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환의 성(2) >
“키에엑!”
단숨에 지면위로 떨어지는 목.
유세현은 해일이 고블린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봉쇄하고 있는 동안 재빨리 몽환의성 입구로 다가가 보라색 수정구에 손을 얹었다.
트드득!
그러자 수정구의 바로 위에 있던 여성의 모습을 띠고 있던 석상이 진동을 일으키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파편과 함께 서서히 드러나는 새하얀 나신.
파수꾼 몽환영.
몽환영이 그 고혹적인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지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온 새까만 어둠이 한순간 일대를 휘감았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이것이 눈을 감은 것만으로는 방지할 수 없는 환각의 정체.
유세현이 바라보고 있던 풍경이 번진 물감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며 단숨에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귀가하고 있는 가족이 있었다.
직접 사건의 현장을 본적도 없건만.
저 멀리서 가족을 향해 돌격해오고 있는 덤프트럭이 눈에 띠었다.
곧 있으면 중앙 가드레일을 부수겠지.
살짝 입술을 깨문 유세현이 막연히 예상하고 있을 때였다.
파앗.
순식간에 다시 배경이 바뀌며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왔다.
유세현의 고개가 갸웃 꺾였다.
이강호에게 듣기로는 환각의 지속시간은 5~10분이었을 터인데, 체감상으로는 아직 5초도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릇 환각이란 것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게 정설.
뭔가가 이상하다.
‘설마 이것도 환영인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유세현은 우선 부동자세를 유지하며 상황을 살폈다.
“키아악!”
“키릭, 죽어라!”
막연히 서 있는 유세현의 두 눈동자에 서로가 서로를 묻어 뜯고 있는 고블린들과 그런 그들을 휩쓸고 있는 이강호의 모습이 맺혔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트라우마를 건들 던 이전의 환각과는 괴리감이 너무도 크다.
유세현은 결국 조심스럽게 일행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자 그를 발견한 김주희가 당황한 표정이 되어 황급히 몸을 뒤로 내뺐다.
“가, 강호선배님! 세현 선배님 움직이시는데요?”
“뭐? 더 떨어져! 걔가 능력 쓰면 넌 한순간에 당한다!”
“예...예!”
이강호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그렇게 일러뒀는데.
“일단 세현이를 피해서 고블린을 죽여!”
“예!”
둘이 유세현을 피해가며 막연히 고블린을 향해 창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잠시 나마 상황을 지켜본 유세현이 볼을 긁적이며 지긋이 말했다.
“이거 역시 환각 아니지?”
“...?!”
이강호와 김주희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너...우리가 제대로 보여?”
“응.”
“...무슨 말도 안 되는...”
환각의 시간은 아주 적게 잡아야 5분.
지금은 3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환각이 풀리다니?
“...일단 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 혹시 모르니깐. 이놈들 다 처리하고 말하자.”
“...알았다.”
두 사람은 동족상잔으로 인해 안 그래도 줄어든 고블린들을 더욱 빠르게 처리해나갔다.
새까만 바닥을 형형색색으로 바꿔가는 무수히 많은 코인들.
가만히 부동자세를 취했던 유세현은 이강호가 마지막 고블린을 처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난 거지?”
“...어. 근데 너 진짜 언제부터 환각에서 깬 거냐?”
“그게, 얼마 유지되지도 않았어. 체감상으로는 한 5초쯤?”
“뭐?”
이강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각이라는 스킬은 저항력 스텟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구름섬만 뿐만 아니라 판도라로 넘어간 생존자들에게도 통하는 능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을 이겨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
바로 시전자보다 정신력이 월등히 높은 경우였다.
‘암흑투기를 계속 써와서 그런 건가?’
아무쪼록 대단한 놈이기 그지없다.
좋은 게 좋은 것인 만큼, 이강호는 곧바로 코인을 분배해나갔다.
죽인 고블린들의 스펙이 구름섬 4층 몬스터 급이 여서 그런지 그야말로 쭉쭉 올라가는 스텟.
스테이터스를 전체적으로 확인한 유세현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맺혔다.
쟁탈전과 방금 전의 전투로 인해 힘 스텟이 65%를 뛰어 넘었다.
이 페이스가 유지된다면 들었던 계획을 무리 없이 행할 수 있게 되는 것.
투득, 투드득.
그때 제 할일을 마친 몽환영의 육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세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만약 파수꾼이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이것을 반복하여 다른 스텟도 충분히 올릴 수 있었을 터인데.
유세현의 그런 생각을 읽은 이강호가 말을 덧붙였다.
“아쉬워 마. 어차피 이 방법을 계속 써먹을 순 없었어.”
“왜?”
“그건 말이지...”
쟁탈전은 기본적으로 한 달에 일어날 뿐더러 무조건 적으로 승리할 수도 없다. 또한, 던전이 이곳만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적이 이곳에 재차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그 텀이 무척이나 길다는 것.
그러니 운은, 아니 편법은 한 번으로 족하다.
일행은 곧장 거대한 성의 입구를 열어 내부로 들어갔다.
거의 타들어간 횃불이 희미하게 주의를 밝히고 있는 것이 자연스레 으스스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눈앞에는 두 개의 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몽환의 성에 진입하셨습니다. 루트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정예, 물량.]
이것이 이곳만의 큰 특징.
이강호는 곧장 정예를 선택했다.
뒤통수를 맞을 수 있는 고블린들을 미리 처단해 놓은 것과 유세현의 암흑투기를 고려하자면 물량으로 가는 쪽도 나쁘지 않았지만, 정예쪽이 보다 더 좋은 아이템과 스킬을 떨어트릴 가능성이 있는 탓이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물론, 성에 위치한 몬스터의 평균 능력치가 55%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제는 만만한 수준이다.
끼이익.
굳게 닫혀있던 두 개의 문 중 왼쪽 문이 열렸다.
발을 떼기 전 이강호가 일행을 향해 한 번 되짚었다.
“미리 말한 거 기억하지?”
“자나 깨나 트랩조심.”
“좋아. 그거 까먹지 마.”
그들은 문 저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모든 던전에는 최종 보스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최종 보스를 죽이면 던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마왕성 때도 그러하듯 이것은 절대적인 법칙.
때문에 항상 던전이 유지되고 있는 구름섬의 던전은 튜토리얼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던전의 유지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최종보스가 모습을 잘 들어 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일까?
구름섬의 생존자들은 최종보스를 보스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차피 만날 확률이 희박할 뿐더러, 흡사 조우하게 된다 하더라도 바로 도망쳐야 될 정도로 우월한 스펙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면에서 이 몽환의 성이란 연계 던전의 일반적인 보스는 유령의 형태를 띠고 있는 스펙터다.
언뜻 보기에는 밴시와 비슷하나, 자살을 시도하게 만들 만큼의 지독한 악몽을 보여주는 것이 큰 특징.
보스의 능력이 이러하듯 대개 등장하는 일반 몬스터와 트랩 또한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좌측 위에 트랩 조심해라.”
“옙. 선배.”
그렇기에 일행들은 차근차근 천천히 단계를 확실히 밟아가며 나아갔다.
어느새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그들이 1단계를 클리어 했을 때였다.
수정구슬을 통해 그들을 줄곧 지켜보고 있던 존재의 입에서 환희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세상에 이런 자가 존재 했었다니.”
무척이나 매혹적면서도 고혹적인 음색.
몽환의 성의 주인.
서큐버스 아퀼라 라즈베리.
수컷의 정기, 즉 마력을 주 에너지원으로 하는 아퀼라의 두 볼에는 살짝이나마 홍조가 맺혀있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고 맛있어 보이는 존재 때문이었다.
흡사 심연과도 같은 마력.
아퀼라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훑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서 마력을 흡수하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이제 막 1단계를 통과한 상태라 그럴 수가 없었다.
몽환의 성의 주인인 그녀가 직접 나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3단계를 통과 해 마지막 4단계에 들어섰을 때였으니까.
현재로서는 마냥 좋기 만한 그림의 떡.
그녀는 이글거리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계속해서 유세현의 행방을 주시해나갔다.
* * *
그들이 몽환에 성에 들어온 지 어느덧 10일.
등장하는 몬스터의 종류를 확인한 이강호는 어느덧 던전의 끝에 거의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향후 1~2일만 더 나아가다면 보스가 나올 것이다.
이강호는 차분히 그간 얻은 전리품을 살폈다.
울란의 각반과 미늘흉갑 등 대부분 매직 A 랭크의 아이템들로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제법 쓸만한 아이템이었지만, 아쉽게도 노리던 탐지스킬은 얻지 못했다.
역시 세상은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이강호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4층에서나 다시 한 번 도전해야겠군.’
오늘도 상당히 열심히 전진했기에 그들은 이만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곧바로 불침번을 짜고 경계에 들어갔다.
전방은 이강호가 후방은 김주희가, 걸리지 않은 유세현은 취침.
그렇게 막 일행이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솨아아.
새까만 안개가 별안간 전방에서 일행을 향해 빠르게 몰려왔다.
3명이 안개에 뒤덮이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서, 선배님 이건?”
“...?!”
탐지스킬이 없는 김주희는 물론이거니와,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유세현까지도 살짝 놀란 눈이 되었다.
대기에 분포하고 있는 어둠의 마력과 다가온 안개가 포함하고 있는 어둠의 마력의 양이 너무도 비슷하기에 차마 눈치 채지 못한 것.
“모두 붙어!”
거리를 좁혀 등을 맞대기 무섭게 이강호가 재빨리 라이트 마법을 사용해 이곳저곳에 날렸다.
허나, 안개는 그러한 빛까지 전부 흡수한다.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새까만 연기뿐.
유세현과 이강호는 곧바로 감각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지만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이강호는 곧장 불길을 일으켜 전방을 향해 날렸다.
수증기가 기화되며 안개가 빠르게 사라져간다.
이윽고 어둠이 전부 거친 후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전방을 살핀 김주희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헛?”
그들의 눈앞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길이 생겨 있었다.
함정도 건드린 적이 없건만.
“강호야 이건?”
“글쎄...내가 알던 기억에는 이런 건 없었는데...”
어쩌면 시간이 오래되어 까먹은 것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일단 여기서 휴식하는 건 안 되겠다.”
본래 그들의 앞에는 정예 몬스터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허나, 이제는 길게 늘어진 통로 밖에 없을 뿐더러 퇴로 또한 막혔다.
땅의 울림이나 마땅한 움직임이라고는 없었으니, 이는 공간자체가 바뀐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일행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길의 끝에는 커다란 공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이강호의 눈앞으로 보이는 커다란 문.
일반적인 정예의 방과는 한차례 차원이 다른 커다란 문에는 어떠한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있었다.
매혹적인 몸매와 산양처럼 나아있는 솟아올라 있는 뿔 그리고 날개까지.
이강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서큐버스인가...”
“예? 서큐버스요?”
“응.”
꿈에 침입하여 황홀한 밤을 보냄과 동시에 죽음을 선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마족.
마법에도 제법 능통하기 때문에 뱀파이어와 더불어 상급 마족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라면 구름섬에서는 절대로 등장하지 않을 만한 스펙을 지닌 마물.
허나, 구름섬 4층에서 열화판 뱀파이어가 나타나는 것을 감안하자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스텟이 어떻게 되려나...’
사실, 문제는 스텟보다도 놈들의 특수 능력에 있었다.
남심을 휘어잡는 그 매혹.
여자경험이 무척이나 많은 사람조차도 서큐버스의 유혹에는 못 당한다.
그들의 육체는 말 그대로 타인을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이강호는 살짝 손톱을 깨물었다.
영웅이 되기까지 갖은 고난과 인내를 겪었던 만큼, 이강호는 서큐버스의 매혹에도 별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문제는 유세현.
만약 그가 꾐에 넘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일이 상당히 굉장히 귀찮아 진다.
‘흠...’
이러나 저러나 아무쪼록 언젠가는 반드시 한번 겪게 될 일.
어쩌면 이곳에서 서큐버스를 만난 게 추후에는 되려 좋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이강호는 유세현에게 간단히 서큐버스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옆에 서 있던 김주희가 별안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평소 외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이니 만큼 서큐버스의 특성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런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 아니 마물이 존재한다니.
김주희는 반드시 서큐버스를 죽이리라 다짐했다. 자신, 아니 모든 여성들을 위하여.
< 몽환의 성(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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