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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76화 (76/612)

< 희생과 기억 그리고...(2) >

무척이나 짧은, 그러나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잡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말이었다.

유세현은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며 답했다.

“예.”

가능하냐, 진심이냐 등의 사실 확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떠한 존재인지, 누구인지도 알 필요 없었다.

중요한 것은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뿐.

노인이 유세현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의 두 눈은 잔뜩 노기를 띠던 방금 전과 달리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본좌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전수해주도록 하마.]

“...뭐, 뭐죠?”

[본좌의 제자가 되어라.]

“...그, 그게 무슨...”이강호에게 천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유세현은 노인이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허나.

“...다, 단지 그거면 되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되, 되겠습니다.”

그는 무척이나 판단이 빨랐다.

노인이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던 찰나였다.

부글부글.

펑!

“크윽.”

잘 붙어있기만 하던 유세현의 왼쪽 팔 표피조직이 꿀렁꿀렁 솟아오르더니 폭발하듯 단번에 터져나갔다.

뜯겨져나간 단면으로 부터 맹렬히 피어오르는 어둠의 마력.

절단된 팔을 감싼 유세현은 스스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은 노인이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군. 네놈 분명 본좌의 제자가 되기로 한 것이렸다?]

“허억, 허억...예. 합니다. 해요.”

[좋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네놈에게 본좌의 무공을 전수해주겠다. 그러니 영광으로 생각해라! 그 누구도 갖지 못했던,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이 천마님의 일인 전승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를 천마라고 소개한 노인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유세현을 향해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천(天)에서 비롯된 기가 혼원을(混元) 이루니...]

한 글자. 두 글자.

의미파악이 되지 않는 글자들이 빠르게 유세현의 머릿속에 들어와 박힌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에 따라 지(地)가 형성되노라.]

시간이 경과할수록 천마가 하는 말이 의미가 자연스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생전 처음해보는 경험.

이내, 천마가 모든 구결을 읊은 후였다.

[천마신공의 구결을 모두 익히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천마신공의 습득이 가능해집니다.]

[에픽 SSS Rank 스킬. 천마심법(天魔心法)을 승계 받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운용에 따라 마력의 대한 효율 및 제어력이 상승합니다.]

알림창의 등장과 함께 천마가 외쳤다.

[자! 빨리 전수받은 심법을 운용해라. 미련한 제자야!]

“......”

구결의 이해를 통해, 원리를 깨달은 유세현은 바로 천마심법을 운용했다.

패도적인 제어력을 가진 천마심법이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어둠의 마력을 하나 둘 제압해나간다.

[끌끌끌. 어떠냐 제자야 이제 좀 살만...]

천마는 자부심이 있던 만큼, 곧 마력이 완전히 제압될 것을 예상했다.

헌데 그때였다.

감히 잡혀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 마냥, 어둠의 마력에서 갑작스럽게 강한 반발력이 발생했다.

지켜보고 있던 천마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마심법의 제어력에 대항할 수 있는 마력이 있다니.

유세현의 내부에서는 끝나지 않는 팽팽한 줄다리기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까스로 유지되는 균형.

유세현은 곧장 생각을 달리했다.

제압이 아닌, 버티는 것으로!

그렇게 수십 분이 경과한 후였다.

폭주가 끝났는지 전신에 휘몰아치던 어둠의 마력이 서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유세현은 천마심법을 사용하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마력을 움직여봤다.

스르륵.

의지에 따라 미묘하게나마 변화를 보인다. 드디어 끝이 난 것이다.

유세현 쓰러져 있는 자세 그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천마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가 아니었다면, 폭주되는 마력을 제어하지 못해 전신이 그대로 터져 나갔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영감님.”

[예끼 이놈! 제자가 되기로 하지 않았느냐! 스승님이라고 불러라! 스승님!]

“...예. 스승님. 정말 감사합니다.”

노발대발 성을 내는 천마에게 말을 정정한 유세현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삐그덕거리는 뼈와 근육.

어둠의 마력에 의해 내부부터 폭사 된 육체는 그야말로 정상인 곳이 단 한군데도 없었지만, 그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뜯겨져나간 팔을 짚은 뒤 상처부위에 갔다대었다.

지이익.

아주 조금씩, 서서히 붙기 시작하는 육신.

덜덜 떨리는 다리를 굽혀 자리에 주저 않은 그가 천마를 향해 물었다.

“영감...아니, 스승님 이곳은 어디입니까? 어떻게 나가야 되죠?”

[그걸 알려 주기 전에 내 긴히 너에게 할 말이 있구나.]

“예. 말씀하세요.”

목숨을 구해준 늙은 노인의 말을 듣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유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엄한 표정이 된 천마가 나직이 말했다.

[우선 모를까봐 하는 말이다만, 본좌가 살고 있던 세계에선 제자가 스승의 세 가지 부탁을 들어주게 되어있다.]

“......”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너무도 뜬금없는 말.

허나, 갑작스런 사제관계 제의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유세현은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탁이시죠?”

[...별로 큰 부탁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첫째, 판도라로 가거든 신교의 부교주 장사월을 찾아내 처리해라. 둘째, 본좌를 노렸던 배후 세력을 알아내어 모조리 죽여라.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천마가 말하고자 하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복수를 해달라는 것!

의도를 이해할 수 없던 유세현이 천마의 말을 자르며 반문했다.

“저...그런 건 스승님이 직접 이곳에서 나가셔서 하시면 되시...”

[예끼! 누가 하늘같은 스승의 말을 자르라고 했느냐!]

“...예, 죄송합니다. 말씀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군대를 만기 제대한 유세현은 굳이 반문하지 않았다. 반문해봤자 어차피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거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천마가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그것은 세 번째 요구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미련한 제자야. 너는 아직도 본좌가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이더냐.]

“......”

갑작스럽게 찾아온 침묵.

세심하게 살핀 유세현은 천마의 육신이 마력만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천마의 입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제야 알아 챈 모양이구나. 그렇다. 본좌의 육신은 영혼구현술로 겉모습만 재현해낸 가짜 육신. 진짜 육체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지 오래다.]

천마가 옆으로 슬쩍 비키자,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시체가 보였다. 구현해 놓은 흑색도포의 색과 문양이 똑같은 것을 보니 저게 바로 그의 시체임이 분명하다.

불현듯 이를 으득 간 천마가 중얼거렸다.

[미리 파악하지 못한 본좌의 실책이었지. 설마 힘의 순리를 저버릴 줄이야...우선은 이것부터 이야기 해야겠구나.]

판도라로 넘어오기 전, 마교는 철저하게 힘의 순리를 따르는 곳이었다.

힘이 곧 서열이고, 제일 강한 자가 교의 교주가 된다.

그렇기에 교인들은 강해지기 위해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단일문파로서 최강이라는 자리를 얻게 된 이유도 이 때문.

그리고 이 힘의 순리는 판도라로 넘어온 뒤에도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판도라에는 그들이 수십 년간 수련을 쌓아야지만 익힐 수 있던 무위를 허무하게 무너트리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생존자들이 몬스터에게 빼앗아 얻은 그것.

[스킬]

운만 좋다면 대단한 능력을 별다른 노력 없이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교인들은 이를 알게 되자마자 비무를 빌미로 서로를 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그간 자신의 힘으로 강해져왔던 이들이 단번에 시스템에 종속된 것이다.

점점 줄어가는 교인.

허나, 그렇다고 해서 살아남은 교인들이 엄청 강해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운이 좋지 않으면 스킬은 나오지 않고, 코인은 떨어져봐야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그래서 천마는 비무를 하되 교인들끼리의 살상을 금지시키고, 대신 몬스터라고 불리 우는 괴물을 처단해 강해지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힘의 순리를 따르던 그들은 천마의 말을 잘 이행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완벽한 미를 지닌 여자. 중원의 경국지색이 울고 갈 붉은 머리칼이 돋보이는 세레나가 갑자기 나타나면서 부터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세레나라는 여자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이라는 사술을 사용했다.

극양지공을 익혀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화염을 발사하고, 음공의 극의 도달해야만 만들 수 있는 만년설화를 만들어 낸다.

검으로만 강해져온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문화충격.

아무리 천하절색이라지만 천마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비무.

결과는 무승부였다.

누군가 쓰러진 게 아니다. 단지, 결판이 나지 않았을 뿐.

결국 천마는 그녀를 내쫓을 수 없었고, 그녀는 마법을 알려준다는 핑계로 무공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후였다.

세레나가 무공과 마법의 교환을 권해왔다.

정확히는 천마의 무공.

천마는 거절했다.

스킬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비급을 완벽히 저술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으며, 교인들이 타인의 힘을 빌려 강해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포기했고 그렇게 얼마 뒤 반란이 일어났다.

이야기를 경청하던 유세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배후세력은 그 여자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노린 것은 그 무공이라고 불리는 스승님의 스킬일테고.”

천마가 불같이 화를 냈다.

[예끼! 스승의 말은 자르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

유세현은 그 모습을 보며, 천마가 배신당한 이유가 단지 무공 때문은 아닐 거라 판단했다.

헛기침을 한 천마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치욕스러운 일이다만 본좌는 그렇게 쫓겨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본래라면 상처를 수복한 뒤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끝까지 뒤따라온 친위대 4명이 동귀어진을 했기 때문.

[운이 없었지.]

아무튼 천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마력을 쥐어짜 영혼구현술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영혼구현술을 사용하자 외부와 격리 시키는 간섭공간이 2중으로 생겨났다.

첫째가 구덩이, 둘째가 더 안쪽에 위치한 이 새하얀 공간인 것이다.

[길었지...]

이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천마는 행여나 올지 모를 생존자들을 계속 기다렸다.

마땅한 자에게 모든 것을 전수해주고, 복수를 부탁하기 위해.

허나. 생존자들이 문지기로 보이는 뱀파이어에게 계속 힘없이 나가떨어지자 그도 지치기 시작했다.

이제 이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반년.

그는 사실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유세현이 뱀파이어를 쓰러트리고 이 장소에 이동된 것이다.

무척이나 처참한 상태로.

‘결국 누구든 상관없었다는 거군.’

유세현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눈매가 날카로이 변한 천마가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근엄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본좌가 네놈을 제자 삼은 것은, 단순히 네가 이곳에 기어들어왔기 때문은 아니다.]

유세현은 깜짝 놀랐다. 무심코 마왕 루시뷀트가 떠오른다.

천마가 말을 계속이었다.

[본좌는 줄곧 너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간섭 공간에 들어온 순간부터, 당하는 순간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유세현이 한 희생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놈은 그리 흔하지 않아. 아니, 스스로를 의협이라고 자칭하는 역겨운 정파의 개도 막상 위기가 닥치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지.]

그래서 천마는 그를 살리고 부탁하기로 결심했다.

[때문에 본래라면 더 사용하지도 못할 본좌의 모든 신공을 승계해주고 싶었지만...이제 그러기에는 힘이 부족하구나.]

“......”

말을 들은 유세현은 아쉬움에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쩝 다셨다.

천마심법이 에픽 SSS 랭크인만큼, 신공이라 말하고 있는 무공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너무 걱정 말거라 제자야. 구결을 전부 머릿속에 새겨두었으니, 본좌의 복수를 위해 나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모든 천마신공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말입니까? 그게 무슨...”

[비급을 남겨두고 왔다. 완전하지 않은, 본좌가 알려준 구결을 익히지 않은 자가 본다면 단순한 종이쪼가리에 불가한 비급을.]

< 희생과 기억 그리고...(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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