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오오오력(2) >
양의궁제가 이강호에게 줄 비급을 저술하는 동안 김주희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설광현을 찾아갔다.
가서 말동무도 해주고, 이전 살던 세계의 이야기까지 간간히 나눴다.
허나, 그 무엇을 해도 설광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최후의 비책으로는 동정심까지 유도해 보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림인들이 무공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또한 김주희가 설윤과 얼굴이 아무리 비슷할지언정 같은 인간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설광현이 동요한 순간은 처음 접근을 시도 했을 때 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는 항상 일관된 표정을 하며 밀쳐내기만 할뿐.
‘그래도 어떻게든 얻어내야 되는데...’
-끼익
객점 내부로 들어선 김주희는 이제 거의 반자동적으로 설광현의 앉아있는 테이블 맞은편에 찾아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어허! 할아버지라니! 무례하구나!”
“에이, 연세도 있으신데 할아버지가 맞으시죠. 아! 스승님이라는 어감 좋은 단어가 있긴 한데 어떠신가요? 저의 스승님이 되셔서...”
“떼끼!”
“에이~농담이에요 농담.”
같은 권유를 밑도 끝도 없이 반복한다면 듣는 이에게 짜증만 불러온다.
그래서 김주희는 시의 구성법 중에 하나인 수미상관의 짜임새를 두었다.
처음하고 끝에만 한 번씩만 권유하고, 나머지는 그냥 일반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할아버지. 근데 할아버지는 왜 이곳에서 혼자 술을 마시시는 거예요?”
“술이 좋으니까 그렇지!”
“취하지도 않으시잖아요?”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게 아니다. 맛있어서 마시는 거지!”
“으흠...그런가요? 저랑은 마시는 이유가 조금 다르네요. 저는 그 알딸딸함이 좋아서...”
자연스레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렇게 수 시간.
김주희는 어느새 이 세계로 이동 되었을 때의 당시에 대해 세밀히 설명하고 있었다.
“고블린이 달려들 때는...어우~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끌끌, 약한 몬스터가 아니더냐.”
“에이~! 그건 할아버지한테나 그렇죠. 저한테는 아니었어요.”
“...하긴, 그도 그렇겠구나. 그런데 놀러 갔을 때 넘어왔다고?”
“예.”
“그럼, 가족은 이동하지 않았을 수도 있구나.”
“그렇죠.”
김주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광현의 표정이 일순간 씁쓸하게 변했다.
이윽고 내뱉는 한 마디.
“부모님이 아직 서울이라는 곳에 있다면 네 걱정을 많이 하고 있겠구나.”
그 말에 김주희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었다.
틈만 나면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와 이를 못 이겨 마지막에는 결국 자신을 버려두고 도망친 어머니.
그들이 자신의 걱정을 하고 있다라...
“아닐걸요?”
“...가족인데 그럴 리가 없잖느냐.”
“에이, 가족도 가족 나름이죠. 아버지라는 작자는 틈만 나면 때리질...”
김주희의 말이 뚝 끊겼다.
너무 몰입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실언을 내뱉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
이 주제는 그간 거론했던 그 어떠한 것보다도 설광현의 동정심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반대로 빙공을 얻고 싶어 가족을 팔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 수도 있는 양날의 도끼였다.
“아버지가 뭘 어쨌다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 잔 따라 드릴게요 할아버지.”
김주희는 재빨리 설광현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살짝 불편한 얼굴.
말뜻을 눈치 챈 것이 분명했다.
김주희는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의 가족은요?”
“끌끌, 이미 알아보고 접근한 게 아니더냐?”
이미 한번 겪어 봤다는 어조였다.
그 순간 김주희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이걸 지금까지 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나 말고도 빙공을 노리고 접근했던 사람이 있었구나!’
가족을 다 잃었다는 것을 알면, 한번쯤은 시도해 볼만 한 일이었다.
특히나 빙제의 자식 설윤처럼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라면 더더욱.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하죠~예쁜 손녀가 있다고 까지만 들었어요. 자세히는 몰라요.”
“끌끌. 그렇느냐. 맞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손녀였지.”
“후후, 저처럼요?”
김주희가 손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설광현이 배꼽이 빠져라 웃음을 터트렸다.
“끌끌끌끌끌! 그래 맞다. 너처럼 예뻤지! 물론 너처럼 방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에이~방자라뇨! 이건 자신감이죠. 자.신.감!”
김주희가 마무리로 쭉 내민 가슴을 툭툭 쳤다.
그러자 설광현은 정말 죽어나갈듯이 낄낄 되며 폭소를 내뱉었다.
“아~무안하게 뭐 그렇게 웃어요 할아버지. 주위사람들 시선 다 쏠리잖아요.”
“깔깔깔깔. 어차피 매일같이 너를 쳐다보고 있는 놈들인데 뭐 어때서 그러냐? 저들의 절반 이상이 네가 찾아온 이후로 이 객점에 단골이 된 거 아느냐?”
덕분에 설광현은 본의 아니게 주인장에게 서비스를 받았다고 한다. 김주희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 그럼 답례로 무공하사해 주세요. 공짜는 몸에 좋지 않아요.”
“깔깔깔! 이놈이 안 되니까 나를 웃겨 죽이려고 하는 구나! 어림도 없다 이놈!”
“에잉~”
어차피 알고한 행동이었기에 김주희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가는게냐?”
“예.”
“항상 비슷한 시간대에 가는구나.”
“아, 할일이 있거든요. 할아버지께서 어울려주시면 되는데 안 해주시니...”
“뭘 말이냐?”
“대련이요. 아직 제 실력이 썩 그렇게 좋진 않아서요.”
처음 보이는 설광현의 관심.
김주희의 눈이 번뜩 빛났다.
“혹시 같이 가보실래요? 그냥 보기만하세요. 이전처럼 떼 안 쓸 테니까.”
사람은 같이하다보면 결국에는 정이 든다. 그리고 이는 지금 김주희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 단계, 한 단계.
조금씩 밟아가며 더더욱 친해져야 한다.
“일없다.”
순간적으로 술잔을 들어 올린 설광현이 술을 목뒤로 털어 넘겼다. 허나, 김주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망설이는 모습을.
“에이~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죠. 여기서 술만 주구장장 마시고 있는 것도 심심하시잖아요?”
“......”
“에이~진짜 아무요구도 안 할 거라니까요! 할아버지 심심해 보이셔서 그런 거예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김주희는 정말 순진무구해 보였다.
아마 유세현이 있었더라면 마음속으로 박수를 쳐주었겠지.
허나, 그럼에도 설광현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김주희는 아예 쐐기를 박기로 마음먹었다.
“에이~알았어요 할아버지! 제가 뭐 해달라고 하나라도 요구하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게요! 됐죠? 이젠 믿으실 수 있겠죠?”
“...큼큼.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설광현이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주희는 무척 아쉬웠으나 그를 움직였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래, 같이 가는 게 어디야.’
허나,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흔히 고수라는 독불장군들은 타인의 눈치를 보는 현대인들과 달리, 웬만큼 마음을 주지 않는 한 권유를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에이...갔네.”
“내일 또 오겠지~”
두 사람이 객점을 빠져나가자, 남성들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 * *
“큼큼. 제법거리가 있구나. 얘야.”
“그렇죠. 사실 할아버지 머무시는 근처로 여관을 옮기고 싶었는데, 그쪽이 그나마 더 번화가라서요.”
“예끼! 되었다! 오지 말라니까!”
“에이~그렇게 너무 대놓고 거부하시면 마음에 상처 입는데~”
“에잉~고얀 지고 네가 이런 말에 잘도 상처 입겠구나.”
“히히, 눈치 채셨어요?”
무림인들이 거주하는 최후의 도시답게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물론, 그래봤자 아르카드 제국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영지 두개 정도에 불과했지만.
한동안 말없이 걸어가던 도중 계속 신경 쓰였는지 설광현이 물어왔다.
“그런데 너희 가족 말이다.”
“예.”
“네게 잘 대해 주지 않았던 게냐?”
“...세상은 넓으니까요.”
지금까지 직설적인 어필을 한 김주희치고는 꽤나 간접적인 언사였다.
설광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느새 두 사람의 눈에는 일행이 머물고 있는 숙소가 눈앞에 비치고 있었다.
* * *
“호오...”
김주희와 유세현의 대결. 아니, 수련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설광현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자신의 노기에도 물러서지 않을 정도이니 만큼, 제법 실력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차마 이정도일 줄은 그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챙! 챙!
창과 검이 교차하며 바람이 일렁인다.
설광현은 김주희보다도 유세현 쪽을 좀 더 주목 하고 있었다.
“저 사내는 검술을 익히지 않는 것 같구나.”
“맞습니다. 빙제님.”
옆에 서 있던 남궁시영이 공손히 답하자 턱수염을 쓸어내린 설광현이 피식 웃었다.
“검술에 꽤나 자질이 있어 보이는 구나.”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후. 그렇다면 혹시 소가주는 저자를 노리고 있는 게냐?”
“...예?”
“세가의 사정을 아는데 숨길 필요는 없다. 이번 정사대전으로 당가는 이미 멸문에까지 이르지 않았더냐.”
“......”
확실히 가주 남궁제는 잘해보라고 남궁시영을 일행에게 붙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지금 되려 마음이 더 가는 쪽은 유세현보다도 이강호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모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둘은 매일 이렇게 대련을 하는 게냐?”
“예, 하지만 가끔은 다른 분도 껴서 삼파전을 하기도 합니다.”
“호오...저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 자가 또 있다고?”
“예, 아 저기 딱 오는군요.”
이강호를 본 빙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놈은?”
“예...이제는 태양신공의 후계자죠.”
“끌끌끌. 그래서 나중에는 나를 그렇게 도발했던 건가.”
빙제는 양의궁제와 술을 나누면서 대결을 벌이게 된 경위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접근한 것도.
자존심을 살살 긁은 턱에 홧김에 대결을 수락하게 된 것도.
대결이 끝나자 김주희가 빙제의 곁으로 쫄래쫄래 뛰어왔다.
“할아버지 제 실력 어땠어요?”
“쯧쯧. 형편없구나.”
“에이! 형편없다뇨! 그렇게 말하시면 상처 입는다니까요. 좋게 말씀해주셔야죠 좋게.”
“예끼! 아닌 건 아닌 게다!”
“...으으.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셨으니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겠어요?”
“되었다. 지금까지 술 퍼마시고 왔는데 무슨 식사냐.”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술과 밥은 다른 법이에요. 자자, 들어가시죠.”
양팔에 찰싹 달라붙은 김주희가 그를 객점내부로 유도했다. 유세현은 어떨 결에 딸려 들어가는 빙제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지만.
보통의 사람은 할 수 없는 대단한 집념, 좋게 말하자면 부단한 노력이었다.
일행은 한 테이블을 두고 크게 둘러앉았다.
본래라면 아퀼라도 참석했겠지만, 행여나 얼굴을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함께할 수 없었다.
“주희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어르신.”
“어떻게 말이냐? 무공하나 내어주지 않는 치졸하고 고집센 노친네로 말이냐?”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사실 일전에 김주희가 실제로 투덜거리며 한 내용이었다. 그 당시 그녀는 분명히 이리 말했었다.
[어우~그 영감님 고집이 장난 아니라니까요? 무공이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전수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리고 저 사실 손녀 안 닮은 거 아니에요? 왜, 더 냉대하게 대하는지 모르겠어요. 야! 아퀼라!]
그 후 김주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퀼라에게 따지러 달려간 것이 떠오른다.
뜨끔 찔린 김주희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제가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아요?”
“끌끌,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빙제는 무척 강했다.
과연 딱딱한 이 노인을 상대로 김주희가 빙공을 얻을 수 있을 런지.
유세현은 확신할 수 없었다.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간 머물며 입수해놓은 무공서적이 꽤 된다. 그중에서는 사천당가의 무공도 있었다.
‘설마 그 남색가가 후계자였다니...’
정신 못 차리고 한 번 더 접근하기에 신명나게 두드려 패고, 익히고 있던 서적을 몰래 회수했는데 그게 비전독공이었던 것.
본래는 독을 주로 사용하는 레피아에게 넘길 생각이었으나, 만약 빙공을 얻지 못한다면 김주희에게 줄 의향이었다.
물과 독, 자체적으로 파괴력이 강해지는 빙공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상성이 나쁘진 않을 것이었기에.
그렇게 간소하게 차려진 식사가 다 끝날 때쯤이었다.
-짤랑 짤랑.
익숙한 얼굴을 한 사내 한 명이 객점내부로 들어왔다.
먹잇감을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와 왼쪽 뺨에 일자로 그어져있는 흉터.
남궁표가 일행이 있는 장소를 향해 반갑게 다가왔다.
< 노오오오력(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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