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72화 (172/612)

< 노오오오력(1) >

‘저건!’

화들짝 커지는 눈동자!

“김주희!”

남궁시영이 떡하니 있었기에 유세현은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허나, 김주희가 이를 눈치 채지 못 할리가 만무.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순간적으로 개방된 남성의 마력은 다시 잘 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재빨리 질주해 나간 김주희가 남성을 스쳐지나가며 얼굴을 살폈다.

길게 늘어진 흰 수염과 백발.

빙공을 구사한 남성은 양의궁제와 비슷한 나이대처럼 보이는 노인이었다.

단 차이가 있다면, 대개 황색의 피부를 지니고 있는 무림인들과 달리 백인처럼 피부가 새하얗다는 것.

꽤나 눈에 띄는 특색이었으므로 김주희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그대로 인파속에 숨어들어, 약간 떨어진 곳에서 노인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결판이 난 양의궁제가 검을 거두며 혀를 찼다.

“대단한 놈이로구나. 진짜 이 절기를 막아내다니. 대체 무슨 방도를 쓴 것이냐?”

“방금 직접 보셨습니다만.”

“예끼 이놈! 이 절기를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게냐! 고수 중에서도 손가락을 꼽는다! 거기다가 다른 절기도 아니고 같은 양공이라면 더더욱!”

양의궁제가 한 호흡 쉬고 말을 이었다.

“뭐, 되었다. 어떤 수를 썼던 막아낸 건 막아낸 거지. 그래 인정 하마. 네놈은 그 누구보다도 내 태양신공을 전수받을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럼 전수는 언제부터...”

“내일 내가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오거라.”

“알겠습니다.”

이강호가 처음과 달리 예를 갖춰 인사하자, 양의궁제는 그리 싫지 않았는지 인상을 풀고는 몸을 획 돌렸다.

문득 백발의 노인을 확인한 양의궁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자네는?”

“끌끌끌, 오랜만일세 양의궁제. 후계자 선정 한 번 아주 화려하게 해대더군.”

“허허! 빙제(氷帝)아닌가! 독선왕, 개무신좌와 함께 가버린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던 겐가!”

“흐흐, 놈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황천길을 관광하고 오긴 했지. 하지만 보다시피 아직까지는 살아있다네. 그보다 자네야말로 세상 하직한 줄 알았네만.”

북해빙궁의 궁주.

빙제(氷帝), 설광현.

북해빙궁은 남해태양궁과 더불어 음양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무림에서 이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끌끌끌! 뭐 살아있기만 했으면 되었지. 그보다 양의궁제.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떤가? 한잔하러 가는 게?”

“에이~여기 술은 비싸기만 하고 드럽게 맛없는데! 홍화주가 그립네 그리워.”

“끌끌, 별 수 있나 상황이 이런 것을. 술이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해야지.”

“크크, 그도 그렇지. 그럼 가지. 한잔 하면서 회포나 푸세나.”

그렇게 공터를 반쯤 폐허로 만든 양의궁제는 빙제와 함께 인파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제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일행과 되돌아온 관객 몇몇 뿐.

유세현을 발견한 이강호가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다가왔다. 유세현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고생했다. 짜샤.”

“그래, 고맙다. 그런데 너희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냐? 여기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네가 소문을 아주 파다하게 흘려놓은 덕 분이지 뭐.”

잠시 사소한 잡담이 이어진다.

남궁시영은 그 시간 동안 멍한 얼굴이 되어 이강호를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무림에 출사표를 던지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양의궁제의 후계자가 되다니.

자식 및 인재가 없다는 등 아무리 환경적인 요인이 더해졌다지만, 그래도 이것은 보통 놀랄 일이 아니었다.

“대, 대단하시네요.”

마침내 남궁시영이 입을 뗐다. 이강호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단하다.]

이 말은 사실, 그가 남궁시영을 처음 만났을 때 내뱉은 말이었다. 그 당시 자신은 고유특성을 개화하지 못했고, 잡스러운 스킬밖에 없었다.

구르고 구르고 또 굴러서 도달한 경지.

이어가는 대화를 들으며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낀 유세현이 툭 말했다.

“야, 강호야. 나랑 아퀼라는 다른 볼일이 있어서 먼저 좀 가볼게.”

“예? 어디가시는 데요? 아직 길을 잘 모르실 테니 제가 동행...”

“아뇨, 괜찮습니다. 거의 다 외웠어요. 강호랑 같이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유세현은 빠져나가며 이강호를 향해 한쪽 눈을 깜빡였다. 이강호는 허탈한 실소를 내뱉었다.

신경 써줄 필요 없다고 미리 말했건만.

인파속으로 들어간 유세현은 곧바로 김주희가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마력을 탐지했다.

심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처럼 개성을 지닌 건 아니었지만, 지니고 있는 마력량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유세현은 어느 한 객점에서 김주희와 재회할 수 있었다.

물론,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미모 때문인지 무사를 포함한 남성 대다수의 시선이 김주희에게 우르르 쏠려 있었다.

김주희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애쓰고 있지만, 좀처럼 나아지는 일이 없다.

유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튜토리얼 초반 김주희에게 찝쩍대던,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패거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다가가 어깨를 툭 치자, 김주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그것만 먹고 나가자. 있어봤자 주목만 더 끌 거 같다.”

“예...”

김주희는 지금 이 순간 후회했다. 차라리 아퀼라처럼 로브라도 쓰고 올 걸.

현대에 있을 적에는 그렇게 자상스럽던 외모였지만, 부작용을 겪은 지금은 그렇게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 * *

유세현은 그날 하루 미행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력의 특성은 감춰졌지만, 그렇다고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고마워요 선배...”

“신경 쓸 것 없어. 네가 무공을 익히는 건 우리에게도 중요한 일이니까.”

그들의 작전은 간단했다.

미행을 한 뒤 거처를 알아내어. 빙제가 집을 비웠을 때 거처를 턴다. 그리고 만들어놓은 비급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허나,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비급은 없었다.

“다른 곳에 숨겨 둔걸까요 선배?”

“글쎄...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이에 확답을 내놓은 것은 이강호였다.

“아마 저술되어 있는 비급은 없을 거야.”

“뭐?”

비급이란 본디 누군가에게 전수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 전수받는 이는 직속 혈족이었다.

그런데 알아본 바로는 빙제 또한 양의궁제처럼 남아있는 자식이 없었다.

즉, 이 뜻은.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 아예 만들지를 않았다는 거야?”

“그렇지. 아니면 있었어도 폐기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이는 이강호가 양의궁제를 도발한 진정한 이유였다.

비법서가 없어서 다시 만들게 해야 되었으니까!

“흠.,..그러면 김주희가 빙공을 얻기 위해서는...”

“맞아. 빙제의 마음을 얻어야 돼.”

이강호는 이 건에 대해서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무림인들은 개개인마다 판단의 기준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

잠시 고심하던 유세현이 의견을 내놨다.

“아퀼라가 유혹해보는 건 어떨까?”

“흠...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해. 사실 내가 쓰던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면 부탁해볼 생각이었거든.”

“음...그렇다는데 아퀼라?”

“저는 좋습니다.”

서큐버스라는 종족이 애초부터 성(性)을 탐닉하는 종족이니 만큼, 아퀼라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들은 곧바로 계획 이행에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기척을 내면 알아챌 거야. 그러니까 조심해라.”

“예, 알겠습니다.”

기척을 죽이는 것은 서큐버스의 특기.

결계를 발동한 뒤, 투영화 스킬을 사용하여 건물을 통과한 아퀼라는 최대한 조심조심 빙제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빙제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아서라. 팔목 날아간다.”

빙제가 눈을 번쩍 떴다. 허공에 두둥실 떠있던 덕에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터인데, 실로 대단한 감각이었다.

“나를 암살하러 온...”

말을 채 끝내기 전 아퀼라가 마저 팔을 뻗었다.

-슈욱.

-서걱.

빙제의 검이 단번에 팔을 반으로 가른다. 허나, 아퀼라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나머지 손을 뻗었다.

마왕이 친히 명해준 임무를 반드시 해내기 위해서.

“이건, 색공! 안타깝지만 나한테는 소용이...”

환희공과 특수능력이 조합된 비술.

결국 빙제는 수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스르륵.

아퀼라가 떨어져나간 한쪽 팔을 움켜잡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유세현은 상당한 마력을 소비한 아퀼라에게 어둠의 불어넣어 주었다.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팔과 되찾아가는 안색.

“어떻게 됐어?”

유세현이 물음에 아퀼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제가 들여다본 바로는...”

서큐버스는 내부로 파고들면 대상자의 취향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헌데, 이 남자는 아무런 취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성욕이라는 것이 자체가 없다.

“뭐? 성욕이 아예 없어?”

“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물리적으로 거세가 된 것 같습니다.”

즉, 이 말은 그 어떤 미인, 서큐버스도 노인을 유혹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설마 노인이 고자였다니!

이강호 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되는 것인가.

아퀼라의 말이 이어졌다.

“군주시어. 유혹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발견한 것은 하나 있습니다.”

“뭐?”

“어떤 여성입니다. 제가 그 여성의 모습을 하자. 노인은 한동안 아련한 얼굴로 계속 저를 응시했습니다.”

“흠...”

아주 짧은 설명이었지만, 아퀼라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일행에게 분명히 정해졌다. 그것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그리움이라는 것이다.

안타까운건 그 감정이 현 일행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다는 것.

“그것이 조금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뭐?”

“군주시어. 제가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머릿속으로 잠시 들어오겠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뭐 길래.

고개를 끄덕이자 한 여성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처럼 새하얀 무복.

무복에는 붉은실을 이용해 만든 눈 결정체 모양의 자수가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여성의 얼굴을 살핀 유세현의 동공이 파르르 지진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녀의 얼굴은.

‘뭐야? 김주희랑 많이 닮았잖아?’

미묘한 차이점은 있었지만 이정도면 거의 도플갱어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닮은 것은 한국인답지 않은, 우윳빛처럼 흰 피부였다.

유세현이 김주희의 어깨를 털썩 잡았다.

“...선배님?”

“김주희, 내가 방금 본 게 있는데...”

유세현이 연설이 시작되었다.

* * *

조사한 바에 따르자면 북해빙궁의 가주, 설광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하나뿐인 손녀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설윤.

설광현은 설윤을 자식보다도 이뻐했고, 설윤은 설광현을 아버지보다도 더 잘 따랐다.

빙제의 손녀에 대한 애정은 너무도 유명했던 지라 무림에서 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갈라놓은 것은 이 세계였다.

빙제는 이동되었고, 설윤은 이동되지 않은 것.

빙제가 갑자기 이동 되었던 만큼, 설윤도 언제 넘어올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김주희는 환심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연기하면 김주희!

김주희하면 연기!

“제가 아주 그냥 가지고 놀아버릴...아니, 어떻게든 휘어잡아서 무공을 얻어내겠습니다. 선배님.”

“...어, 그래. 수고해라.”

잔뜩 기합이 들어가, 흡사 범처럼 눈빛이 변한 김주희의 말에 유세현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딱 일주일.

김주희는 그 안에 마음을 휘어잡고 끝낼 샘이었다.

청순연기라면 무척 자신이 있었으므로.

허나, 그 생각은 무척 안일한 것이었음을 그녀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에이! 또 온 게냐? 아, 글쎄 나는 전수해 줄 마음이 없다니까! 떼끼!”

“아잉~어르신. 그러지 마시고요. 비무 어떤가요. 비무! 아니면 대결이라도!”

“에잉, 삭신도 쑤시는 마당에 그런 걸 뭣하러 하누.”

빙제는 접근한 김주희를 아주 매몰차게 대했다.

또한 빙공을 익혀서 그런지 몰라도, 꽤나 냉정하여 양의궁제와 달리 도발에 전혀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청순연기는 이미 모래성마냥 무너진지 오래였고, 이제 남은 것은 오기뿐이었다.

“아, 그럼 어르신! 저랑도 같이 한잔하시죠!”

“어허! 이건 네가 마실 만 한 그런 술이 아니다. 돌아가서 잠이나 자거라.”

지금 시각은 태양의 위치로 보건대 대략 오후 12시쯤이었다.

‘후우...이렇게 보면 분명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왜 자꾸 밀어 내는지 모른다. 이별한 손녀와 비슷하면 정감이 가야 정상이지 않는가.

아니, 어쩌면 반대인가?

‘그렇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어.’

정령화는 무척 좋은 스킬이다.

시너지, 효율.

또한 이강호나 유세현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도 그녀는 이 무공이 꼭 필요했다.

-꿀꺽 꿀꺽.

김주희는 술 한 병을 통째로 들이 부었다. 스텟 때문인지 몰라도, 빙제의 말과 달리 약간 쓰기만 할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어르신!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꼭 그 무공이 꼭 필요해요.”

“일 없다 아가야. 돌아가거라.”

빙제는 마지막까지도 완고했다.

결국 그녀는 일단 집념을 접고 일반적인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말을 들어보고 있자면 빙제는 강하지만 무척 외로운 사람이었다.

“내일 또 올게요. 어르신.”

“누누이 말하지만 안와도 된단다.”

“에이, 말동무도 없으시면서! 오고가는 건 제 맘이죠~”

“허허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거라.”

빙제는 그래도 작별 인사만큼은 제대로 받아주었다.

< 노오오오력(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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