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어진 고블린의 별 >
“우와아아!”
함성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며 일대에 광활하게 울렸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물량은 고블린들을 웃돈다.
얽히고설켜 이루어지는 난전.
게릭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쥐도 새도 모르게 정예병들을 빼돌려 전선에서 이탈했다. 여타 팀에게 보고를 할시 작전구역이 멀어 약속시간에도 늦거니와, 너도나도 전선에서 이탈하겠다고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적을 속이기 위해 먼저 아군을 속인다.
분명 게릭은 맹비난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까 이 전투가 끝나면 꼭 잘 좀 말해줘라!”
피가 흩뿌려지고 파열음이 튄다.
이제는 비등비등해진 아니, 우세해진 전투의 양상.
일행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레콰이크와 마주했다.
레콰이크의 옆을 지키고 있던 최정예병 폴란이 다급히 외쳤다.
“레콰이크님! 지금당장 자리를 벗어나셔야 됩니다!”
“......”
“레콰이크님?”
레콰이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주위를 살펴볼 뿐이다.
죽어나가고 있는 병사.
허나, 역시 정예병들이라 그런지 제법 잘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아니, 여기서 놈들을 끝장낸다.”
이제 다음 기회란 없었다. 지금 그들을 놓아 준다면 계속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닐 것이 너무도 뻔하다.
그럴 바에는 적의 마나가 소진된 지금 무리를 해서라도 죽여 놓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레콰이크는 일행을 향해 삼지창을 겨눴다.
이에 폴란과 그 외 근위 고블린 또한 병장기를 치켜세웠다.
“레콰이크님을 따르겠습니다!”
새삼 엄청난 신뢰였다.
루베르크를 다잡은 유세현의 고요한 눈동자가 적을 응시했다.
적의 수는 총 5마리.
“강호야 레콰이크 맡을 수 있겠지?”
“물론.”
“좋아. 그럼 나머지 네 마리는 우리가 맡을게.”
“킁! 아무 스킬도 사용할 수 없는 네놈들이 레콰이크님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쳐라!”
그 말을 끝으로 전투가 발생했다.
레콰이크의 창끝이 이강호를 향해 예리하게 파고들어갔다.
삼지창과 미늘창의 대결.
창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던 이강호는 삼지창의 틈새에 미늘창의 도끼부분을 걸친 뒤 올려치는 것으로 공격을 손쉽게 무마시켰다.
그리고 휘몰아치는 반격.
스킬의 유무와 상관없이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큭!”
레콰이크는 순수 창술에 있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스킬을 사용했다.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한 레콰이크의 오른손.
이 스킬은?
이강호의 입 꼬리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재밌군.”
자신과 똑같은 스킬.
물빛의 사원에서 유세현을 노렸던 것이 이 스킬이었던 것인가.
만약 자신이 익힌 것과 같은 랭크라면 고유능력이 없다고 해도 화력은 무시할 것이 못된다.
그렇기에 이강호는 공격보다도 회피하는데 힘을 썼다. 발화상태를 계속 유지하는데 상당한 양의 마력이 드는 것을 잘 알기 때문.
화염이 힘을 잃는 바로 그 순간이 레콰이크의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다.
한편, 유세현과 김주희는 운디네의 서포트를 받으며 폴란과 근위병들의 맹공을 버텨내고 있었다. 스텟으로는 그들이 우세였지만 협공이 어찌나 매서운지 좀처럼 공격할 틈을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보험으로 계속 신성 스킬을 유지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스킬의 격이 차이가 난다고 하나, 미미한 마력으로 인해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포기해라 인간!”
폴란이 검을 내리쳤다. 유세현은 재빨리 루베르크를 들어 막았다.
치지직!
대치가 이어지며 파열음이 울리고 스파크가 튄다.
옆에서 치고 들어가는 근위병을 확인한 폴란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크크크. 끝이다!”
‘과연 그럴까.’
그 순간, 유세현의 두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감춰두고 있던 비장의 수가 있었다.
그렇다. 지금까지 줄곧 존재했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해 사용하지 못했었던 수단.
“먹어치워라 루베르크.”
폴란의 검과 맞닿고 있던 루베르크의 검신이 새까만 빛을 발했다. 그러자 폴란의 검이 입자단위로 서서히 분해되며 루베르크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루베르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 무기포식.
그것을 전투에서 응용한 것이다.
“무슨!”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폴란이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잠시만 버티고 있었더라면 근위병의 공격이 통했을 터인데.
허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쿠웅!
정말 단 일순간 모든 마력을 쏟아 발휘된 암흑투기.
빈틈이 발생된 찰나의 순간을 유세현은 놓치지 않았다. 근위병의 목이 일격에 잘려 나가며 땅을 뒹굴었다.
이를 으득 간 폴란이 자신의 검을 살폈다.
입자가 다시 검을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루베르크는 무기를 포식할 때 약 1~3분이라는 시간이 소요 되는데 그사이에 접촉을 떼면 이런 식으로 먹은 것을 조금씩 토해내는 것이다.
“이 자식이! 레퀼을!”
그리고 다시 접촉을 하면.
스스스-
“큭! 또?”
재흡수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재흡수가 유지되는 시간은 약 5분이다.
즉, 2분 안에 적을 베거나 무기를 계속 맞닿게 대치시킨다면 루베르크에게 온전히 무기를 흡수시킬 수 있는 것이다.
“크으!”
대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검의 날이 점점 무뎌져 가자 지금까지 굳건했던 폴란의 심정에 동요가 일어났다.
만약 무기를 잃게 된다면 놈에게 한 순간에 당한다.
‘어떻게 해야...’
폴란의 심정을 아는지 김주희를 몰아세우고 있던 고블린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몸을 돌렸다.
“어딜! 운디네!”
“아쿠아 랜스!”
그 순간을 김주희는 무척 잘 공략했다.
매서운 속도로 날아가 심장을 꿰뚫는데 성공한 물의 창.
모든 마력을 소비하여 사용한 턱에 운디네는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역소환 되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1:1이 되었다.
“너는 아무데도 못가.”
시간이 지날수록 고블린의 군세는 인간 측에게 서서히 잡아먹히고 있었다.
* * *
“크윽.”
이강호와 마주하고 있던 레콰이크에게서 침음이 터져 나왔다. 적의 자세를 흐트러트리기 위해 무수히 많은 스킬을 응용해 사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치 스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마냥 차례차례 공략 당한다.
“어째서 너희 같은 놈들이...”
레콰이크는 통탄스러웠다.
저런 자들이 자신의 편이었다면 판도라도 두렵지 않았을 텐데.
미련한 자기 종족을 더 잘 이끌어 주었을 텐데.
그리고 아쉽기는 이강호도 마찬가지였다.
레콰이크가 인간으로 태어났더라면 이태광 못지않은, 아니 훨씬 더한 영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종족을 위해 부족한 스킬과 기예로 애를 썼다.
가지고 있는 힘 그 이상을 발휘해 회귀한 자신을 애먹게 했다.
비록 적이지만 레콰이크는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었다.
“넌 대단했다.”
이강호가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폴란의 목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레콰이크가 삼지창을 세웠다.
살아남는 것은 이미 불가능. 허나, 그렇다고 싸움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눈앞의 적은 저승으로 같이 데려가 줘야 판도라로 나아간 부족 인원들이 고초를 겪지 않겠는가.
목숨을 주고 목숨을 취한다.
동귀어진의 마음가짐.
“네놈도 대단했다.”
파앗!
은빛 섬광과 함께 두 영웅이 교차했다.
서걱.
날붙이의 싸늘한 음색의 공간을 은은히 유영한다. 이윽고 뜨겁게 솟아오른 피가 지면을 푸르게 물들였다.
오른팔에 길게 난 자상을 살핀 이강호가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떨어져나간 목과는 별개로, 레콰이크의 육신은 창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멈춰있었다.
바닥에 흩뿌려지기 시작하는 형형색색의 코인.
정말 우습게도, 레콰이크는 그 어떤 스킬조차도 떨어트리지 않았다.
이강호는 레콰이크의 목을 높게 들어올렸다.
“레콰이크의 목을 베었다!”
승리를 알리는 외침이었다.
* * *
지도자를 잃은 고블린들은 더 이상 인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생존자들은 그들이 다시는 활개를 치지 못하도록 확실히 짓밟기 시작했고, 여러부족으로 분리된 고블린들은 계속 도망쳐야만 했다.
그렇게 모든 사건이 일단락 된 지금, 일행은 단 하나 밖에 없는 7층 던전을 탐험하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석판이 많이 들어 중도 포기를 해야 되겠지만, 7층 던전의 석판은 1~6층까지와는 달리 몬스터에게 얻을 수 있어 상관이 없다.
문제는 시간.
몽환의 성처럼 인원수를 책정해서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에 그들은 한 달 정도 만에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대군을 이용해 고블린과 코볼트를 쓸어버렸던 아르카드 제국군 또한 이 던전 만큼은 소드마스터라 불리 우는 소수정예를 사용해 적은 시일 내에 클리어 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길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이 던전은 물빛의 사원처럼 끝이 없었다.
아르카드 제국군이 던전을 클리어한 뒤 닫히고 재차 열리는 과정에서 던전이 변형된 것이 분명했다.
이러다가는 게이트가 열리는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7층에서 사냥하며 6개월을 말짱 도루묵처럼 보내야 되는 것.
일행은 정말 죽을힘을 다해 나아갔다. 마왕성에서 조차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났을까.
그들은 마침내 보스의 문에 다다르는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5일.
“가자!”
보스를 일격에 처리할 심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세 갈래로 갈라진 길이었다.
다 같이 보스를 잡는 것이 아닌, 한 명 한 명 따로따로 나아가야 되는 시스템.
이강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이러한 시스템이 어떨 때 나오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예측이 들어맞는다면 생각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스텟이 고정되어있는 일반적인 보스와 달리 이것은...
“선배님 이건?”
“시련인거 같다.”
“시련이요?”
“응.”
시련의 종류는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되는 악몽의 시련이나 굳은 의지를 요구하는 철의 시련 등 수백 가지가 있었는데, 공통된 특징은 자신의 스텟에 합당한 몬스터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이전처럼 압도적인 스텟의 격차로 찍어 누를 수가 없는 것.
판도라에서도 외부가 아닌 내부, 그것도 상급 던전 이상에서만 가끔 나타날 터인데.
‘왜 그런 게 이 구름섬에...’
아무쪼록 여기까지 와서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또한 이것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더욱 위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
이강호는 일행에게 간단히 충고했다.
고개를 끄덕여 답한 유세현이 중간 방으로 향했다.
내부는 무척이나 어둠침침했다. 주위를 비춰주고 있는 것이라고는 창가로 들어오는 한줄기의 빛뿐.
빛은 계단 위에 위치해 있는 옥좌를 비추고 있었다. 눈에 익는 것이 뭔가 익숙하다.
기억을 되짚던 유세현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분명 자신은 이 옥좌를 본적 있었다.
마왕성. 루시뷀트의 방에서!
‘이, 이건 설마?’
그 순간 유세현의 눈앞에 알리창이 나타났다.
[힘의 시련]
자신이 가장 강하다 느꼈던 자가 구현된다는 사상 최악의 시련.
유세현의 왼쪽귓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옥좌위로 향했다.
어둠이 걷히며 칠흑의 갑옷, 커다란 대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루시뷀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모습은 처음 만났던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이로군.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자.]
“루시뷀트...본체군.”
[그렇다.]
서서히 몸을 움직여 계단을 내려온 루시뷀트가 유세현과 마주했다.
루시뷀트의 큰 풍채에서는 이전과 같은 위용이 잔뜩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이전처럼 압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되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루시뷀트가 툭 말했다.
[빨리 끝내도록 하지. 무엇인가에 묶여있는 건 딱 질색이다.]
“......”
[당연히 이길 수 있겠지?]
유세현은 대답대신 롱소드를 들어올렸다. 이에 루시뷀트도 바닥에 꽂아놨던 대검을 짚었다.
[역시 그렇게 나와야지.]
그렇게 말하는 루시뷀트는 왠지 모르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 *
치지직!
콰과광!
루시뷀트가 대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흑빛의 번개폭풍 일어나 주위를 초토화 시켰다. 덕분에 유세현은 공격은 커녕 계속 땅을 굴러야만 했다.
자신감 넘치게 검을 빼든 것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
암흑투기가 통하지 않는다.
루시뷀트의 영혼이 귀걸이에서 이탈한 상태라 흑암, 흑뢰를 발동시킬 수도 없다.
남은 비장의 공격스킬이라고는 천마혈사장 뿐인데 시야를 공유한 덕에 루시뷀트는 천마혈사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젠장...’
더 나아가 이강호가 말했던 대로 스텟도 완전히 똑같다.
다만 큰 차이가 있다면.
루시뷀트의 마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걸 어떻게...’
답이 보이지 않았다.
검을 맞댄 루시뷀트가 중얼거렸다.
[너는 줄곧 제자리에 머물러있구나. 인생이든 힘이든.]
< 떨어진 고블린의 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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