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붕괴(1) >
-트득.
혈사진의 중심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동시에 상공으로 집결되던 기가 갈 곳을 잃고 넝실넝실 춤추기 시작했다.
섬세한 컨트롤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시켜주던 술법자들의 다수가 이번 일격으로 인해 죽어버린 탓이었다.
“아, 안돼!”
흙먼지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온 장사월의 눈동자는 당장 터져나갈 듯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공정률 97%.
무공은 정말 창시되기 직전이었다.
이제 한 걸음. 정말로 딱 한걸음만 더 내딛었다면 무공이 완성 되었을 터인데!
‘아니야,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 예비 술법자들은 당장 자리로 향해라! 나머지 술법자들은 어떻게든 버텨내라!!”
고함을 지른 장사월이 유세현을 향해 몸을 날리자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들이 그 뒤를 따랐다.
셀론도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들...”
지그시 읊조리는 셀론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무척 일그러져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적의.
“셀론! 저 두 놈들을 뒤로 보내서는 절대 안 된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리할 것이다.”
셀론은 드래곤답게 오만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답했다.
허나 그 다음 순간.
유세현이 묵묵히 팔을 들어 올렸다.
등골을 타고 느껴지는 섬뜩함.
“마, 막아라! 셀론!”
셀론의 주위에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시전 속도였지만.
“늦었어.”
유세현이 주먹을 쥐자 일순간 대기가 흔들렸다.
입을 악문 장사월의 고개가 뒤를 향해 돌아간다.
1초, 고작 1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상공에 흑운이 분포해 있었다.
그것도 전 범위가 아닌 정확히 혈사진의 테두리에만.
-치직!
-콰과광!
흑뢰가 사정없이 쏟아진다.
어떻게든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던 술법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
-트드드득.
혈사진이 붕괴해 나간다.
“아, 안돼에에에!”
장사월은 반쯤 미친 괴성을 토해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돌아가는 일은 없겠지만.
사실 이는 유세현이 도착한 순간부터 예정되어있던 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천마혈사장으로 혈사진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동료가 휘말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물론 그 결과 장사월이 운 좋게 살아남은 꼴이 되었으나.
“끄아아악! 이새끼가아아아!”
놈이 발광하는 꼴을 보니 썩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쨍그랑!
이윽고 유리가 쪼개지듯 혈사진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존재목적을 잃은 마력과 생명력의 덩어리가 주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대개는 대기 중으로 흩어졌으나 일부는 본래 자리인 살아남은 생존자의 육신을 향했다.
김주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력과 마력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는...싸울 수 있다.
그때 장사월의 고개가 별안간 푹 숙여졌다.
동시에 고래고래 지르던 고함도 뚝 멎었다.
잔잔히 떨리는 어깨.
“크흐흐...크흐흐...크하하하하!”
장사원을 이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부릅뜬 장사월의 눈동자가 유세현의 얼굴을 향한다.
“너 이 새끼...제대로 일을 저질러 주는 구나...그래 이렇게 된 거 네놈들을 죽인 뒤 전부 다시 하겠다. 대원들은 들으라! 처녀계집만 남기고 놈의 동료를 전부 쳐 죽여라! 그리고 반절은 여기남아 나를 보좌해라!”
“충!”
장사월이 외치자 후방에 위치해있던 대원들이 김주희와 빙제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유세현은 곧바로 암흑투기를 내뿜었다.
흑뢰 이후 경악어린 눈빛을 하고 있던 셀론이 눈동자가 더더욱 진동한다.
“이, 이건? 네놈 정말 인간이 맞는...”
허나, 셀론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이강호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감행한 것!
“유세현! 이놈은 내가 맡고 있을게!”
“야! 괜찮겠냐?”
“물론! 대신 빨리 처리하고 와라.”
“...오케이.”
유세현도 장사월과 부하들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아니, 정확히는 공격하는 척만 했다.
지금 최우선시해야 되는 것은 동료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것.
“이놈! 어딜 가려고 하는 게냐!”
그리고 노림수를 읽은 장사월은 부하를 이용한 인해전술과 검법, 무공을 사용하며 틈을 주지 않았다.
양무원과는 제법 차이나는 실력.
그는 술수를 사용해 마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경지가 낮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순수한 무공만으로 장사월을 씹어 먹던 천마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다는 것일까.
‘어쩔 수 없군. 웬만해선 직접 전달하고 싶지만...’
유세현은 재빨리 상공으로 도약해 포켓에서 손에 집히는 무기란 무기는 전부 무기를 꺼냈다.
“김주희!”
“...?!”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김주희의 고개가 치켜 올라간다.
“잘 받아라!”
-쐐애애액!
투창처럼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병장기.
“막아라!”
중간에서 잘라내기 위해 몇몇 대원들이 재빨리 도약했지만, 초고수 빙제의 경신술을 당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빙한백검을 쥔 빙제가 눈을 번뜩였다.
“후...몸 상태가 말은 아니다만...”
“...?!”
검 주위로 새하얀 서리가 맺힌다.
“그래도 네놈들 따위에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파바밧!
무수한 얼음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큭! 피해라!”
그사이 트라이던트를 집은 김주희는 곧바로 운디네를 소환했다.
“운디네!”
“참 빨리도 부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명은 나중에! 그보다 방어에만 치중해줘! 마력이 얼마 없어!”
“으이그, 알았어!”
운디네는 방어, 김주희는 공격.
둘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자 대원들은 물살에 휩쓸린 쥐새끼마냥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크윽...분명 상당히 타격을 입었을 텐데, 뭔 놈의 체력이...”
“방심하지마라. 제대로 상대해라!”
분투하고 있는 김주희를 흘끗 살핀 유세현은 시선을 다시 장사월을 향해 돌렸다.
암흑투기가 적들의 육신을 약화시켜주고 있는 지금, 저 상태만 유지한다면 어찌어찌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장사월. 아니, 드래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러기 위해서는 장사월을 상대할 때도 마력을 아껴둘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으면 강호가 위험하다.’
밸런스를 적절히 맞춰야 한다.
“하아압!”
부하들이 검을 치켜세우고 달려들었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기 위함보다는 장사월에게 틈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상당히 거슬리는군. 이렇게 되면...’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딱 적이 죽을 정도로만 위력을 조절해 마력의 과소비 없이 스킬을 사용한다.
물론, 무공을 얻은지 얼마 안돼 얼마나 잘 조종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확신이 안서는 일이었지만.
마력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은 그의 걱정을 우습게 만들 정도였다.
-스스스.
유세현의 주위가 아주 미약하게 진동했다.
그 이상의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일하게 눈치 챈 것은 이 절기를 직접 본적 있던 장사월 뿐.
“모, 모두 뒤로 물러나라!”
허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천마대멸겁(天魔大滅劫)]
유세현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진다.
-트득!
-트드득!
기괴하게 꺾기기 시작하는 대원들의 몸.
이것에는 호신강기도 그 어떠한 방어 마법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고위 마법인 프로텍트 쉴드 정도만이 아주 잠시 버텼을 뿐이다.
“마, 마존이시어...”
-콰직!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고기조각으로 바뀐 대원들의 육신과 피가 주위를 붉게 물들였다.
정말 찰나의 순간.
채 1초도 안되어 발생한 일.
“네노오오옴!”
한순간에 대다수의 부하를 잃은 장사월이 치를 떨었지만 알 바 아니었던 유세현은 계속 몰아쳤다.
장사월에게 더 이상 들일 시간 따위는 없다.
-슈욱!
유세현의 검이 장사월의 관자놀이를 향했다. 벽으로 몰아 붙였기에 완벽한 외통수였지만.
-샤샤샥.
그 순간 장사월의 육신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건?
“놈! 네놈만 그런 요상한 스킬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쳇.”
유세현은 혀를 찼다.
시간이 좀 더 걸리게 생겼다.
* * *
‘대체 이 인간은 뭐지?’
셀론은 이강호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신계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간.
그것만으로도 놈은 정말 신기한 개체였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 놈은 더 나아가 현재 자신이 날리는 마법을 모조리 회피하고 있었다.
스치면 바로 죽는 위력임에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마치 어디서 어떻게 날아올지 알고 있다는 듯이.
“네놈...이 스킬을 어디선가 본적 있는 거냐?”
“...큭.”
너무나도 직설적인 질문에 이강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놈들은 돌려 말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하지.
“뭐가 웃긴 거지? 웃긴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만.”
“......”
문답무용.
-슈우욱!
이강호의 휘황찬란한 창술이 셀론을 향해 쏟아졌다.
찌르기로 시작 되어 좌우상단 베기 그리고 발차기까지.
과거 알테리아 대륙에서 유희라고 하여 인간세계로 숨어들어, 인간의 육체를 적절히 사용해본 드래곤들은 사람의 육신을 제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즉, 무술의 달인처럼 행동이 가능한 것이다.
허나, 이 드래곤은 헤츨링 급.
사람의 몸을 다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놈은 무공을 배웠음에도 계속해서 블링크로 공격을 피해나갔다.
그리고 마법을 이용한 반격.
5서클의 마법 파이어 블래스트를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이강호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아까부터 묘한 위화감이 목 끝을 계속 간지럽힌다.
‘뭐지? 대체 왜 더 상위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거지?’
드래곤은 오만한 종족.
타 종족을 벌레처럼 여기는 만큼, 맘에 안 드는 이는 압살한다.
허나, 놈은 5서클정도의 마법까지밖에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기회.
폴리모프는 아바타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인간형태의 놈의 목을 베면, 드래곤의 목을 벤 것과 같은 이치인 것.
-치직.
이강호의 창이 셀론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볼을 타고 흐르는 붉은 핏방울.
엄지로 쓱 훑은 셀론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동그랗게 커졌다.
이강호는 아차 싶었다.
저 표정은!
“벌레 따위가 감히 나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콰과광!
이강호의 주위로 연쇄 폭발이 이어졌다.
6서클 마법.
[익스플로젼(explosion).]
-트드득!
후폭풍으로 땅이 울리고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죽어라! 벌레!”
한 번 시작한 셀론은 무차별적으로 마법을 난사했다. 이강호는 피하는데 온힘을 다해야 했다.
경공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이미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
‘빌어먹을 드래곤이...’
이강호의 화염이 넘실거렸다. 위험한 상황이긴 하지만, 저렇게만 멈춰만 있어준다면 죽일 수 있다.
단 일격에, 변신할 새도 없이!
그때였다.
“셀론! 이곳을 무너트려라!”
장사월이 셀론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정신을 가다듬은 셀론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천마의 제자는?”
“처음 받은 타격이 너무 커서 이길 수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고도 말인가?”
“...그렇다. 그러니깐 생매장 시켜버려라!”
“어렵진 않지. 하지만 재료가 되는 처녀계집은 회수한 건가?”
“다시 구하면 된다! 꽤 어렵겠지만 세가의 여식들을 잘 뒤지면 못 구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빨리! 놈이 오고...”
그 순간 어둠이 셀론을 덮쳤다. 그가 재빨리 방어마법을 펼쳤지만.
-트드득.
부서진다.
아니, 정확히는 부패되어나간다.
황급히 블링크를 탄 셀론이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장사월. 저 힘...저 힘도 천마의 무공이란 건가?”
“그럴리가! 저딴건 무공이 아니다!”
< 붕괴(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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