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프강 가(家)의 저택(1) >
“방패병들은 앞으로!”
-타다닥.
순간적으로 행해진 기습이었지만 잘 훈련받은 병사들의 대처는 무척 빨랐다.
방패병이 바리게이트를 쌓고 뒤에서 창병이 적을 향해 무기를 내지른다.
전투술의 기본으로도 알려져, 흔히 쓰이는 전법.
지금까지는 그들이 이런 식으로 버티는데 성공하면, 기사들이 직접 나서 마무리하는 역할을 했다.
문제는 현재 몰아친 적들의 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는 것.
평균적으로 40마리 정도씩 뭉쳐있던 키메라들은 당장 몰아치는 데만 해도 그 수가 400마리를 훨씬 웃돌았다.
“크윽! 이게 무슨!”
필립의 눈가에 당황감이 깃든다.
“돌개바람!”
“바람의 춤 시위!”
카트린을 포함한 3명의 최상급 기사들과, 일반 기사들은 병사들을 위해 황급히 광역기술을 퍼부으며 대응했지만 그럼에도 물량이 어찌나 계속 쏟아지는지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푹.
“끄아아악.”
그 사이 병사들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사지가 잘려나가고 신체가 꿰뚫린다.
거기에 한 번 더 되살린 키메라, 퓰론까지 가세하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필립 공자님!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됩니다! 저희들이 길을 뚫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이쪽으로!”
“큭, 하지만 아직 남은 병사들이...”
“이런 와중에도 무슨 소리를! 병사들은 글렀어 형! 몬스터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큭!”
챙!
발렌이 발을 향해 날아오는 예리한 송곳을 검등으로 힘겹게 방어했다. 필립은 입을 악물었다.
미개척 지역도 아닌, 고작 이런 길목에서 전력을 잃어야 하다니.
“알겠다! 카트린 경! 지금부터 이곳을 돌파 하도록...”
그들이 막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치지직.
-콰과광!
검은 낙뢰가 키메라가 즐비해 있던 외곽 쪽에 휘몰아쳤다.
-키에에엑!
키메라들은 그 강한 뇌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새까만 재가 되어 사스라졌다.
필립을 포함한 기사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 이건? 고위 마법?”
-키이익!
뇌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키메라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숲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목숨이 떨어져나갈 위기에 쳐해 있었던 병사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크, 크윽...사, 산건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음색.
이에 필립을 포함한 기사들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병사들에게 별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토록 범위를 세밀히 제어했다는 것은, 바로 근처에 마법사가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
그리고 마침내 그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발렌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 * *
“도와줘서 고맙네. 덕분에 많은 병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어.”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필립과 합류한 유세현, 그들은 혹시 모를 2차 습격에 대비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무수히 많은 병사가 뒤따랐다.
부서진 갑주와 찢겨져 나간 방패.
거지꼴이 된 그들은 정말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닐세. 자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이번일로 발생한 사망자는 10명.
병사의 랭크가 몬스터보다 낮은 것을 감안하자면 결코 큰 피해는 아니었다. 아니, 되려 이정도면 감지덕지다.
그리고 병사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유세현이 미리 내려놨던 명령 때문이었다.
[팔, 복부, 다리만 공격해라.]
구울화 된 키메라는 처음 그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유세현이 공격할 신체 부위를 직접 지목해 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수도로는 왜 가고 있는 건가?”
유세현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가고 있었습니다.”
“호오...혹시 동료인가?”
“예.”
“후후. 하긴, 자네 같은 자가 동료가 없을 리가 없지. 여행자라고 했었지? 혹 지금 속해있는 길드가 있나? 길드명을 알려준다면 내 이건에 대해서는 추후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네.”
“아뇨, 괜찮습니다.”
유세현은 호의를 거절했다.
현재 유세현에게는 필립의 성품을 근거로 하여 급조해 만든 3류 시나리오 같은 계획이 있었다.
위기를 일부러 만든 뒤, 필립을 구해주고 보상을 받는다는 그런 계획.
허나, 그 보상이 결코 물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동생의 생사여부였으니까.
“하하. 보상은 정말 괜찮습니다. 한 것도 정말 없고, 마석이 없는 편도 아닌지라...”
“흠, 하지만 그래서는 내 마음이 별로 편치 않은데...”
필립이 말한 순간 유세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필립, 그는 정말로 괜찮은 인물이다.
이제는 인정한다.
“정 그러시다면 공자님의 저택에서 근사한 식사 한 끼를 대접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식사 말인가?”
“예. 저는 사실 꽤나 미식가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런지라 최근에는 맛있는 요리를 별로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유세현이 지긋이 답하자 카트린이 눈을 번뜩였다. 그가 막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찰나였다.
“하하. 음식점의 음식은 입에 잘 안 맞나 보군! 알겠네. 그렇다면 정말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도록 하지.”
“공자님!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암살자일...”
필립이 재빨리 손을 들어 카트린을 제지했다. 굳이 안 좋은 이야기를 꺼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카트린 경 이분이 없었더라면 우리 병사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 하지만...그것과 이것은...”
“그리고 만약 그가 암살자였다면 벼락을 몬스터가 아닌 제 머리위로 쏘았겠지요.”
“......”
이미 직접 겪은 상황인지라 카트린은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필립이 유세현을 향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괜한 말을 듣게 해 미안하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렇다. 정말로 괜찮았다. 동생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모함이나 역경도 견뎌낼 수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앞으로 커다란 성벽이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 * *
“이 손수건을 가지고 내일 정오에 찾아오게. 그렇다면 통과시켜 줄 것이네.”
“예, 알겠습니다.”
볼프강 가(家)의 영지, 펠페모아에 도착한 유세현은 필립과 간단히 작별인사를 했다. 그 와중에도 발렌은 그에게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제법 찔리는 게 많은 모양.
여관을 잡은 유세현과 김주희는 곧장 볼프강 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내일까지 무작정 기다릴 필요 없이 아퀼라의 스킬을 이용해 동생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만약 위치를 미리 찾아 놓는다면 조우할 수도 있으리라.
경비는 암살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꼈던 것이지만 무척이나 엄중했다.
인원이 없는 곳을 찾기 위해 마력을 살핀 유세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경계로 마력의 흐름이 뭔가가 이상하다.
유세현은 혹시 몰라 아퀼라에게 물었다. 마법에 상당히 능통한 그녀는 담장을 쓰윽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곧장 답을 내놓았다.
“알람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알람 마법?”
“예, 적이 외부에서 침입할시 경종이 울리게 됩니다.”
“흠...뚫을 수 있어? 내부를 살펴볼 생각이다. 물론, 시전자에게 들켜서는 안돼.”
“명만 하신다면...”
아퀼라가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유세현은 곧바로 시행하도록 했다.
결계를 사용한 아퀼라가 벽을 쓰윽 통과했다.
특성을 이용한, 생각보다도 훨씬 간단한 돌파였다. 현재 주인 되는 김주희가 난감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선배님, 아퀼라는 여전히 선배님의 말을 더 잘 듣네요. 저거 아무리 말해도 고쳐지지가 않아요.”
“......”
이러한 말을 꺼낸 것은 단순한 질투 때문이 아니었다. 계약자보다도 유세현을 더 따른다는 것은, 추후 진짜 마족이나 마왕이 등장했을 때 아퀼라가 배신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흠...”
현재로서는 마땅히 방도가 없는 상황.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리자 신분이 아닌 아퀼라는 코인을 흡수해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도움이 되는 소환수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되다니.
유세현은 상념을 털며 지금의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새 아퀼라가 돌아와 있었다.
“제3의 눈을 활성화 시켰습니다.”
“좋아, 내부를 살펴라.”
“분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퀼라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 * *
저택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병들과 기사, 전부 저택에서 생활하기 때문이었다.
수련을 위한 연무장, 정원에 심어져 있는 화사한 꽃들.
내부를 살펴본, 유세현은 많은 귀족들이 왜 안주하려고 하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다면, 모험을 하려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유세현은 저택에 들어가기 전 마음을 확고히 다잡았다.
‘오늘은 반드시 확인한다.’
어제는 서쪽에 위치한 2개의 건물을 수색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동쪽 방향에 위치해 있는 고급스러운 저택 뿐.
병사에게 손수건을 보여주자, 집사로 보이는 남성이 걸어 나와 안내를 시작했다.
“필립 공자님께서는 아직 회의 중에 있으십니다.”
“그렇군요. 제가 좀 빨리 찾아온 모양입니다.”
물론 유세현은 일부러 빨리 찾아왔다. 그래야만 뭐라도 더 뒤져보지 않겠는가.
-끼익
문을 열고 비로소 내부로 들어가자 전장에 걸려있는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제일먼저 눈에 띈다. 유세현은 집사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흘겼다.
상당히 많은 시녀가 분주하게 지나다니고 있지만, 아쉽게도 마땅히 눈에 띠는 인물은 없었다.
“이곳이 식사를 할 장소입니다.”
집사 발걸음을 멈춘 곳은 기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이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제법 그럴싸한 음식들이 제법 많이 놓여있었는데 아직 배치가 끝난 게 아닌지, 시녀들이 분주히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와...”
김주희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본분을 잃고 반짝반짝 빛났다.
레콰이크에게 주둔지를 공략당한 이후로 강해지기 위해 풀과 열매만으로 끼니를 때운지도 벌써 몇 달 째.
이런 호화스런 음식은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것이란 말인가.
김주희는 얼른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정신 차리자.’
지금 자신은 이곳에 놀러온 것이 아니다. 살아있을 지도 모르는 유세현 선배의 여동생, 유혜인을 찾기 위해서 왔다.
어디까지나, 음식은 부가적인 것일 뿐.
“그런데 그 회의는 언제쯤 끝납니까?”
“흠...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한 시간은 더 지나야 될 것 같습니다. 이번 몬스터 습격은 꽤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시 기다리는 동안 저택을 잠시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택을 활보하는 것은 엄중히 관리되고 있습니다. 테라스에서 기다리시는 것 정도라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집사가 딱 잘라 말했다.
“아닙니다. 무리한 부탁을 했군요.”
“테라스라도 안내 해드립니까?”
“예. 못 건드릴 음식만 보고 있자니 군침이 돌아서 못 참겠군요. 좀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귀빈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집사는 그들을 풍경이 잘 보이는 테라스로 안내했다. 유세현의 뒤에 위치한 집사를 흘끔 흘겼다.
그의 마력량은 D랭크 최상으로 일반 병사보다도 강한 쪽에 속한다.
과연 귀족가의 집사라면 이 정도는 되야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집사인 척을 하는 것인가.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김주희가 재빨리 아퀼라를 소환했다.
“...?!”
미처 입을 뗄 틈도 없이 이루어지는 정신제압.
꿈을 보여주는 것은 고도의 정교함을 필요로 하기에 이때는 안타깝게도 제3의 눈을 사용할 수 없었다.
유세현은 밖으로 나가 당당히 활보했다. 이런 것은 모름지기 대놓고 다니는 편이 더 의심 받지 않는다.
목표는 적당량의 마력을 지닌 사람들.
판도라에 도착하자마자 실버어레스트에게 잡혀 팔려온 것이라면 잘해봐야 D랭크 10~15%정도일 것이다.
‘E랭크도 존재하는 군.’
제국인들이 고블린과 코볼트를 싹 쓸어버려서 그런지 있을 수 없는 낮은 랭크도 존재한다. 유세현은 장장 30분 동안 뒤지며 시녀들을 살폈지만, 결국 동생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새 만찬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허허, 많이 기다렸나?”
“아닙니다. 배려해주신 덕에 편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세현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필립의 뒤로는 중년기사 카트린과 두 명의 시녀가 따르고 있었다.
숙인 고개를 들기 무섭게 시선이 교차한다.
-턱.
그 순간 유세현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담한 얼굴과 얇은 눈썹.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마지막으로 왼쪽 눈 꼬리 밑의 점까지.
째깍. 째깍.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가족의 죽음 이후 지금까지 줄곧 멈춰있던 유세현의 시곗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소리였다.
< 볼프강 가(家)의 저택(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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