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73화 (73/612)

< 죽음의 협곡(2) >

김주희에게 새긴 증표를 뒤 쫓아 협곡에서 멈춰 선 표상욱은 도우미의 충고가 끝나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현재 협곡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까?”

“말씀드릴 수 없는 정보입니다.”

“...알겠습니다.”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표상욱의 눈은 이미 번뜩 빛나고 있었다.

이 부근에서 갑자기 표식이 사라져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협곡으로 들어갔다면 이치가 딱 맞는다.

‘아직 따라잡을 수 있어.’

그는 마음을 먹고 있던 만큼 곧바로 협곡으로 돌입하려 했지만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도우미의 충고를 들은 팀원의 일부가 진입할 것을 거절한 것이다.

결국, 표상욱은 설득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내어 대화의 장을 나눠야만했다.

“내부로 들어가면 분명 좋은 아이템과 스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 압니다. 알아요.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겠죠. 하지만 도우미가 말하길 이곳은 튜토리얼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험난한데 그냥 무작정 따라 들어가기엔 위험성이 너무 높아요.”

“...그 심정, 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불안하시겠죠. 하지만 지금까지 저를 믿어 주셨던 것처럼 한번만 더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한 행동 중...”

그리고 그렇게 표상욱 팀이 열띤 토론을 하는 사이.

유세현의 일행은 어느새 특이간섭지역 근처에 다다른 상태였다.

우두커니 서 있는 세 명의 눈앞으로, 벌집처럼 촘촘히 공간을 에워싸고 있는 소용돌이가 보였다.

만약 손을 댄다면, 단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

주위를 한번 쭉 둘러 함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강호는 곧장 내부로 돌입하려했다.

판도라에서 공간의 뒤틀림을 종종 경험한적 있던 그는 이 뒤에 별개의 장소가 있을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앞으로 발을 한걸음 내딛기 무섭게 유세현이 이강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너 이곳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며? 이 소용돌이 뭔 줄 알고 막 들어가려는 거야? 기다려봐.”

표현 때문에 생긴 자그만 한 오해였다.

이강호는 바로 오해를 풀 수도 있었지만, 어떻게 대처 하는지 볼겸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곧, 주위에 있던 큼지막한 돌덩이를 집은 유세현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내부를 향해 툭 던졌다.

슈우웅!

소용돌이와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며 단번에 모습을 감추는 돌덩이.

주위 사물을 이용하는, 지극히 정석적이면서도 안전한 확인 방법이었다.

돌덩이 두개를 추가로 던진 유세현이 턱을 짚었다.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는 모양.

이내, 옆에 죽어있는 대왕 흙두꺼비 하나를 되살린 유세현이 몬스터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지능이 낮은 만큼, 내려진 명령은 내부로 들어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빠져나오는 것.

길이 일방통행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다.

지켜보던 이강호의 입에서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정도면 그야말로 100점 만점에 100점.

안전하게 빠져나온 흙두꺼비의 전신 상태를 본 유세현이 비로소 이강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가자. 괜찮은 거 같네.”

“그래.”

스르륵.

흙 두꺼비를 선두로 세 명은 소용돌이를 향해 걸어들어 갔다.

환한 빛과 함께 순식간에 변화한 환경을 본 유세현의 입에서 마른침이 넘어갔다.

현재 그의 머릿속 한편에서는 도우미의 충고가 반복 되고 있었다.

튜토리얼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그 말.

즉, 이곳은 여태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험난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분명 높을 것이다.

찰나의 방심은 그야말로 죽음.

내부는 돔형의 형태로 면적 자체는 그리 넓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들의 바로 앞에 깊은 구덩이가 파여져 있다는 점.

내부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동그란 둘레를 따라 놓여 있는 계단을 확인한 유세현의 안면조직이 살짝 꿈틀거렸다.

발밑으로 아키몬드보다도 훨씬 높은 마력을 지닌 존재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길 수 있을까?’

유세현은 차분히 생각했다.

단순히 마력량만 높은 것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스텟까지 마력량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이야기는 단번에 역전된다.

“강호야 너도 느꼈지?”

“응.”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난 아무리 봐도 돌아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기다려 봐.”

유세현과 달리 적의 수준까지는 미처 파악 못한 이강호가 눈을 감고 감각을 집중시켰다.

번쩍 눈을 뜬 그가 중얼거렸다.

“대략 E랭크 80%정도네.”

느낀 감각을 수치화 시킨 것이었다.

유세현과 김주희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며칠 전 결투를 벌였던 이용석과의 스텟 차이가 그쯤이었기 때문.

유세현은 압도적인 우위로 이겼던 만큼, 그 30% 차이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강호야 역시 그냥 돌아...”

퇴각 쪽으로 마음을 완전히 굳힌 유세현이 만류하려던 찰나였다.

파앗!

이강호의 오른손에서 밝은 빛을 내뿜는 구체가 만들어졌다.

적이 보고 접근하면 어찌하려고!

“...야!”

“괜찮아. 안와.”

이강호는 화들짝 놀란 소리를 지른 유세현을 안심시켰다.

적이 공격을 해올 심산이었다면,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움직였을 게 분명하다.

즉, 적은 현재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강호는 곧장 구체를 구덩이 아래로 툭 던졌다.

구체에서 뿜어져 나온 밝은 빛이 곧 바닥을 환하게 드러냈다.

새까맣게 어두워서 그렇지 깊은 줄만 알았던 구덩이는 생각보다 얕았다.

이강호와 유세현, 김주희의 시선이 바닥 정중앙에 떡하니 홀로 놓여 있는 의문의 물체에 쏠렸다.

“저건?”

사람 크기 정도 되는 나무 관이었다.

이강호의 눈이 불현듯 번뜩 빛났다.

돌아오지 못한 생존자들, E랭크 80%에 육박하는 마력, 그리고 나무 관.

이 모든 것을 조합 한 이강호의 머릿속에는 이미 하나의 몬스터가 떠오르고 있었다.

자칭 밤의 귀족이자, 구름섬 4층의 일대를 다스리고 있는 지배자.

진혈의 뱀파이어.

평균 E랭크 70~80%에 육박하는 스텟을 지닌 이 몬스터는 다인 전에 매우 능하다.

갈취한 피를 마력과 체력으로 치환할 수 있는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는 덕이다.

어설픈 생존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

물량공세가 통하지 않는 적!

이렇게 되면 생존자들이 돌아오지 못 했던 게 너무도 당연해진다.

설명을 마친 이강호가 유세현을 향해 말했다.

“잡자.”

“...뭐? 평균 스텟이 80%라며?”

“응. 하지만 너와 내가 가진 스킬만 잘 활용한다면 충분히 해볼만해.”

“......”

유세현은 기가 막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수순을 잘 밟아 나가면 보스몬스터를 공략할 수 있었던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아누비스는 저항력이 무척 높았지만 공격이 세지 않고 물 속성에 약했다.

아키몬드 또한 높은 마력량에 비해 육체가 턱없이 약했다.

이처럼 지금까지 공략한 몬스터에는 무릇 약점이란 게 존재했다.

허나, 지금부터 이강호가 잡으려하는 이 뱀파이어란 몬스터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그렇다, 마치 마왕 루시뷀트처럼.

‘물론, 그보다는 뱀파이어라는 몬스터가 훨씬 약하겠지만...’

그럼에도 위험부담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

이강호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은 유세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생각해봐. 아무리 봐도 이건 쓸데없이 위험 부담성이 너무 커.”

“무조건 해야 해.”

허나, 이강호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무조건 이라고?”

“응.”

“......”

말이 끊긴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생존을 위해 강함을 추구했던 유세현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 강해져야만 하는 이강호.

이는 이강호가 모든 것을 밝히 지 않은 만큼, 언젠가는 한번 반드시 겪게 될 대립이었다.

이강호는 이제 털어 놔야 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대화를 해도 계속 같은자리만 맴돌 뿐, 더는 진척되지 않으리라.

이강호의 두 눈이 잔뜩 긴장해 있는 김주희를 향했다.

본래라면 튜토리얼 이후 다신 보지 않았을 여자.

약삭빠르기만 하던 그녀는 어느새 한 명, 아니 수 명의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본래라면 조금 더 본 뒤 데리고 다닐지 말지 판단하려 했지만, 그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강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후우...그래, 하자. 해! 한번 해보자고.”

한숨을 동반한 유세현의 외침이 공간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이강호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억지 같이 들리는 이 말을 들어주려 하다니.

이정도면 가히 맹목전인 신뢰라고 할 수있다.

“...진심이냐?”

“무조건 해야 된다면서?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니가 헛소리 할 놈도 아니고. 맘 바뀌기 전에 빨리 적 특성하고 계획이나 말해봐. 짜샤.”

퉁명스럽게 답한 유세현이 포켓에서 지금까지 고이 모셔두던 노멀 A랭크 레이피어를 꺼내 마검에게 흡수시켰다.

평소 행동으로 보건데 진심인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도 한번 느꼈던, 묘한 기분이 이강호의 전신을 감싼다.

이유도 듣지 않고 따라준 사람이 지금까지 누가 있을까.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하는 말 잘...”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이강호가 열띤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 *

끼이익.

유세현과 이강호가 관의 일정범위내로 들어가자 뚜껑이 저절로 개방되며 창백하도록 흰 피부를 지닌 남성이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듯 스르르 일어섰다.

중세귀족이나 입을 것처럼 보이는 고풍스러운 옷과, 펄럭이는 망토.

붉은 눈을 뜬 뱀파이어, 다고베르가 조소를 흘렸다.

“크크크. 정말 오랜만에 보는 손님이군. 나를 즐겁게 해줄 준비는 되었나?”

그간 그에게 있어 침입자라는 존재는 무료함을 달래주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이강호와 눈빛을 교환한 유세현이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단 한 번의 실수라도 허용하게 된다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팔을 쫙 뻗은 다고베르가 광기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 한 번 놀아볼까!”

샤샤삭!

지면에 동화되듯 다고베르의 육신이 왼쪽에 위치한 유세현을 향했다.

둘 중 누가 더 약한지 본능적으로 느낀 것!

허나, 이는 이강호와 유세현 또한 이미 예측하고 있던 바였다.

재빨리 암흑투기를 발동시킨 유세현이 뛰어오는 다고베르의 심장을, 옆에 위치해 있던 이강호가 머리를 노린 순간이었다.

움직임이 살짝 느려진 다고베르가 양손을 치켜세웠다.

치이익!

양손에 의해 식상할 정도로 쉽게 제압당한 창과 검.

힘이 어찌나 강한지 다고베르는 두 사람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크크크. 이 정도냐?”

그의 입에서 비릿한 조소가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

둘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저 구덩이의 위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지원군에게 눈치를 줄 뿐이다.

양손이 창과 검을 제압했다는 소리는, 반대로 말하자면 창과 검이 적의 양손을 봉인했다는 뜻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던 김주희의 창끝이 다고베르의 머리통을 노렸다.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무심코 고개를 다고베르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었다니!

깜짝 놀란 다고베르가 소리쳤다.

“피의 장막!”

부글부글

다고베르의 온몸에서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온 새빨간 피가 빠르게 고체화되어 막을 형성하며 창을 아슬아슬하게 튕겨냈다.

만약 김주희가 2초만 더 빨랐더라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데 성공했을 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행의 공격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것조차도 시선을 끌기위한 일환.

이강호의 오른손과 창에서 단번에 거친 불길이 치솟았다.

치이익!

“크윽! 이건!”

갑작스러운 발화공격에 다고베르가 재빨리 뒷걸음질을 치려했다.

뱀파이어의 속성저항력은 대부분이 E랭크 80%에 달하지만, 신성과 불에 대한 저항력만큼은 4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딜!”

하지만 이강호는 도망칠 틈을 주지 않았다.

되려, 온 힘을 주어 자세가 무너진 다고베르를 사선으로 베어 넘겼다.

촤아악!

재빠른 컨트롤로 불길을 거둔 후였기에, 일자로 잘려나간 생채기에서 피가 주르륵 새어나왔다.

다고베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섭거나, 두려워서 등의 이유가 아니다.

이는 밤의 귀족으로서 굉장한 치욕이었다.

“네...네놈드으을!”

< 죽음의 협곡(2) > 끝

ⓒ KingsRoa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