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덫(3) >
“뭐, 뭐야?”
유세현 일행의 매서운 속도와 갑작스러운 몸의 이상에 깜짝 놀란 게릭은 재빨리 주위에 갈래번개를 쏘았다.
전기전도율이 높아진 만큼 자연스럽게 번개가 적중할 것을 믿으면서.
허나, 그 순간 돌격해오던 일행이 재빨리 3방향으로 갈라졌다.
이강호는 좌측 김주희는 우측, 재빨리 백스텝을 밟아 전격을 피한 유세현은 정면 그대로.
“무슨!”
“어, 어떻게 이런...”
속도를 확인한 곳곳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단순히 그들의 스피드에 놀라서는 결코 아니었다.
“모, 몸이 이상...크아악!”
“커, 컥.”
주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빗발치고 그와 정비례해 지면은 점점 새빨간 피로 물들어간다.
일행의 검과 창이 궤적을 가를 때마다 별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픽픽 쓰러지는 게릭의 부대원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암흑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높은 정신력과 어둠속성 저항력이 필요한데, 그들은 이미 고블린들과의 전투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후욱 후욱...무슨...”
부대원 한명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이것이 전부였다.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분명 어찌어찌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이 세계에 막 떨어져 고블린과 억지로 전투를 치뤘을 때처럼.
그렇다 이 힘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단순히 몸을 옥죄이는 것만 아니라 마음까지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그런 무자비한 공포!
그나마 버티면서 항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게릭 뿐이었다.
유세현과 검을 맞댄 그의 입에서 침음이 터져 나왔다.
“크...너 지금 무슨 짓을...”
슈우욱!
“헉!”
대답대신 날아오는 흑색의 검신에 게릭은 황급히 몸을 뒤로 내뺐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부대원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숫자는 대략 20.
전투가 벌어진지 대략 3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자면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였다.
“너희들 정신 차리지 못해? 무기를 휘두르란 말이다 무기를!”
“하, 하지만 중대장님 몸이 움직이지...컥!”
애써 입을 열어 대답하던 부대원 한 명의 목이 단번에 떨어져 나갔다. 기선을 제압한 일행은 대화를 일체 허락하지 않을 셈이었다. 심신이 미약해지면 미약해질수록 암흑투기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니까.
게릭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그는 현재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정예인 그들이 맥도 추리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당하다니.
승산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니, 진즉 사라졌다. 기댈 것이라고는 스킬뿐인데 잔여 마력조차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아아! 이 새끼들이!”
게릭은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해놓은 게 있어서라도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암흑투기를 애써 이겨내며 온 힘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허나.
챙!
유세현이 차분히 검을 올려치자 온 힘을 다한 저력이 무색하게 튕겨져 나간다.
훙훙훙! 푹!
이윽고 지면에 떨어져 박히는 게릭의 검.
“자, 잠깐 멈춰라! 멈춰! 멈춰봐라!”
게릭은 필사적으로 외치며 황급히 땅을 기었다. 그 모습은 당당했던 처음 모습과는 무척이나 차이가 있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다.
잘 단련된 정예병, 그것도 1년 차 되는 인원 40명이 고작 3명에게 당할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유세현은 말없이 게릭을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이제 내려치기만 하면 끝.
“머, 멈추라니까! 하...할 말이 있다 할말이!”
“......”
유세현이 묵묵히 마무리를 지으려는 모습을 보이자 게릭은 더욱 필사적으로 외쳤다.
허나, 이런 게릭의 이러한 말은 유세현의 행동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못했다.
슈우욱.
곧 그의 냉혹한 검신이 바람을 가르며 목을 향해 나아가자 질끈 눈을 감은 게릭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이 미친놈이! 할 말이 있다니깐!”
“잠깐만! 세현아! 멈춰봐!”
“응?”
갑작스러운 이강호의 만류에 나아가던 루베르크가 돌연 멈춰 섰다.
지익.
검신에 살짝 스친 게릭의 목에서 피가 주르륵 새어나왔다.
루베르크는 정말 딱 그의 목 앞에 멈춰있었다.
만약 유세현의 반응이 0.1초라도 늦었다면 지금쯤 게릭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었으리라.
“허억 허억...”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게릭의 가쁜 호흡이 이어졌다.
그 또한 아직 목이 붙어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는지 황급히 양손을 들어 올려 목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를 살짝 흘겨본 유세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이강호를 향해 물었다.
“왜 멈추라고 한 거야?”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말이야. 저 놈도 할 말이 있다고 계속 외치고 있고.”
“...그러냐. 뭐, 네가 그렇다면야...”
유세현은 쓰윽 자리를 내주었다. 이강호가 싸늘한 눈초리로 게릭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고개만 들어라. 쓸데없는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죽인다.”
“......”
그 말에 게릭이 정말 고개만 들어올렸다. 이강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네게 질문이 있다. 만약 제대로 대답한다면 너의 그 할 말이라는 것도 한번 들어보도록 하지.”
“으...어차피 내게 선택권은 없잖아. 말해 봐라.”
“좋아. 그럼 묻겠다. 우리를 계속 노린 이유가 뭐지? 너희도 너희 쪽이 먼저 잘못했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을 텐데? 일을 이렇게 까지 크게 만들 필요가 있었나?”
누구나 다 한번쯤은 질문 할 수 있는, 생각보다 매우 정석적인 질문이었다.
승리한 지금 구태여 이런 걸 물어볼 필요는 없을 터인데.
‘무슨 의도지?’
마음을 가라앉힌 게릭이 천천히 대답했다.
“...너희가 새내기라서 그렇다. 그리고 새내기가 약 1년차 스텟을 지니고 있는 에드워드를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답이 되었나?”
“후환 때문이라는 건가?”
“그렇다. 너희가 일반 생존자였다면 이렇게 뒤를 쫓지도 않았을 거다!”
“흐음...”
이강호가 차분히 턱을 짚었다. 그 또한 팀 헤르메스가 쫓는 이유를 이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다음질문. 이전 제이미라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다짜고짜 동행을 요청 하더군 네놈 짓이었나?”
“...명령을 내린 건 내가 맞다. 단 내가 내린 명령은 추적뿐이었지. 동행을 요청한건 순전히 그녀의 판단이다. 아 물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놓긴 했었지만...”
게릭은 기록아이템을 지급한 것에 대해 슬쩍 돌려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강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를 추적한 다음에는 어쩌려고 했지?”
“당연히 접촉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려 했지.”
“두 가지란 게?”
“제거 또는 타협.”
게릭은 정말 한 치의 꾸밈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것이 눈앞에 있는 이강호가 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무슨 연유인지 자신을 떠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작정 죽일 상대에게 이런 것을 떠볼 이유는 없다.
게릭은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희망을 애써 붙들고 있었다.
“흠, 그러니깐 잘되면 그만, 수틀리면 죽이려고 했다는 건가?”
“...그때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판단이었다. 누구든 후환을 남겨두기는 싫은 법이니까.”
“정식적으로 절차를 밟아 대면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하면 팀 헤르메스의 명성에 누가 가지. 팀 솔져와 팀 아돌프가 걸고 넘어 지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너희가 너무 깔끔히 일을 처리하는 바람에 절차를 밟을 건덕지도 없었어. 뭐...그 덕에 이 꼴이
되긴 했지만...”
게릭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세현이 그런 게릭과 이강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답변이 이어질수록 유세현은 이강호가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 짐작이 갔다.
그는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게릭이라는 자가 위기를 무마하기 위하여 좋게 좋게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내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그럼 앞으로 두 가지 질문만 더 하도록 하지.”
“...말해봐라.”
게릭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는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생각보다 무난한 편이었다.
“너 말이야...여자 친구는 있냐?”
허나 들려오는 건 전혀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게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의 의미다. 애인이 있냐는 소리야.”
“...있을 리가...”
이 세계는 무척 험난하다. 오늘 함께한 동료가 내일은 싸늘한 주검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진심으로 정분을 나눈다?
미쳐버리기에 정말 딱 좋다. 아니, 실제로 연인의 죽음 이후 미친 사람들을 간혹 보았다.
그렇기에 게릭은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다. 정을 준 사람이 죽는 것은 정말 볼 것이 못 되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답해라.”
“없어! 그런 건 없다고!”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그럼 마지막 질문.”
“......”
“우리가 너희 팀원들을 죽였다는 건 누가 누가 알고 있지?”
지금까지 곧잘 대답해오던 게릭의 입이 굳게 닫혔다.
여러 명이 알고 있다고 퍼트려야 살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솔직히 대답해야 할 수 있을 것인가.
전자를 선택하게 되면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대군이 움직일 것이다.’라는 등의 협박을 이용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된다. 후자를 선택하게 되면 그들의 넓은 아량에 마냥 기대야 한다.
확률적으로만 따지자면 전자가 유리한 상황.
‘큭!’
허나, 게릭은 쉽사리 정할 수 없었다.
눈앞의 인간들은 규격외의 존재. 또한, 그들이 자신의 말을 믿을지 안 믿을 지도 미지수다.
쏟은 물을 컵에 다시 담을 수 없듯이 한번 한 선택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
망설이던 게릭은 자신의 감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아니, 이강호라는 자는 분명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다.
“나만 알고 있다.”
“호오...”
이강호를 포함한 유세현과 김주희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지금 게릭이 한 고백은 이 장소에서 팀 헤르메스와의 분전이 종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이강호가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런 걸 이렇게 솔직히 말해줘도 되는 건가?”
“......”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 때문에 게릭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잠시 뒤 게릭이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말을 들어 줄 텐가?”
“말해봐.”
“나를 살려줘라. 앞서 이야기했지만, 내가 이렇게 움직인 것은 너희가 후환이 될 수 있어서 였다. 개인적인 감정은 하나도 없어. 물론, 며칠 전에 욱한 것은 있었지만...아무튼 살려만 준다면 두 번 다시 너희를 쫓는 일은 없
을 것이다. 신경도 쓰지 않겠다. 그러니...”
게릭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원래부터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미리 다 털어놓고 구걸을 하니 뭔가 더 비참했다.
“그 말뜻은 너의 명령에 따르다가 죽은 동료들은 외면하겠다는 뜻이냐?”
“...그건 계속 짊어지고 갈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내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게릭은 입을 닫았다.
할 말은 다했다. 개인적인 원한이 없다는 것도 부각을 했고, 솔직함도 보여주었다.
협박이라는 방도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살짝 아쉽긴 하지만...판단컨데 어차피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려보내주나 안 돌려보내주나 쫓길 것이라면 죽이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테니까.
턱을 짚고 고민하던 이강호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한마디에 게릭의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좋아. 살려주지.”
“...?!”
게릭의 두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스스로도가 듣기에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지, 지금 뭐라고?”
“살려준다고 했다. 싫은가?”
“아...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대신 조건이 있다.”
“뭐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게릭이 재빨리 답했다. 이에 이강호는 미리 생각해두고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추후 네가 팀 헤르메스의 수장이 된다면 딱 한 번. 지시가 있을시 딱 한 번만 너희 팀을 내 말대로 움직여라.”
“그...그거면 되는 건가? 진짜로?”
“그래, 굳이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아, 알았다. 한 번쯤이라면!”
게릭은 이강호의 마음이 바뀔 새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덫(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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