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과 기억 그리고...(1) >
김주희는 손을 들어 구덩이 아래를 가리켰다.
“이 아래에서 몬스터와 전투하고 계세요.”
“아래에서...말입니까?”
몰라서 되묻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곳에 두 사람이 없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으니까.
천천히 다가온 표상욱이 구덩이의 내부를 살폈다.
챙!챙!
주위를 밝혀주던 라이트 마법의 유지시간이 끝난 뒤인지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금속성을 띤 격전의 소리가 미묘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표상욱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주희씨는 왜 이곳에...전투에 가세하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아, 지금부터 그 건에 대해 설명 드리려고 했어요.”
이후 김주희는 차분히 설명을 해나갔다.
위험한 장소라 그런지 예상과 달리 의외로 표상욱은 진지하게 말을 듣는 모습을 보였다.
말을 끝마친 김주희는 어쩌면 쉽게 일이 끝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안타깝게도 정말 생각뿐이었다.
기어코 밑으로 내려가겠다고 선언을 한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너무도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이었다.
“만약 말이 사실이라면 저희는 끼어들지 않고 구경만 하겠습니다.”
“아니...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흡혈이라도 당하면...”
“아,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직접 당해보시지 않으셨으면서 어떻게 아시는 거죠? 물리면 끝이라고 한건 주희씨지 않습니까. 아니면 누가 벌써 물려 보기라도 한 겁니까? 그렇다면 또 이야기가 이상해지는데...”
“......”
김주희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뭐라 더 추가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이강호가 익히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자신 또한 몰랐을 사실이었으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들어온 그들은 김주희가 탐욕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즉,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눈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회유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
표상욱이 계단 아래로 나아가려던 찰나였다.
“멈추세요.”
후웅!
난데없이 튀어나온 한 개의 기다란 창대가 진로를 막아선다.
표상욱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눈빛이 돌변한 김주희가 서 있었다.
“불쾌하군요.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선택은 저희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표상욱은 너무 지당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당당히 말했다.
김주희는 그것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조건 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김주희는 들고 있던 창을 힘껏 휘둘렀다.
서걱.
단번에 떨어져나가는 표상욱의 목.
“...무슨!”
“미친!”
생존자들의 경악어린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창이 이곳에 위치해있는 인원들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 * *
유세현과 이강호는 쉴틈 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만약, 다고베르가 모든 능력을 방어로 전환시키지 않았다면 벌써 해치웠을 수도 있는 상황.
“크윽.”
옆구리를 찔린 다고베르의 시선이 재차 구덩이 위로 향했다.
벌써 시간이 상당이 흘렀음에도, 아무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뛰어올라간 여자가 위에 인원들을 모두 제압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방어만 해서는 승산이 없다.
한계에 다다를 다고베르가 어쩔 수 없이 대응을 하려던 찰나였다.
툭.
무엇인가가 땅으로 떨어졌다. 사람의 목이었다.
다고베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 피를 흡수할 수만 있다면 약간이나마 체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
허나.
‘큭. 도무지 틈을 주지 않는군.’
순간 폭발적으로 능력을 발현시키면, 잠시나마 그들에게서 빠져나갈 수는 있다.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빠져나가서 흡혈을 해봤자 양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결국 그게 그거라는 것.
‘더 큰놈은 안 떨어지는 건가.’
인간의 온전한 육신, 혹은 몸통 정도만 떨어져도 해볼 만하다.
다고베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슈우웅!
“꺄아아!”
쾅!
거센 바람과 함께 수 미터 옆으로 여자 한명이 추락했다. 김주희였다.
생존자 일동을 전부 상대하던 김주희가 광역기술을 맞고 밀려 떨어진 것.
잠시나마 기쁨에 차있던 다고베르의 표정이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일그러졌다.
‘젠장, 왜 와도 저런 년이...’
틈을 만들어 흡혈하기에는 저 여자 또한 제법 강하다.
만약 회피라도 하는 날에는 빈틈을 놓치지 않는 두 인간에 의해 그날로 뱀파이어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유세현이 공격을 퍼붓는 모습 그대로 김주희를 향해 외쳤다.
“김주희! 다른 놈들은?”
“으...죄, 죄송해요. 선배...전부 처리하지는 못했어요...”
유세현과 이강호를 서포트 하기위해 마력을 전부 사용 한 게 너무 크게 작용했다.
“저, 저기 있다!”
“개 같은 년!”
계단으로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가던 다고베르 눈이 재차 번뜩 빛난다.
김주희가 최대한 막아보기 위해 생존자들을 향해 달려 나가려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큭큭큭 너희의 패배다! 하아압!”
힘찬 기합과 함께 모든 기력을 사용해 만든 강한 충격파가 다고베르의 육신에서 퍼져나갔다.
“큭!”
그 결과 유세현과 이강호의 자세가 아주 미묘하게 무너졌다.
그러면서 발생 된 순간의 틈!
다고베르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둘에게서 빠져나와 모든 기력을 다해 달려 나갔다.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켜줄 이동식 도시락을 향해.
“뭐, 뭐야? 저놈은?”
“주, 죽여!”
깜짝 놀란 생존자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휘둘렀지만 유세현과 이강호의 맹공에도 버티던 다고베르에게 닿을 리는 만무.
이내, 생존자들의 틈으로 파고든 다고베르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한 남자의 목을 꿰뚫고 들어갔다.
쭈우욱.
“끄아아악!”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빠르게 메말라가는 남자의 몸.
창대를 잡고 있는 이강호의 손이 분노에 부들부들 떨렸다.
끝났다. 그것도 완전히.
이로서 다고베르를 처리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어떻게든 도망이라도 쳐보는 것!
“유세현! 김주희! 뛰어! 이곳을 벗어나!”
“...제기랄!”
말과 동시에 세 명은 계단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슈욱.
그들이 스쳐지나가자 생존자들을 유린하며 피를 흡수하던 다고베르의 시선이 세 사람을 향했다.
일행이 계단의 절반도 채 못 지났을 때였다.
“크크크! 어딜 가려고!”
그간 당한 것에 대한 서러움 때문일까, 다고베르가 남은 생존자들을 무시하고 일행을 향해 돌진해왔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위치가 역전 되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퇴로를 막아선 다고베르가 거만한 눈동자로 셋을 내려다보자 이강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계획은 완벽했을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던 이강호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었다.
완벽이라니.
세상에 그런 말은 어디고 존재 하지 않는데.
이것은 참사. 그렇다 어디까지나 지나친 자신의 과욕에서 비롯된 대참사였다.
“후우...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외줄타기의 인생.
이 가혹한 세계에는 승리 아니면 패배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그는 뭐가되었던 패배했다.
이강호의 두 눈이 유세현을 슬쩍 흘겼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았는데.
이내, 손을 뻗은 그가 말했다.
“세현아. 그거 줘봐.”
“......”
‘그거’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유세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세차게 울리는 심장의 고동소리와 함께 유세현의 뇌리 속으로 실종된 동생이 떠올랐다.
죽지 못해 살고 있던 자신에게 새로이 생긴 삶의 유일한 목표.
허나, 유세현도 내심 느끼고 있었다.
기이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강호 조차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런 험난한 세계에서 동생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란 것을.
유세현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영롱한 보랏빛의 구슬이 손가락에 잡혀 나온다.
유세현이 이강호에게 지긋이 말했다.
“먹으려고?”
“어, 먹고 처리해야 될 거 같다.”
“먹으면 죽는다며?”
“호흡법을 익혔으니 살 수도 있어.”
그 어느 때처럼 덤덤히 말하는 모습이 진실 같이 느껴지지만 유세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유세현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나보다 마력 감지도 못하는 게 꼴값 떨기는...”
꿀꺽.
그는 그 말 그대로 데스크라토스의 정수를 목뒤로 넘겼다.
“너! 무슨...”
콰과광!
미처 놀랄 틈도 없이 유세현의 전신에서 강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흐릿하던 시야가 돌아오고, 죽어가던 육신에 활력이 돋는다.
세포를 타고 흘러넘치는 압도적인 힘!
다고베르를 향해 걸어 나가는 유세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강호야 앞으로 누가 진심으로 충고하거든 제발 말 좀 쳐 들어라. 그리고...”
딱 거기까지 들은 순간이었다.
넋이 반쯤 나간 있는 이강호의 뇌리 속으로 그간 수면 밑에 잠겨있던 기억의 파편이 마구 솟아올랐다.
2차 튜토리얼 당시, 좋아하던 김주희를 지키기 위해 무모하게 나섰던 자신.
허나, 수적 열세에 곧 궁지에 몰렸고, 유세현은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무리를 하다가 죽었다.
그 흔한 원망조차 하지 않은 채.
그의 마지막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뇌 속에 생생히 박혀있다.
[야...그 여자...너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했지...사람이 충고를 하면...제발 말 좀 들어라 알겠냐?]
유세현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했었다. 그리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는 ‘그간 고마웠다.’라는 감사의 인사까지 덧붙였다.
감사의 인사를 해야 되는 것은 자신이었는데. 자신이 해준 것이라고는 고작 해봐야 한강다리에 같이 올라가준 것뿐인데.
자신은 그를 구하긴 커녕 다시 한 번 더 사지로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어지는 유세현의 말이 이강호의 귓속에 메아리쳤다.
“...그간 고마웠다. 만약 추후 내 동생 발견하게 되면 나라고 생각하고 잘 좀 대해줘. 성격은 지랄 같아도 나쁜 애는 아니니깐.”
파앗!
이강호가 미처 답할 틈도 없이, 자리에서 자취를 감춘 유세현의 신형이 다고베르의 얼굴 앞에 나타났다.
다고베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방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놈이 어찌 이런 속도를 낼 수 있단 말인가.
깜짝 놀란 다고베르는 황급히 방어스킬을 시전 했다.
“피, 피의 장...”
빡!
허나, 피가 형상을 이루기 전 유세현의 주먹은 이미 다고베르의 안면을 정통으로 강타하고 있었다.
콰과광!
단번에 벽에 날아가 처박히는 다고베르의 몸.
그런 다고베르를 유세현은 그야말로 무참히 난자하기 시작했다.
새까만 칠흑의 검이 궤적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잘려나간다.
유세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을 역수로 바꿔 쥐었다.
그리고.
푹.
푹.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고베르의 얼굴을 향해 내리찍었다.
눈알이 터지고 뇌수가 흩뿌려짐에도 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확실한 확인 사살.
그렇게 수십 초가 지나자 다고베르의 몸에서 솟아오른 영롱한 코인과 함께, 뚝 정지한 유세현의 사지가 덜덜 떨려왔다.
온몸을 불사르는 뜨거움이 신경을 빠르게 장악해나간다.
폭주의 전조현상.
“크아악!”
비명과 함께 이내 어둠의 마력이 전신 곳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야 될 흉흉하고도 새까만 마력이, 정형화 되어 공간을 가득 메운다.
“크으...크아악”
유세현은 고통 속에서 제 맘대로 날뛰는 어둠의 마력을 제어하기 위해 최대한 의식을 집중했다.
허나, 한번 제어에서 벗어난 순도 높은 어둠의 마력은 되려 그의 숨을 죄어올 뿐이었다.
슈우욱.
쿵!
결국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는 계단의 경로를 벗어나 구덩이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슬쩍 돌린 그의 두 눈으로 뛰어내려오는 김주희와 이강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흐릿해지던 시야는 곧 완전히 어둠에 물들었다.
* * *
[결국 이렇게 되는군.]
어둠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소하지만서도 나름 익숙한 목소리.
“루시뷀트”
유세현이 읊조리자 루시뷀트가 답해왔다.
[크크크. 타인을 위해 자신을 버린 자여. 이제 만족이 되었느냐?]
귀걸이의 효과는 분명 시야 공유만 이었을 텐데.
유세현은 눈을 떠 음성의 근원지를 살펴보려 했다. 허나, 위치해 있는 공간이 너무도 새까맣고 어두워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공 속에서 루시뷀트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스스로의 힘이 짓눌려 죽는 꼴이라니. 스스로의 가치를 모르는 너에게는 턱없이 어울리는 죽음이다.]
“...너.”
뭐라 대꾸를 하려던 유세현은 입을 닫았다.
어차피 죽는 거 다 무슨 소용이 이겠는가.
단념한 그가 몸에 힘을 뺀 순간이었다.
[허나, 지금 죽기엔 네놈의 악운이 너무 강하구나. 나를 만난 것과 같이.]
“......”
[눈을 떠라. 유세현. 너가 그토록 원하는 타인과 계속 나아가고 싶다면. 이젠 잠에서 깨어나야 될 시간이다.]
슈우욱
파앗!
루시뷀트의 말과 함께 눈을 번쩍 뜬 유세현은 고통에 몸서리쳤다.
아직 죽은 게 아니었다니.
“크으으...”
그는 주위를 살필 틈도 없이 마력제어를 위해 모든 오감을 곤두세웠다.
최대한 해볼 만큼 저항은 하고 떠나야 미련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때였다.
[끌끌끌. 상당히 무리했나 보군. 이정도의 내공, 아니 마력폭주라니. 딱히 사용하는 무공도 없어 보이는데 어쩌다가 이지경이 됐지?]
바로 옆에서 노인의 조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세현은 그제야 황급히 주위를 훑었다.
온 세상천지가 새하얗기만 한 것이 그가 본래 있던 간섭공간이 아니었다.
유세현은 덜덜 떨리는 입을 간신히 움직여 옆에 있는 백발에 흰 수염이 난 노인에게 물었다.
“크, 크윽. 여, 영감님 여...여기는 어디죠? 그리고 누, 누구신지...”
[영감님이라니!! 본좌로 말할 것 같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다고 일컬어지던 천하제일인이자 마교의 교주...]
노인은 기분이 나빴는지 노발대발 성내며 자신을 소개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유세현이 밀려오는 고통에 재차 정신을 놓으려하자, 수염을 한번 쓸은 노인은 하던 말을 끊고 화제를 바꿨다.
[네놈.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나?]
< 희생과 기억 그리고...(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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