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91화 (91/612)

< 몽환의 성(3) >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든 뒤 서큐버스의 방으로 돌입했다.

내부는 그간 침침하고 어두웠던 공간과 달리 붉은 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유세현은 마력을 탐지하며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와 붉은 레드카펫 그리고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려있는 침대까지.

고급 저택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가구가 배치되어 있는 서큐버스의 방은 그들이 그간 봐왔던 보스의 방과는 많은 괴리감이 있었다.

피의 혈전이 이루어지는 전장이라기보다는 흡사 성(性)을 사고파는 홍등가에 더 가까운 장소.

“아아~드디어....”

그때 방의 끝에서 매혹적인 음색이 울려 퍼졌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전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고혹적인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초한 얼굴과 대비되는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와 골반라인까지.

중요부위를 푹 파인 가죽으로 애매하게 가리고 있는 서큐버스는 그야말로 완벽한 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김주희가 입술을 지그시 곱씹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저 정도일 줄이야.

아퀼라가 유세현을 향해 팔을 들어 올리며 달콤하게 속삭이듯 읊조렸다.

“그대, 오늘 하루 모든 것을 잊고 나와 뜨거운 밤을 보내지 않겠나.”

쥐도 새도 모르게 둘을 향해 발산 되는 현혹 마법.

만약 이것에 제대로 당하게 된다면 이성과 사고가 마비되며 오직 아퀼라 만을 생각하게 된다.

순식간에 그녀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버리는 것!

아퀼라는 속으로 웃었다.

이 유혹을 버틴 남자는 여태까지 그 누구도 없었다.

허나.

“......”

유세현이 말없이 검을 들어 올리며 차분히 자세를 다잡았다. 이강호 또한 창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아퀼라의 동공이 살짝 확장되었다.

분명 매혹을 걸었을 터인데.

역시 맛있는 인간은 다르다는 것인가. 아니, 그것을 제외하고도 이 두 명은 뭔가 조금 다르다.

이렇게 되면 좀 더 가까이 접근할 필요성이 있었다.

아퀼라가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유감이네. 강제적인 것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지만...”

슈웅!

말과 동시에 연기처럼 흐릿해져가는 아퀼라의 육신.

사물을 일부 무시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투영화 스킬이었다.

“어딜!”

유세현은 재빨리 암흑 투기를 발현시키며 전력으로 질주해나갔다. 이강호가 파이어 볼을 사용하며 재빨리 뒤를 따랐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아퀼라가 더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끝을 보기 위함이었다.

허나, 그 순간 움찔 거린 아퀼라가 재빨리 손가락을 튕겼다.

슈우웅!

단번에 벽을 관통해 나타나는 수많은 유령 몬스터들!

그중에서는 보스로 예정되어 있었던 스펙터와 마왕성에서도 조우했었던 벤시도 있었다.

그야말로 최종보스 다운 통솔력.

일행들은 불태우고 자르고 베어나가며 빠르게 유령을 해치워 나갔다.

본래라면 통상적인 물리공격은 통하지 않는 것이 정설이지만, 마검 루베르크는 그 어떠한 형체도 포착한다.

유세현은 몬스터를 상대하면서도 계속해서 아퀼라의 위치를 주시했다.

자신이 아퀼라의 술수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무난히 이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기 때문.

그가 좌우에서 오는 3마리의 유령을 한 바퀴 돌며 베었을 때였다.

그간 멀찍이 떨어져 틈을 노리고 있던 아퀼라의 두 눈이 번뜩 빛났다.

몬스터들 덕에 일행이 거리가 조금이나마 벌어진 것!

샤르륵!

아퀼라의 육체가 순간적으로 허공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이내 유세현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

고속이동이 아닌, 순간이동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키몬드처럼 블링크 같은 스킬은 아니다.

결계를 친 일정 구역을 마음대로 거닐 수 서큐버스 전용의 특수 능력.

시전시간이 아예 필요 없는 만큼, 반응하기도 무척이나 힘들다.

“큭!”

대비를 하고 있음에도 뒤를 잡힌 유세현은 황급히 몸을 돌리며 루페르크를 휘둘렀다.

허나, 그 순간 따듯하면서도 포근한 감촉이 등과 목을 감쌌다.

이어서 귓속으로 은은하게 메아리치는 야릇하면서도 질척한 음색.

“우리 인간오빠는 어떤 플레이를 좋아 하려나?”

말과 동시에 유세현이 보고 있던 세상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 * *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신만의 성(性)벽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묶어 놓고 즐기는, 흔히 말하는 변태 같은 플레이를, 또 다른 사람은 정말 일반적인 퓨어한 플레이를, 또 어느 사람은 가학을.

서큐버스는 이런 대상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꾹꾹 감춰져 있는 성(性)벽을 읽고 그것에 맞춰준다.

이상형의 모습으로 나타나 주는 것은 기본 서비스.

내부로 침투한 아퀼라는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빠르게 유세현의 성향을 읽어나갔다.

현혹에 저항해서 어떠한 여자 경력을 가지고 있는지 사뭇 궁금했었는데, 남자는 굉장히 일반적인 범주에 속할 뿐더러 숨기고 있는 성(性)벽 또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형도 딱히 없기에 본래의 모습으로 가도 상관이 없는 상황.

유세현은 현대식 모텔을 재현한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콤한 마력의 향기가 안 그래도 음탕하기 그지없는 아퀼라의 성욕을 자극한다.

참기 힘들어진 그녀는 그 자그만 한 손으로 천천히 유세현의 육체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유세현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아퀼라는 그런 그를 향해 연인처럼 속삭였다.

“일어났어?”

몽환적인 꿈에서는 올바른 사고 판단이 안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의 유세현은 아퀼라를 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아퀼라가 고혹스러운 미소와 함께 침대위로 올라갔다.

새하얀 육신에 대비하는 검은색 속옷과 망사레이스가 굉장히 눈에 띤다.

지금의 그녀는 청초한 요녀 그 자체였다.

남자들의 로망.

낮과 밤이 다른 여자.

몸이 달아오른 그녀가 유세현을 향해 얼굴을 들이 밀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달콤한 키스를 해주려 한 것뿐이었지만 되돌아오는 것을 안타깝게도 달콤한 입술이 아닌 우악스러운 손뿐이었다.

턱!

“...?!”

단번에 목을 붙잡힌 아퀼라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도대체 어떻게?

유세현의 표정은 그야말로 잔뜩 구겨져 있었다. 주위를 살펴 무기를 찾는 그의 입에서 살기 가득 담긴 중저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분 더럽군.”

“...커, 컥. 어, 어떻...”

차마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의 순수한 힘은 이대로 아퀼라의 목뼈를 부수기에 너무도 충분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꿈속에서 어이없게 살해당할 상황.

아퀼라는 황급히 유세현과의 접촉을 풀었다.

슈우웅!

순식간에 원래 있던 공간으로 돌아가는 의식.

어느새 유세현의 시야에는 방금 전 그 자세 그대로 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강호와 김주희가 비치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깨나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사실은 1초도 지나지 않은 것.

공간을 도약하여 순식간에 간격을 벌린 아퀼라가 중얼거렸다.

“도, 도대체 어떻게?”

어찌 기술이 통하지 않는 말인가.

아니, 처음부터 정신력이 높아 애초에 능력이 걸리지 않았으면 않았지, 꿈에서 정상적인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반면 환각과 몽환을 겪은 유세현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무려 SSS랭크라는 어둠속성 저항력.

이것이 온건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유세현에게 아퀼라가 잠시나마 달라붙었던 것을 본 이강호가 김주희를 향해 외쳤다.

“김주희! 유세현은 지금부터...”

“나 정상이니깐! 걱정 마라!”

“...?!”

이강호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되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설마 이렇게 쉽게 이겨낼 줄이야.

유세현은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유령을 베어나갔다.

이제 어느덧 남은 것은 스펙터와 아퀼라 뿐.

아퀼라는 급한 대로 이강호를 유혹하려 했다. 허나, 달라붙기도 힘들거니와 그의 정신력이 얼마나 높은지 애초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눈에 불을 켜고 있던 김주희가 아퀼라를 향해 맹렬히 창을 휘둘렀다.

“아니, 이년이 또? 당장 선배님한테서 떨어지지 못해!”

질투와 분노라는 사심 가득담긴 창술!

김주희는 그간 보고 익힌 모든 창술을 아퀼라를 향해 맹렬히 쏟아 부었다.

상대적으로 육체 스텟이 낮은 아퀼라는 최대한 분투했지만 결국에는 팔에 상처를 입고 몸을 뒤로 내빼야만했다.

“어, 어떻게 이런...”

경악어린 표정이 된 아퀼라가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아주 간간히 나서 생존자들의 정기를 취한 적이 있는 그녀였지만, 이렇게 강한 자들은 그간 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무력이 무척 강한 자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어디까지나 만만하고 달콤해 보이기에 모습을 들어 낸 것인데.

아퀼라는 그들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며 저항했다. 허나, 그럴수록 그녀는 빠르게 깨달았다.

전혀 승산이 없음을.

화르륵!

쾅!

이윽고 아퀼라를 보호하던 최후의 몬스터, 스펙터가 이강호의 불길에 의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퀼라는 제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지능이 낮은 일반적인 몬스터였다면 용맹하게 마지막까지 싸웠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는 마족.

절망이라는 감정이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든다.

고개를 치켜세운 아퀼라의 두 눈동자에 유세현의 싸늘한 얼굴이 무심코 들어와 박혔다.

암흑투기로 부터 투영되는 칠흑 같이 어둡고 흉흉한 마력.

“아...”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모든 힘의 근원이라는 것을.

어찌 여태까지 그를 못 알아 볼 수 있었단 말인가.

“마, 마왕님?”

아퀼라가 반쯤 넋이 나간표정으로 중얼거린 찰나였다.

그녀를 향해 맹렬히 질주해 온 유세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던전의 최종보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펑!

목이 베인 아퀼라의 육신이 제자리에서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었다.

그 흔한 코인 하나 떨어트리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아퀼라가 착용하고 있던 은팔찌뿐이었다.

‘이건 설마?’

아키몬드에서도 익히 경험한 바가 있는 유세현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팔찌를 집어 들었다. 다행이도 그가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아이템 명: 키만의 봉인 팔찌.

등급: 유니크 [D Rank]

상세정보: 대마법사 키만 올란드가 손수 제작한 봉인 팔찌입니다. 현재 서큐버스 아퀼라 라즈베리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사용 시 아퀼라 라즈베리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단,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할 시 역으로 공격받게 됩

니다.

사용능력: 아퀼라 라즈베리 소환

“호오...”

정보를 살핀 이강호의 입에서 약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템의 랭크를 떠나 무엇인가를 봉인할 수 있는 무구는 정말 희소하기 그지없는데, 이것은 무려 유니크 D랭크인데다가 서큐버스를 봉인하고 있다.

유세현이 지니고 있는 귀걸이가 영혼을 직접 찾아 봉인해야 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면, 키만의 봉인 팔찌는 완제품인 것이다.

서큐버스가 탐지마법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지니고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야말로 금상첨화.

‘어떻게 할까...’

이강호는 이 아이템을 누구에게 배치할지 고민했다.

본래라면 어둠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유세현에게 주는 것이 시너지가 좋을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 김주희는 탐지마법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

운디네가 약간의 마력을 파악할 수 있다지만 범위가 채 30m가 못 되기 때문.

그렇기에 현재 급한 것은 약 100m에서 300m를 읽을 수 있는 자신보다도 김주희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린 이강호가 김주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팔찌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다 못해 핏대가 잔뜩 서있었다.

느낌만으로 보자면 당장이라도 팔찌를 씹어 먹을 것 같은 기세. 아니, 실제로도 그녀는 당장에나마 팔찌를 깨부수고 싶었다.

단지, 둘 때문에 시행을 안 하고 있는 것일 뿐.

살짝 실소를 내뱉은 이강호가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한 김주희를 향해 팔찌를 내밀었다.

그러자 김주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놀란 표정으로 돌변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어...선배님?”

어떤 의미인 줄은 이해가되지만, 차마 챙겨 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강호가 단숨에 쐐기를 박았다.

“일단 네가 써라. 단, 제압 못하면 다시 가져간다.”

“아...”

“왜? 자신없냐?”

“아! 아니에요! 제가 꼭 반드시 무조건 어떻게든 제압해내겠습니닷!”

김주희는 얼른 팔찌를 받아들어 착용했다. 팔찌를 연신 바라보는 그녀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충 상상이 갔지만, 유세현과 이강호는 살짝 한숨을 내뱉는 것을 끝으로 이내 잡념을 접고 성을 탈출했다.

< 몽환의 성(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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