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빛의 사원(1) >
당장이라도 꺼질듯 바람에 애처롭게 휘날리던 목숨이라는 촛불이 간신히 부지되는 순간이었다.
이강호가 묵묵히 손을 뻗었다.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깨달은 게릭은 재빨리 그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검...회수해도 되겠나?”
“물론.”
지면에 박힌 검을 주우려 이동하는 그의 눈동자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부하들이 비쳤다.
‘큭...’
게릭은 쓴 입맛을 다셨다.
부대원들의 전멸은 안타까운 마음과 별개로 그의 경력에 있어서도 어마무시 한 타격이었다.
분명 이것으로 인해 자신은 수장의 자질을 의심받게 될 것이리라.
아니, 독단적으로 부대원을 움직인 데다 몰살시킨 만큼 최악의 경우에는 모든 직위를 내려 놔야 될지도 모른다.
1년차 인원 100명이 전멸한 것은 이전 저층계 인원 500명이 죽어나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손실이었으니까.
더 나아가 설상가상으로 아이템 회수도 불가능한 상황.
게릭은 당장에 제출해야 될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무척이나 막막했다.
그나마 이 풍파를 이겨내고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 세 명을 팔아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을 또 상대해야 되기 때문이다.
주도면밀함과 강대한 힘 그리고 정체불명의 스킬까지.
게릭은 솔직히 말해서 그들을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후...글렀군.’
정정한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99%의 확률로 직위를 내려놔야 된다.
게릭은 한숨을 내뱉으며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이강호 와의 약속은 어차피 수장이 된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 진 것.
수장이 못 되면 딱히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마음의 정리를 끝내고 검을 회수해 일행에게 돌아온 찰나였다.
이강호가 툭 물었다.
“상부에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고 할 생각이지?”
“...고블린들과의 전투로 인해...”
“그렇게 되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약속을 지키기 힘들어 질 텐데? 아니, 되려 지금 가지고 있는 직책이나 잃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
게릭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는 지금 도대체 자신보고 뭘 어쩌라는 것인가.
허나, 게릭은 이 이야기를 목구멍 바깥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들이 당장에 마음을 바꿔 목을 노려올 수도 있었으므로.
“...이것 말고는 마땅히 다른 방도는 보이지 않는다만...”
“아니, 있다.”
“...만약 일러준다면 적극 반영해서 보고하도록 하지.”
게릭이 묻자 이강호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무척이나 간단.
유세현 일행이 고블린들과의 힘겹게 전투를 치루고 있는 도중 팀 헤르메스의 인원들이 돕기 위해 참전했다는 것이다.
팀 헤르메스의 인원들이 전멸하고, 유세현 일행이 살아남았다는 것에서 사실상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세 명이 게릭의 말을 인정해주기만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번 쟁탈전으로 인해 주둔지를 이끌 만한 재목으로 떠오른 신예인 만큼, 장기적으로 놓고 보자면 팀 헤르메스로서도 결코 손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게 해주겠다는 건가?”
“물론. 여기 있는 아이템들 또한 우리가 챙겨놨다가 추후 증거품으로 해서 돌려주겠어. 그러니 얼른 벗겨라.”
“아, 알았다.”
일행은 죽어있는 고블린과 생존자들의 장비를 벗겨 유세현이 지니고 있는 포켓에 집어넣었다. 아이템이 자연스럽게 작아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릭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부피를 줄일 수 있는 아이템이라니 그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아이템이다.
‘역시, 이놈들은...’
뭔가 다르다.
이윽고 유세현이 포켓이 터져라 최대치까지 아이템을 꾹꾹 눌러 담자 게릭이 이강호를 향해 곧장 의견을 물었다.
그들이 죽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거지? 내 생각에는 바로 1층으로 내려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 석판도 얻었는데 그럴 순 없지. 우선은 이곳을 나아갈 거다. 너도 따라와라.”
“...뭐? 고작 4명이서 계속 이곳을 나아가자는 거냐?”
“물론. 넌 싸우기 싫으면 안 싸워도 된다.”
“무슨...”
진지한 이강호의 답변에 게릭은 자신도 모르게 순간 욕을 내뱉을 뻔했다.
물빛의 사원은 던전의 크기가 어마 무시하게 큰 만큼, 나오는 몬스터의 양이 다른 일반 던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 힘으로 따지자면 몬스터들은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스텟의 차는 양의 차를 충분히 메꿀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고블린들의 뒤를 노렸다고 생각 했던 것이고.
문제는 몬스터들의 특수스킬.
각종 저항력 스텟이 충분하지 않다면, 난사하듯 날라 오는 눈먼 스킬에 순식간에 당할 가능성이 있다.
75~85%의 스텟을 지닌 고블린들이 괜히 뭉쳐서 이곳에 들어왔겠는가? 전부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온 것이다.
그들끼리라면 몰라도 게릭은 결코 사양이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나. 이곳 몬스터의 물량을 너희들이 제대로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은데...”
“다 알고 있으니 그건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뭐?”
게릭의 눈이 커졌다. 알고도 이곳을 나아가겠다는 건가.
‘정말 미쳤군...’
아니면 저항력 스텟이 그렇게 자신이 있거나. 결국 게릭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선두는 게릭과 이강호가 맡았다. 돌아가자고 제안한 게릭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으나 등 뒤를 차마 내줄 수는 없기에 내려진 결정사항이었다.
고블린들이 뚫어놓은 단계는 2단계를 지나 곧바로 3단계에 돌입한 일행을 맞아 준 것은 상반신은 여성의 모습을, 하반신은 물고기처럼 되어있는 인어 세이렌이었다.
타락한 인어 아쿠무스와 차이점을 꼽자면 꽤나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특수한 음파를 내뿜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행을 바라본 엄청난 수의 세이렌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아아아아!”
통로 전체가 소리에 공명하며 매섭게 진동을 일으킨다.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만드는 세이렌의 스킬.
하울링.
게릭은 황급히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이 소리는 천이나 가죽 등으로 막아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육신만이 음파를 차단할 수 있는 것!
때문에 이곳의 기본 공략법은 한번 버티고, 재충전이 되는 틈을 타 공격을 행하는 것이었다.
허나.
‘디그.’
이강호가 손을 치켜세우자 세이렌이 자리잡고 있던 공간이 순간적으로 움푹 가라앉으며 두뇌를 깨트리듯 자극하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정면에서만 맞지 않으면 별다른 위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취할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일행의 신형이 순식간에 앞을 향했다.
“운디네! 아퀼라!”
김주희의 외침과 동시에 뒤에서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운디네와 아퀼라.
그녀들은 곧바로 장기 마법을 사용했다.
“아쿠아 에로우!”
“파이어볼!”
파바밧!
콰광!
“키에엑!”
세이렌은 정말 순식간에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냥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저 일방적인 학살.
“허...”
듣도 보도 못한 특수한 스킬과 공략 법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게릭이 이내 검을 들어올렸다. 검신에서 맹렬히 튀고 있는 뇌전이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 * *
‘대단하고...미친놈들...’
이것이 게릭이 그들과 이틀 동안 함께하며 내린 평이었다.
그들은 좀처럼의 휴식도 없이 던전을 계속해서 나아갔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빈틈이 생기거나 하진 않는다.
세 명은 항상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상태에서 섣부른 움직임을 보인다면, 약속이고 자시고 목이 날아갈 것이 분명 하리라.
배신할 이유는 이젠 어디에도 없는데.
게릭은 지긋이 혀를 찼다.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가 있었군.’
하이리크스, 하이리턴.
아무리 티끌모아 티끌이라지만 100명이서 나눠먹을 것을 3명이서 독점하는데 강해지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그렇게 반나절을 더 사냥하며 나아가자 그들은 어느새 4단계의 보스가 있는 방 앞에 도달해있었다.
이는 정말 기록적이라고 할 수 있는 빠르기였다.
‘보스인가...이놈 상당히 귀찮은 놈인데...’
보스의 특징을 알고 있는 게릭이 세 명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1층까지는 좋던 싫던 같이 이동할 예정이기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저...너희들 혹시 여기 보스의 특징은 알고 있나?”
“물론.”
“...그래. 알았다.”
게릭은 잠시 구석에서 찌그러져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잠시 뒤.
이강호에게 특징을 들은 일행이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4단계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륵 스륵.
지면을 꿈틀거리며 이동하는 동글동글한 액체.
찐득해 보이는 액체가 지나간 바닥에서는 여지없이 연기가 피어오른다.
산성부식에 의해 유기물이 분해되며 발생된 기체였다.
4단계의 보스는 산성 슬라임!
일행들은 반투명한 내부 중심에 놓여 있는 자그만 한 핵을 주시했다.
저것을 파괴하면 슬라임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무너져 내린다.
문제는.
‘놈이 너무 커서 부수기가 힘들다는 거지.’
보통이라면 많은 인원들이 산성 침을 피하며 젤리처럼 조각조각 깎아내어 핵을 부순다.
허나, 이것은 물량이 많을 때의 이야기.
그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없다.
게릭은 그들이 어떻게 대처하나 가만히 지켜봤다. 과연 그들은 자신이 옆에 있음에도 마력이 많이 소비되는 큰 기술을 사용할 것인가.
“운디네.”
김주희가 신호를 주자 운디네가 아쿠아 볼을 여러 발 발사했다.
제 아무리 마법에 취약한 슬라임 일지라도 성분은 물!
슬라임은 상성이 있는 만큼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들의 노림수는 그것이 아니었다.
물기가 제법 스며드는 것을 본 유세현과 이강호가 재빨리 접근하여 스킬을 사용했다.
‘프로즌 디퓨전.’
‘아이스 볼.’
솨아아!
주위를 삽시간에 장악해가는 냉기.
프로즌 디퓨전은 매직 F 랭크 스킬이었지만, 어둠의 마력에 의해 강화된 덕에 매직 B 랭크 정도의 위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너무 좋은 스킬을 얻게 되서 그렇지 매직 B랭크의 스킬 또한 현재로써는 없어서 못 쓰는 축에 속한다.
트드드득!
이윽고 무방비하게 냉기에 노출 된 슬라임의 육체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재빨리 도약한 이강호가 창을 꽁꽁 언 중심부에 정확히 꽃아 넣었다.
콰드득!
투두두두!
균열이 생김과 동시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슬라임의 육체.
유세현은 땅을 뒹굴고 있는 핵을 찾아 발로 지그시 밟아 부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4단계의 보스라기에는 무척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게릭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그 강한 스킬을 제외하고도 얼마나 많은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일반 생존자들의 주력기 스킬이 2~3개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정말 미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놈들에게 뭣도 모르고 덤볐다니...에드워드 이 개새끼가!’
게릭은 눈앞에 에드워드가 있었다면 당장에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었다.
병신 같은 놈 한 놈 때문에 지금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게릭이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사이 일행은 코인의 분배를 끝마친 상태였다.
다음 장소로 나아갈 수 있는 문 앞에선 유세현이 석판을 짚으며 말했다.
“끼운다?”
“아니, 잠깐만.”
그때 이강호가 재빨리 만류했다.
5단계부터는 지금까지 줄 곧 나뉘어져있던 여러 가지의 길 중 두개의 길이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이 반대편에는 사냥을 나섰던 고블린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제법 강한 마력을 지닌 고블린을 유세현이 미리 포착했던 만큼, 나아가는데 주의를 하려는 것.
유세현은 차분히 정신을 집중했다.
확실히 이강호의 말대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당수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추정 마력은 대략 55%.
이곳에 있던 고블린들과 달리, 상당히 약한 축에 속하는 고블린들이었다.
내용을 들은 이강호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처음에는 팀 헤르메스의 묘비로 쓰기위해 단순히 이곳을 선택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고블린들의 행차로 던전 자체가 보물창고가 되었다. 고블린들의 힘도 빼놓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자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들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좋아. 그럼 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다가 몰살시킨 뒤에 움직이자.”
“그래.”
그들은 곧 작전을 짰다.
게릭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 *
바닥에 왼편에는 푸른피와 짓이겨져 떨어져나간 살점이 오른편에는 전부 까맣게 그을려 부서져 내린 재가 널브러져 있다.
유세현의 천마혈사장과 이강호의 화염을 정통으로 맞은 고블린들이었다.
이 한 번의 일격으로 상실된 고블린들의 전력은 무려 80%.
“키에엑!”
일행들은 공포에 질린 고블린 속으로 파고들어 학살을 자행했다.
검과 창을 휘두르는 그들은 땀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으며 내쉬는 숨소리 또한 무척이나 고요했다.
< 물빛의 사원(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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