 바꿔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는 냉기계열 최상급 마법.
[블리자드(Blizzard)]
-솨솨솨솨!
상상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가 거칠게 몰아쳤다.
새하얗게 뒤덮이는 대지와 꽁꽁 얼어가는 피부.
그리고 그런 피부를 부서트리는 칼바람.
호신강기로는 차마 대응할 수 없는 마법에 교인들의 육신은 빠르게 얼어갔다.
레드 드래곤이 체면 불구하고 유세현의 접근을 막을 목적으로 발현한 마법.
허나.
루베르크에서 흩뿌려져 나온 부패의 힘은 눈보라조차 부식시켜버린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접근한 유세현이 심장부를 향해 천마광룡참을 날렸다.
셀론은 황급히 몸을 틀었다.
그 덕에 심장은 아슬아슬하게 빗겨갔지만, 몸체가 커도 너무 컸다.
-파짓.
날갯죽지하나가 떨어져 나가자 셀론의 몸이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때까지 틈을 엿보고 있던 이강호의 눈이 번뜩 빛났다.
지정좌표 마법.
[지옥의 업화.]
-콰아아앙!
어두우면서도 푸른, 특유의 고유특성이 가득담기 불길이 피어올라 셀론을 감쌌다.
[캬아아악!]
지금까지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괴성이 주위를 울렸다.
‘처치한 건가?’
한순간 그리 생각하던 이강호는 재차 몸을 움직였다. 유세현이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크롸롸롸롸!]
드래곤 피어.
정신을 무너트리는 괴성이 주위를 감쌌다. 귀를 막은 남궁시영의 눈이 한순간 파르르 떨렸다.
이건 괴물들의 대결이었다.
자신들은 어찌해도 방도가 없는.
‘저런 존재가 판도라에 있었다니.’
우물 안 개구리.
지금 딱 그 말이 들어맞는다.
이강호가 혀를 찼다.
‘젠장, 역시 저항력이...거기다가 방어마법까지 사용한 건가.’
레드드래곤은 일반적으로 불을 관장한다. 때문에 놈은 드래곤 중에서도 불에 대한 저항력이 미친 듯이 높았다.
그렇기에 사실 더 깜짝 놀란 것은 셀론이었다.
그 강한 비늘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일부는 완전히 타들어갔다.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나에게 불로 이정도의 데미지를!’
자신을 태울 수 있는 불길은 마족의 화염지옥이나. 천족의 성열화 정도로 세상에 많지 않았다.
나머지 불은 전부 흡수되거나 무력화 된다.
그런데, 분명 그럴 터인데.
재빨리 방어마법을 치덕치덕 바르지 않았더라면, 레드드래곤 최초로 불에 타 죽는 우스운 꼴이 날 뻔했다.
느낌이 점점 싸해진다.
마왕의 권능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 자신을 불태울 정도의 화염을 다루는 인간이라니!
[이 근본도 없는 벌레들이 감히이이!]
-피잉!
-쿠우우웅!
그 어느 때보다도 넓은 범위로 중력마법이 발현된다.
휘말린 유세현의 몸이 한순간 휘청거리더니 지상으로 낙하되기 시작했다.
재빨리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곧바로 마법의 연계가 이어진다.
[파이어 블래스트.]
전후좌우 공중까지 일대를 완전히 휘감아 버리는 화염계열 마법.
[후웁.]
셀론의 가슴이 갑작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마족에게는 어둠의 마력이, 천족에게는 신성력이 있다면, 레드드래곤에게는 이것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재로 되돌리는 힘.
파이어 브레스!
[어디 한 번 이것도 버틸 수 있나 보자아아아!]
-콰아아앙!
입속에서 발사된 상상할 수 없는 열기가 일행을 향해 쏟아졌다.
살아남은 교인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 이건 막아야 된다!”
그들은 재빨리 바람계열의 절기를 날렸다.
[풍백섬결(風伯纖抉)]
[천풍뢰진장(天風雷進掌)]
폭풍같이 강한 바람이 일었으나 그럼에도 불길을 멈출 줄을 몰랐다. 셀론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이걸 막을 수 있는 인간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김주희도 재빨리 물로 방벽을 만들었지만 무용지물.
유세현은 이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기 위해서는 저 입을 닫아버려야 된다.
하지만.
‘너무 진행이 빨라. 치고 올라갈 시간이...’
역시 아무리 용을 써도 엄청난 스텟의 격차는 당해낼 수 없는 것인가.
< 붕괴(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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