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환의 성(1) >
하던 일을 멈춘 유세현이 최선두에 서 있는 두 명을 살폈다.
은백색의 경갑을 착용한 백인 남성과 등 뒤에 거대한 양날도끼를 짊어지고 있는 흑인 여성.
그들은 지금까지 유세현이 두 눈으로 봐왔던 그 어떤 생존자들보다도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행을 한 차례 전체적으로 훑은 남자가 같이 동반해온 팀원을 향해 물었다.
“리차드씨 이분들이 보고해주셨던 그분들이십니까?”
“예. 이 앞에 서 계신 두 분이 이번 쟁탈전에서 그 무위를 선보인 분들입니다.”
“호오...”
리차드가 지긋이 답하자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이강호나 유세현이 착용하고 있는 갑주들은 6개월 차 고블린들을 쓸어버렸다기에는 너무도 조악한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높게 쳐 봐야 매직, 낮게 치면 노말에 불과한 아이템들.
그나마 조금 괜찮아 보이는 건 무기뿐이었다.
이런 아이템을 지닌 자들이 어찌 자신들도 갖지 못한 위력적인 스킬을 얻을 수 있었을까.
머릿속으로 드는 잡념을 한발 앞서 떨쳐낸 남자가 일행의 앞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팀 라이트의 브라이언 로저스라고 합니다. 오늘 활약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유세현입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세현을 포함한 일행들은 호기로운 모습으로 차례차례 악수를 받았다.
브라이언의 입가에 별안간 호선이 그려졌다.
이곳이 아무리 자유를 중시하는 진형일지언정, 개월 수의 차이가 있는 만큼, 웬만한 사람들은 알아서 굽히고 들어오는데 이자들은 그런 것이 없다.
당당함 속에서 나오는 기백.
역시 이 정도는 돼야, 그 고블린들을 쓸어버릴만하지 않겠는가.
브라이언의 소개를 끝내자, 이번에는 흑인 여성, 팀 아레스의 제나 로멜로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였다.
자연스레 세 명의 대표를 맡게 된 이강호 곧장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두 분께서는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물론, 추후 두 사람이 어떤 말을 꺼낼지 이강호는 전부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스카웃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팀에 속하게 되면 발이 묶여 계획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
그러자 거절당할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브라이언이 살짝 놀란 눈이 되어 되물어왔다.
“흠...팀에 들어오시는 게 아무쪼록 훨씬 이득이실 텐데...혹시 뭔가 불편하시거나 조항 중에 맘에 안 드시는 게 있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상의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공손하게 재차 권유하는 두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든 영입하고 싶어 하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허나.
“죄송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왜...”
“저희는 지금까지 요새에 있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좀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습니다.”
“아...”
이강호의 말에 브라이언과 제나의 고개가 위 아래로 조심히 끄덕였다.
주둔지가 대형 팀의 억압을 못 이겨 튀어나온 생존자에 의해 만들어진 만큼, 그 어떠한 이유보다 타당한 탓이다.
이런 연유라면 사실상 더 이상의 회유는 불가능.
“그런 거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갑자기 찾아와 실례가 많았습니다. 만약,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팀 라이트는 문을 열어두고 있겠습니다.”
“팀 아레스도 마찬가지 입니다.”
대화를 마친 그들은 이내 왔던 상업지구 쪽으로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강압적인 요새의 대형 팀과는 새삼 많이, 아니 한차례 차원이 다른 모습.
아이언 연합이 위치해 있는 주둔지가 고블린 진형과 무척이나 가깝기 때문에 발생된 결과였다.
외부의 위협이 난무하는 이곳에서 내부의 불화가 발생하는 순간,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질 것이기에.
이는, 훈련이 빡센 군부대에서 내무부조리가 별로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이제 잠이나 자자. 내일부터는 이렇게 못 잔다.”
“그래.”
이윽고 취침이 시작 되었다.
불침번 초번초에 걸린 유세현과 김주희는 모닥불 앞에서 경계를 섰다.
저벅저벅.
전방에서 무수한 인기척이 소리가 별안간 울려 퍼졌다.
일반 새내기들보다는 높은 마력의 양.
이용석을 포함한 학과생 들이었다.
이태광과 브라이언 등 여러 사람들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온 것!
김주희와의 불화가 있던 터라 살짝 머쓱한 표정이 된 이용석이 손을 쓰윽 들어올렸다.
“오랜만이다. 세현아 그런데 벌써 자는 거냐?”
“...아, 예. 그보다 이곳엔 무슨 일로?”
“뭐긴~그냥 얼굴이나 보러 온 거지.”
이용석은 그렇게 말하며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유세현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같이 다가온 학과생들이 과거 학과 퀸카였던 김주희를 재빨리 둘러쌌다.
“주희야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러게...너희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겉치레적인 안부를 묻는 대화가 자연스레 오간다.
유세현은 학과생들을 쓰윽 훑어봤다.
미로 때보다도 훨씬 부족해진 숫자. 그들은 김주희를 향해 미소를 내보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심으로 웃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용석이 살짝 씁쓸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이게 이제 남은 학과생 전부다. 저번 보다 엄청 많이 줄었지?”
“...그렇네요.”
“미로에서는 많이 살려왔는데 이번에 특히 많이 죽었어. 개새끼 같은 세 팀들이 억지로 우리 팀을 쟁탈전에 끼어 쳐 넣은 바람에...그 와중 이한철 이 새끼는 지 혼자 살겠다고 팀 헤르메스한테 쳐 붙고.”
“......”
“후...”
긴 한숨이 이어졌다.
스킬을 위해 팀을 사지로 몰아넣은 전례가 있던 이용석이라는 남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팀원에 대해 신경 쓰게 된 것일까.
왜 대형 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일까.
이 세계의 존재자체가 말이 안 되는 만큼, 유세현은 굳이 묻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물을 필요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유세현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이용석이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래도 내가 제법 센 줄 알았는데 말이지...”
“......”
“아무튼, 그렇다는 거다. 경계 서는데 괜한 방해를 했네. 얘들아 돌아가자!”
결국 이용석과 학과생들은 썰물처럼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김주희가 나직이 말했다.
“대체 뭐 하러 온 걸까요?”
“......”
사실, 유세현은 이용석의 사뭇 복잡한 심정을 대충이나마 짐작 할 수 있었다.
허나, 이곳은 약육강식의 세계.
동정을 해서도 안 되며, 그에게 그런 가치 또한 느끼지 못한다.
유세현은 말없이 경계를 계속해 나갔다.
* * *
다음날, 일행은 경매 중매사에게 석판을 수령받기 무섭게 주둔지 바깥을 향해 나아갔다.
외각에 도착하여, 대충 지어낸 용무를 말하자 자리를 지키던 경계병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그들을 만류했다.
3명이서 바깥을 싸돌아다닌다는 것은 본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자살과도 같은 행위.
허나, 그렇다고 경계병들이 개인의 자유를 침범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결국 일행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문을 빠져나온 일행은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목표는 구름섬 3층!
올라가는 루트가 무척이나 많은 만큼, 이강호는 최대한 안전한 곳을 선택해 나아갔다.
그렇게 4일이 흘러 이강호가 노린 던전의 근처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키릭.”
이제는 익숙해진, 고블린 특유의 콧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유세현이 미리 마력의 흐름을 파악해둔 덕분에 고블린들의 이동을 알고 있었던 그들은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재빨리 풀숲에 몸을 숨겼다.
이강호의 맹렬한 시선이 그들의 이동방향을 살핀다.
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예상했던 대로 고블린들이 향하는 곳은 그들이 목표로 잡은 장소와 동일한 곳이었다.
이강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타이밍만 잘 잡는다면 어부지리를 노릴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 길의 끝에는 [그것]이 배치되어 있으니까.
이강호가 유세현을 향해 말했다.
“이대로 뒤를 따르자.”
“...들키면 위험한 거 아니야? 차라리 다른 던전으로 가는 게...”
“아니, 안 들켜. 그리고 되려 지금이 딱 좋아.”
“음...그게 무슨...”
“내가 괜히 이 연계 던전을 선택한 게 아니거든.”
이전 경계병들이 만류한 사례가 있는 만큼, 3명이서 다니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무척이나 위험하다.
던전에 도착하기도 전 적에게 발각되어 죽을 가능성도 높거니와, 설사 던전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내부에서 적과 조우할 수 있기 때문.
그렇기에 이강호는 내부로 들어 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는, 혹은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는 던전이 어디 있는지 계속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떠올린 것이 물량과 소수정예를 선택할 수 있는 이 연계 던전.
운만 좋다면 탐지스킬도 얻을 수 있는 장소.
[몽환의 성]
마력과 여러 속성저항력을 집중적으로 올릴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인 이 던전은 다른 던전과는 달리 약간 특이한 점이 하나있는데, 바로 그것은 던전 입구를 지키고 있는 파수꾼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파수꾼은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기존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내용을 경청하던 유세현이 고개를 갸웃 꺾었다.
“뭐가 다른데?”
“환각을 보여주거든. 약 5분 동안.”
“...흠. 걸리면 정확히 어떻게 되는데?”
“제자리에서 멈추거나, 자기 팀을 공격하게 되지.”
“...호오.”
유세현의 입 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적의 수가 약 150마리인데다가 마력량이 약 E랭크 65%것을 감안했을 때 전면전은 승산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건만, 이리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는 순도 높은 코인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유세현이 이어 말했다.
“그렇게 강한 환각이라면 파수꾼이 무조건 나타나는 건 아니겠네.”
“그렇지. 함정 형식이야. 고블린들은 당연히 알고 피해 갈 테니 우리가 발동시켜야 돼.”
역시나 약간의 위험은 동반한다. 아니, 실패할 경우 상당히 위험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자면 이 세계에서 위험하지 않은 것은 없다.
“방법이 어떻게 되는데?”
“그건 말이지...”
그들은 계획을 세우며 숲속 깊은 곳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고블린들의 뒤를 계속 밟았다.
이동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스산해지는 공기.
마침내 몽환의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다르자 익숙한 감각이 유세현의 피부를 타고 흘렀다.
‘이건...’
어둠의 마력.
몽환의성의 성에서는 그렇게 짙진 않지만, 분명 어둠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세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왠지 모르게 포근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품안에 있던 때처럼.
질끔 감았다 뜬 유세현의 두 눈이 더욱 매섭게 빛을 발했다.
그때 이강호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마침내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 것!
한 걸음, 두 걸음.
모두 환각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했기에 이강호는 모든 집중력은 쏟아 부었다.
이윽고, 고블린 모두가 범위에 안에 들어간 찰나였다. 이강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내렸다.
신호를 확인하기 무섭게 김주희가 외쳤다.
“운디네!”
“아쿠아 웨이브!”
아누비스의 전신을 휩쓸었던, 김주희의 모든 마력을 담은 거대한 해일이 다시 한 번 고블린들을 향해 솟구쳤다.
파앗!
동시에 하늘을 향해 별안간 튀어 오르는 유세현의 신형.
물을 밟으며 단숨에 해일의 끝에 올라가 선 그가 다시 한 번 더 재빨리 허공을 박찼다.
그러자 그의 육신이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듯 방향이 90°로 꺾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리 법칙조차도 무시하는 최강의 보법.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극성으로 펼칠시 좌우팔방으로 12개의 잔상을 남긴다는 전설적인 무공이 지금 구름섬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유세현은 해일의 거친 물살 위를 밟으며 몽환의 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별안간 기습을 당한, 고블린들의 그제야 당혹어림 침음을 터트렸다.
“키릭. 이, 인간? 이게 무슨....”
“전원 해일에 대비! 나무를 붙잡아라!”
지능이 오른 만큼 그들은 황급히 대응책을 마련했다. 허나, 그들이 마련한 대비책은 어디까지나 해일.
매서운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유세현을 발견한 고블린 한마리가 당혹어린 표정이 되어 외쳤다.
“키릭? 아, 안돼! 적이 온다! 막아! 막아야 돼! 트랩을 발동시킬 생각이다!”
“막아라!”
재치 있는 고블린 몇 마리가 재빨리 나무위로 올라 유세현을 향해 도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블린들은 유세현이 단순히 물위에 떠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파앗!
허공을 박찬 유세현의 신형을 본 고블린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허공을 밟다니?
안타깝게도 고블린의 생각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새 새까만 흑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 몽환의 성(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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