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프강 가(家)의 저택(2) >
식욕을 돋구어주는 샐러드와 코를 자극하는 향신료 그리고 기름진 음식.
만찬은 정말 훌륭했지만 유세현은 음식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유세현은 필립의 우측에서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유혜인의 상태를 살피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추정 마력 D랭크 90%.
동생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조금 성장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떠한 것을 겪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왜 그런 가. 요리가 입에 안 맞는가?”
“아닙니다. 무척 맛있습니다.”
하지만 입장이 다른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던 발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형님 난 여기까지 할게.”
“발렌, 예의를 지켜라.”
“아, 뭐! 이정도 했으면 다한 거지! 내가 평민 때문에 계속 앉아있어야 돼?”
발렌은 억지로 만찬에 참가했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이에, 필립이 근엄한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앉아라. 발렌.”
“형님!”
“앉아.”
“...으!”
발렌은 결국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열이 잔뜩 오른 그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의 맹렬한 눈동자가 잠시 필립을 주시하다가, 유세현에게로 향했다.
영지로까지 돌아온 마당에 왜 자신이 저런 평민 따위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것인지.
‘정말 짜증나는 군.’
그는 잠시 동안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가 곧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뒤를 지키고 있는 시녀가 있는 곳까지 의자를 쫙 뺐다.
-스르륵.
뱀처럼 미끈하게 움직인 그의 손이 양 쪽 시녀의 하반신으로 향한다.
그는 대놓고 엉덩이를 탐하기 시작했다.
유세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저놈이 뭘 하고 있는 거지?
재빨리 옆을 살핀 필립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발렌!”
“왜 그러쇼 형님. 안 일어났잖소?”
“당장 손 떼고 예를 갖추...”
“하...형님. 평민한테 자꾸 예는 무슨 예요. 내 물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식사나 하쇼. 너도 신경 쓸 것 없어.”
발렌은 이제 거의 떡 주무르듯 손을 놀리고 있었지만. 시녀들은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참고 있는 것인지 몰라도 덤덤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유세현의 이빨이 꽉 아물렸다.
동생이 저런 희롱을 당했다고 생각하자면 당장에 목을 쳐 버리고 싶었다.
‘후우...아니지. 진정하자.’
동생은 그나마 다행이도 필립의 사람으로 보인다. 놈의 말에 따르자면 건드리진 못했을 터.
결국 발렌은 얼마 안가 자리를 떴다. 필립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기껏 한 만찬이 다 망가졌군. 동생의 태도의 대해서는 대신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그래,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군. 혜인아 식당에서 얼음 좀 가져와 주거라.”
“예.”
명을 받은 동생이 발걸음을 옮겼다. 유세현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실례 하겠습니다.”
“알겠네.”
유세현이 이동하자 집사가 뒤를 따랐다. 그는 김주희에게서 잠시 넘겨받은 아퀼라로 다시 심령을 제압한 뒤 유혜인의 마력을 향해 달려 나갔다.
길게 이어진 복도의 저편. 동생은 식당에서 막 얼음이 든 통을 들고 나온 상태였다.
반가움에 막 손을 들어 자신을 알리려는 찰나, 옆 기둥에서 한 남성이 튀어나왔다. 발렌이었다.
황급히 몸을 숨긴 유세현의 귓가로 비릿한 음성이 들려온다.
“얼음? 형님이 가져오라고 한 거냐?”
“그렇습니다. 공자님.”
“하하. 형님이 속이 많이 탔긴 탔나보군. 그보다 어제 분명 내 침실로 오라고 한 것 같은데 왜 안 온 거지?”
“저, 저는 필립 공자님의 직속 호위...”
“아니, 내가 그딴 거 말하는 게 아니잖아. 누가 나 지키랬어? 놀자는 거잖아 놀자는 거~왜 자꾸 순진한 척이야? 네가 이럴수록 리체만 힘들...”
쿵 쿵 쿵.
그때 복도 저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유세현이 발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10미터. 5미터. 3미터.
어느새 발렌의 몸은 유세현의 간격 안에 완전히 들어서 있었다.
지금이라면 놈이 반응할 세도 없이 숨통을 단칼에 끊어버릴 수 있다.
허나.
‘젠장...’
유세현은 검을 뽑지 않았다. 아니, 뽑을 수 없었다. 동생의 미래와 계획을 위하여.
그는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아직도 약했다.
“뭐야 평민? 네가 여긴 왜 있어?”
“화장실을 갔다 오던 중이었습니다.”
“큭! 평민은 어쩔 수 없는 평민이군. 식사 중에 볼일을 보러 갈 생각을 하다니...그나저나 이쪽은 식당이 아닐 텐데?”
“저택이 꽤 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이쪽 분께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만...”
유세현이 말하자 발렌이 킥킥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야, 반대로 돌아가서 좌측으로 가면 되니까 괜한 소리 말고 꺼져라.”
“......”
착 가라 앉은 눈으로 동생을 살폈다. 유혜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처럼.
유세현이 어쩔 수 없이 뒤돌려는 순간, 발렌의 뒤에서 한 시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렌 공자님. 연무장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메랄드 색의 긴 머리칼이 돋보이는 여성이었다. 발렌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아오 빌어먹을 만찬인가 뭔가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야 평민! 빨리 처먹고 이곳에서 꺼져라.”
발렌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뒤따라가기 전 시녀가 유혜인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난, 괜찮으니까 계속 지금처럼 행동해. 알았지? 절대 응하면 안돼.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이니까.”
“......”
유혜인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대답.”
“알았어...언니...”
“그래, 그러면 된 거야.”
이윽고 발렌과 시녀는 완전히 시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이 복도에 남아 있는 인원은 두 사람뿐.
유혜인이 유세현을 잠시 그윽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빠...왜...왜 오빠까지 이곳에 오게 된 거야. 도대체 왜...”
“너...괜찮냐...”
유세현이 현재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막상 말을 꺼내자니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빠는 언제 이곳에 오게 된 거야?”
그 말에는 오른손을 내미는 것으로 답했다.
“아...온지 얼마 안됐구나. 실버어레스트에게 붙잡히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과거 무척이나 운이 없던 이강호도, 한 가지 딱 운이 좋은 경우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실버어레스트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노예가 된 자의 말로는 그만큼 좋지 못하다.
유세현이 유혜인의 어깨를 양손으로 와락 붙잡았다.
“맞아! 너 저놈한테 뭐 이상한 짓 당한 건 아니지?”
“아...그거 듣고 있었구나...괜찮아 아무 짓도 안 당했어. 하지만 나 대신에 리체 언니가...”
유세현은 그 말에 안도했다. 또한 리체라는 여자에게 고마웠다.
“그럼 혹시 방금 전의 그 시녀가...”
“응. 리체 언니야.”
시녀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화사한 에메랄드 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던 사람.
그 여자가 자신을 미끼로 동생을 지켜주고 있던 것인가.
‘리체라...’
이름을 한 번 더 되새기고 있던 유세현의 뇌리 속에 별안간 번개줄기가 내리쳤다.
에메랄드 색의 머리칼. 그리고 리체라는 이름.
‘설마?’
유세현은 정말 설마 설마 하며 물었다.
“혜인아. 그분의 풀네임이 어떻게 돼?”
“리체 언니?”
“응.”
“리체 케머런. 그런데 그건 왜?”
“......”
자신은 일단 동생의 생사를 확인하러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어이없게 발견하게 되다니.
“너를 보호해준 분인데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
그 후 두 사람은 아쉽게도 더 이상 밀담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득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너무 늦게 돌아오면, 필립이 뭔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
필립은 귀족 중에서 정말 보기 드물게 착실한 인물이었다. 반면, 발렌의 경우에는 고여서 썩어버린 물과도 같았다.
이곳에 당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입을 싹 다물고 있던 그가 다시 나댈 수 있게 된 것은, 이 저택에서는 자신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점심,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닐세.”
필립은 바깥으로 마중까지 나와 주었다. 귀족으로 보이는 남성 한명과 수많은 기사들이 문을 통과해 저택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하, 필립 경 오래간만이군요.”
알폰스 론 발레르크.
볼프강 가(家)가 다스리는 펠페모아의 바로 옆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가의 자제였다.
필립은 정중히 예를 취했다.
“예, 오랜만에 뵙는 군요 알폰스 경.”
“하하, 발렌 경처럼 자주 만나 뵐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옆에 계신 분들은 손님이신가 보군요.”
“예. 이번 토벌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이죠.”
“오호. 대단하신 분들인가 보군요.”
알폰스는 말과는 다르게,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세현은 유혜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혜인도 아주 살짝 손을 올리는 것으로 작별을 표했다.
몇 마디 나눠 보지도 못한 두 사람.
노예와 평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지금 헤어지게 된다면 언제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막연히 기약하는 유혜인과 달리, 유세현은 동생을 언제까지고 노예의 신분으로 이 장소에 오래 둘 생각이 없었다. 지금이야 필립 곁에 있어 괜찮다지만, 발렌이 언제 막무가내 식으로 나올지 모른다.
‘기다려라, 반드시 다시 온다.’
유세현은 굳은 눈빛으로 저택을 나섰다.
* * *
몬스터 토벌의 회의가 종료 된 볼프강 가(家)의 회의실.
사람이 전부 자리를 떠나 이제는 발렌 만이 남아있는 그곳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붉은색의 독수리 로고가 박힌 화사한 체인 갑옷.
“알폰스 경! 대체 일을 언제 치르려고 이렇게 질질 끄는 겁니까! 이번에 암살자들을 투입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워워, 진정하시지요. 발렌 경. 이번에는 예기치 못한 일이 있었잖습니까. 저도 알았겠습니까. 지진의 주기가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터질지. 그리고 너무 목소리가 큽니다.”
“크...”
발렌, 그는 형이 죽도록 싫었다.
검술과 마나의 대한 재능. 그리고 올곧은 척 하는 심성까지.
태어난 이래로 비교를 안 당해 온 적이 없다. 차기 소드마스터 후보.
처음에는 따라가려 노력했었다. 허나, 신은 그에게 마력의 재능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자들은 아무리 잘해봐야 1류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없다.
허나, 판도라로 온 이후에는 그 구도를 뒤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재능이 없어도, 코인만 먹는 다면 마력을 충분히 올릴 수 있기 때문.
허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형 필립은 언제나 앞서 갔다.
힘, 마력, 검술을 포함한 모든 것에서.
발렌은 형, 필립이 차기 영주가 되는 것을 인정하려했다. 집안싸움의 경우를 좋게 끝난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허나, 필립의 올곧은 성격은 발렌으로 하여금 자꾸만 반향을 가지게 했다.
시녀를 가지고 놀면 어떠한가. 어차피 노예인데.
평민을 무시하면 어떠한가. 어차피 찍소리도 못 할 터인데.
허나, 필립은 사사건건 발렌에게 간섭 했고 인격체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지금, 형을 인정하는 발렌의 마음은 어느새 깊은 증오로 돌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꿰뚫은 알폰스는 귀찮은 일을 추진하고 있는 필립을 없애기 위해 발렌을 부추겼다.
볼프강 가(家)의 장남이 되라고.
그 결과가 현재 하고 있는 밀담이었다.
“조만간 기회를 또 잡아보도록 하죠. 연락드리겠습니다.”
알폰스가 문밖으로 자취를 감췄다.
쾅!
발렌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가격했다. 이번이 절호의 찬스였는데. 갑자기 등장한 몬스터나, 평민이나 뭐하나 맘에 드는 게 하나 없다.
-끼익, 쿵
밖으로 빠져나간 그는 곧바로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시녀 한명이 내부로 들어왔다.
에메랄드 색이 돋보이는 머리칼.
“이리와라.”
리체가 영혼 없는 표정으로 발렌을 향해 다가갔다.
* * *
“선배님...그...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아직 무슨 일을 당한 것 같진 않더라. 마력도 꽤 높은 게 마냥 쉬고 있던 것만은 아닌 것 같고.”
“마력이요?”
“응. D랭크 90%정도 꽤 높아.”
“오...그럼 이제는 어떻게...우선은 강호선배님이랑 합류 할거죠?”
“응 물론이지. 아, 그리고 발견 했어.”
“예? 뭐를...”
아리송한 말에 김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세현이 툭 말을 내뱉었다.
“리체 케머런.”
“예?”
“리체 케머런. 우리가 찾고 있던 여자가 이곳에 있었어.”
< 볼프강 가(家)의 저택(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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