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74화 (74/612)

< 죽음의 협곡(3) >

처음부터 특수기를 사용했다면 단숨에 갈가리 찢겨져 없어졌을 인간.

어디까지나 다고베르가 순수한 육체능력으로 그들을 압박한 것은 단순한 여흥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반항하면 할수록, 처절한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희망이 부숴 졌을 때의 그 표정은 가히 상상도 못할 정도의 쾌감을 선사하기 때문이었다.

말초신경을 짜릿하게 만드는 자극.

헌데, 그런 장난감에게 상처를 입다니.

“용서할 수 없다!”

날이 잔뜩 벼려진 눈동자에서 진한 살기를 방출한 다고베르가 전방에 위치한 둘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정형화 된 수십 개의 피의 칼날이 두 사람을 덮친다.

쉬이익!

파공성이 들릴 정도의 빠르기!

허나, 이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입 꼬리는 되려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조차도 의도 되어있는 상황이었던 것!

‘걸렸다!’

적은 무려 80%의 스텟을 지닌 몬스터.

때문에 아무리 강한 이강호조차도 정석적인 방법으로는 상대하기 버겁다.

일격에 죽이기 위해서는 모든 마력을 집중시킨 화염을 쏟아내야 되는데 상대가 얌전히 맞아 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실패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전멸!

그래서 이강호는 뱀파이어의 성격을 이용해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오만함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뱀파이어가 스킬을 남발하도록 유도하여 체력을 갉아 먹도록 하는 것이다.

피를 매개체로 하여 스킬을 발동시키는 뱀파이어에게만 통용 되는 공략 법.

콰콰광!

재빨리 양 옆으로 분산하여 피의 칼날을 피한 이강호와 유세현이 다고베르를 중심으로 큰 원의 형태로 뛰며 목청껏 외쳤다.

“네놈의 실력은 고작 그 정도냐!”

“너무 허접해서 웃음 박에 안 나온다 짜샤!”

평소 두 사람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너무도 뻔히 보이는 도발이었지만, 잔뜩 흥분한 뱀파이어가 그런 것을 판단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다고베르에게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이런 미천한 미물 따위가!”

퍼버벙!

분노한 다고베르는 더욱 많은 피의 칼날을 날렸다.

유세현과 이강호는 이를 쳐내고, 피해가며 다시 다고베르를 향해 서서히 접근해갔다.

너무 떨어져서 피하기만 하면 적이 작전을 눈치 챌 수 있던 탓.

모든 것에는 강약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압!”

정면에서 파고든 이강호의 날카로운 창이 다고베르의 하체를, 뒤로 파고든 유세현의 검이 목을 노리는 순간이었다.

양옆으로 손을 펼친 다고베르가 피의 장막으로 각각 검과 창을 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격.

“블러드 쏜즈!”

날카로운 바늘처럼 빠르게 변환된 피의 장막이 두 사람을 향해 쏘아졌지만, 바늘은 그들의 몸에 닿을 수 없었다.

“아쿠아 쉴드!”

김주희가 어느새 소환한 운디네의 방어마법이 둘은 지킨 것!

“나이스 김주희!”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는 칭찬과 함께 몸을 회전시킨 유세현의 검이 다고베르의 하반신을 노렸다.

서걱.

얕지만 확실히 들어간 공격.

“이 자식들이!”

“어딜 보고 있는 거지?”

다고베르의 두 눈이 미처 유세현에게 돌아갈 틈도 없이 이강호의 미늘창이 옆구리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연계플레이.

공격 면적이 작은 인간형 몬스터를 상대로 합을 맞추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그럼에도 두 사람은 물 흐르듯 한 연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던 김주희 입이 살짝 벌어졌다.

‘대단해.’

마음 같아서는 그녀도 가까이 다가가서 도와주고 싶었다.

허나, 그녀의 스텟은 종합 35%.

때문에 전투 시작 전 이강호는 김주희에게 기습이 실패했을 시 원거리 보조 역할을 하라는 명령을 내려놨다.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는 그녀가 어설프게 도와주다가 행여나 흡혈이라도 당하게 되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창대를 꽉 쥔 김주희가 운디네를 향해 다부지게 말했다.

“운디네! 마력은 얼마를 써도 상관없으니까 두 사람을 꼭 지켜줘!”

“걱정 마! 너보다 잘 지킬 거니까!”

운디네는 이강호와 유세현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적재적소에 방어마법을 걸었다.

이번에도 공격스킬이 막힌 다고베르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김주희를 향했다.

완벽한 타이밍 마다 자꾸 회방을 놓으니 슬슬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까이도 다가오지 못하는 쓰레기 따위가!”

다고베르는 충격파를 내뿜었다.

정면으로 맞게 된다면 상당한 경직을 일으키게 되는 능력.

다고베르가 날파리같이 귀찮게 하는 김주희를 처리하기 위해 나아가려는 찰나였다.

슈우욱!

순식간에 옆에서 튀어나온 이강호가 앞길을 막아섰다.

다고베르는 손톱을 휘둘러 그를 밀어내려했다.

진심을 다해 공격한다면 힘이 약한 인간이 자신의 앞을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허나.

팅! 팅! 팅!

힘이 완전히 실리지 않는다.

다고베르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

눈앞의 인간은 자신의 공격을 완벽하게 흘려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런 능력도 사용하지 않은 채.

이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이 자식이 비켜라!”

악에 받친 그는 능력까지 사용하며 어떻게든 이강호를 밀어내려 했다. 허나, 결과는 번번한 실패.

되려, 시간이 지날수록 다고베르는 이강호와 유세현의 협공에 밀리기 시작했다.

피의칼날을 재차 발사하여 잠시 틈을 만든 다고베르의 눈동자가 잔잔히 흔들렸다.

섬뜩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능력의 남용으로 인해 체력과 마력이 상당히 떨어졌다는 것을 이제 와서야 느낀 것이다.

‘위험하다.’

어떻게든 더 늦기 전에 피를 빨아 수복해야 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밤의 귀족의 입이 흉측하게 쫙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본 이강호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힘든 싸움의 종지부가 슬슬 보이고 있는 것.

화르륵!

창대를 붙잡고 있는 이강호의 오른손이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올랐다.

끝내버리자는 일종의 신호였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유세현이 그간 아껴두고 있던 스킬을 발동시켰다.

‘흑암!’

솨와아.

시커먼 공간보다도 한층 더 새까만 안개가 주위를 감싼다.

한 순간에 오감을 잃어버린 다고베르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이건 설마?”

허나, 스스로 내뱉은 목소리조차도 들을 수 없었다.

다고베르는 재빨리 모든 능력을 방어로 돌렸다. 피로 구체를 만들어 몸을 감싸고, 외벽을 굳혀 적이 침입할 수 없게 만든다.

다고베르가 이 말도 안 되는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자신 또한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지만, 그것은 전력으로 움직인 저들도 마찬가지.

스텟의 차이가 있는 만큼, 온 힘을 다한다면 탈출의 가능성은 크다.

슈우욱!

흑암의 영역에서 빠져나와 시야가 돌아온 순간이었다.

오른쪽 주먹에서 화염을 내뿜고 있는 이강호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깜짝 놀란 다고베르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정도의 피지컬로 따라 붙다니? 그렇게나 자신이 지쳤었단 말인가.

화르륵!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는 화염이 다고베르를 향해 덮쳐왔다.

“큭!”

구체의 형태로는 막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그는 황급히 남아있는 피를 정면에 집중시켰다.

치이익!

불길에 닿기 무섭게 빠르게 승화 되어 사라져가는 피의 장막.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다고베르는 체면 불문하고 황급히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한차례 거친 호흡을 고른 이강호의 입에서 아쉬움이 터져 나왔다.

“츳.”

맞았다면 끝이었을 터인데.

허나, 그렇다고 해서 공격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좌표를 확인하고 있던 유세현이 치켜세우고 있던 손가락을 내렸다.

‘흑뢰.’

지지직!

콰과광!

모든 마력을 불어 넣은 새까만 갈래번개가 다고베르의 주위를 향해 떨어진다.

다고베르는 황급히 한 번 더 지면을 굴렀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끄아악!”

처음으로 울려 퍼지는 다고베르의 비명.

왼쪽 어깨를 제대로 적중당한 다고베르의 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세현은 검을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압박을 위해 계속 전력으로 움직인 것에 대한 부작용.

다고베르도 만만치 않지만, 두 사람의 상태도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스텟이 30%차이나는 상대를 마땅한 특수스킬 없이 이렇게 몰아붙인 것 자체가 신비한 일인 것!

양 방향으로 다고베르를 감싼 둘은 그의 육신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조금만 더 지속된다면 비로소 다고베르를 쓰러트릴 수 있다. 분명, 쓰러트릴 수 있을 터인데.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던 유세현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보름달처럼 커졌다.

구덩이 위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마력이 다수 포착 된다.

어둠의 마력이 아닌 일반 마력.

그리고 애매한 마력의 양.

“미친!”

일반 생존자들이란 것을 단번에 파악한 유세현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유세현은 김주희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김주희! 위에 있는 생존자들이 이곳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막아!”

“...예?”

전후사정을 다 뗀 설명에 김주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눈치 100단인 그녀는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계단을 향해 달려 나갔다.

올라가보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젠장.”

이강호의 입에서도 침음이 터져 나왔다.

그 또한 뒤늦게나마 흐름을 읽은 것이리라.

이렇게 되면 김주희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빨리 다고베르를 죽여야 한다.

허나.

“큭큭큭!”

방금 전까지 여유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던 다고베르가 조소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지성이 있고, 위기 상황인 만큼, 단번에 현 상황에 대해 이해를 한 것이다.

버티면 알아서 몸을 바쳐줄 쓰레기들이 온다는 것을.

부글부글.

공격을 위해 가시의 형태를 뛰고 있던 피가 시간을 버티기 위한 장막으로 바뀐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반전.

“큭큭큭 덤벼보시지? 나를 시간 안에 쓰러트릴 수 있을까?”

다고베르가 나직이 도발했다.

시간은 이제 더 이상 두 사람의 편이 아니었다.

* * *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올라간 김주희는 이곳에 들어온 생존자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인상을 찡그렸다.

모르는 타인이 아닌, 익히 그녀가 한번 만난 적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표상욱이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올렸다.

“오, 또 뵙게 되는군요.”

“......”

능구렁이 같은 남자.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루도 안 되어 이 협곡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 협상시도도 하지 않은 만큼, 표정을 얼른 핀 김주희가 장난스레 물었다.

“설마...뒤를 미행한 건 아니시죠?”

“하하. 그럴 리가요. 우연입니다 우연.”

“호호호. 그렇군요.”

이런 놈 때문에 두 사람의 계획이 틀어지다니.

김주희는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

‘어떻게 해야 될까.’

잠시 고심한 김주희의 머릿속에 약 2개의 방법이 떠올랐다.

첫째는 진솔한 대화.

내려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허나, 지금까지 버텨온 생존자들의 특징상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나 거머리 같은 저 남자라면 더더욱.

둘째는 폭력.

말 그대로 힘으로 막는다.

뱀파이어에게는 많이 밀린다지만, 그녀는 일반 생존자들 중에는 무척이나 탁월한 편이었으니까.

허나, 이것도 부작용은 있다.

바로 상대방이 자신을 구덩이로 떨어트리거나 무시해버리는 경우.

‘후...’

뭘 해도 마땅치가 않았지만, 김주희는 먼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볼 것을 마음먹었다.

남자를 꼬실 때나 쓰던 화사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이런데서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김주희에요.”

“표상욱입니다. 저도 다시 뵙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악수를 한 표상욱의 눈이 슬쩍 계단으로 향했다.

< 죽음의 협곡(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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