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5)
이 조건은 자신과 이강호에게도 결코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물적인 김주희가 해당이 될 것 같진 않았다.
허나.
“선배님 그 정령이라는 게 마음을 읽기라도 하나요?”
“아니. 그건 아닐걸.”
“행실을 본다는 거네요? 그럼 괜찮을 것 같은데요?”
김주희는 묘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정령을 속여 보겠다는 것인가.
유세현과 이강호의 시선이 동시에 교차했다.
‘밑져봐야 본전이지.’
어차피 사용하지도 못하는 아이템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는 법.
유세현은 김주희를 향해 반지를 내밀었다.
“히히. 선배님 웬만하면 직접 끼워주...”
“장난치면 안준다.”
“죄송합니닷!”
마음이 바뀔 새라 얼른 반지를 받아든 김주희가 재빨리 오른손 검지에 착용했다.
곧 스킬이 발동되자 몸 주위로 기하학 적인 문양이 나타나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한데 모여 점점 형상를 갖춰나가는 수증기.
이 모습이 신기한지 생존자들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물의 정령은 손목만한 크기에 여성의 형태를 띠고 있는 새삼 귀엽게 생긴 종족이었다.
손톱만큼 작은 눈을 뜬 운디네가 물었다.
[저는 물의 정령 운디네. 저를 부르신 분은 누구신가요?]
새삼 굉장히 고운 목소리였다.
인상을 순식간에 온화하게 바꾼 김주희가 재빨리 운디네의 발밑을 받쳐주며 천진난만한 여자아이의 모습을 연기했다.
“저에요! 제가 불렀어요.”
김주희는 살짝 폴짝폴짝 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세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말 대단하네...’
이용석과 이강호를 유혹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본 만큼, 그녀가 연기를 잘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다.
그녀가 하는 건 노력이 아니다.
김주희는 여우다. 그것도 완벽하게 타고난 천연여우.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온단 말인가.
[흠...]
그사이 운디네가 김주희의 몸 이곳저곳을 훑었다.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마치 여성이 다른 여성의 몸을 스캔하는 느낌을 자아냈다.
전부 살핀 운디네가 팔짱을 꼬았다.
[꽤 예쁘신 분이네요.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뭐죠?]
목소리에는 까탈스러움이 듬뿍 담겨있었다.
김주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허나, 이내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계약하고 싶어서요!”
[흠...난 당신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돌아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돌직구.
이강호와 유세현의 얼굴을 훑은 운디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듬직해 보이는 남자가 좋거든.]
“......”
정령의 말 앞에서 셋 모두, 아니 생존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눈 앞에 있는 물의 정령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특이 종이었다.
[아~ 이런 남자가 소환해줬다면 당장 계약 했을 텐데...하필이면 여자라니...]
유세현의 어깨에 올라탄 정령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김주희의 입가가 씰룩였다.
“호호호! 정령님 입장에서는 정말 안타까우시겠지만 이제는 불러낼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요. 저랑 계약을 하면...”
[그래? 아...아쉽네. 그래도 난 여자는 질색이라서 말이야. 그럼 안...]
정령은 칼같이 거부하고 단번에 떠나가려는 모습을 자아냈다. 김주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 두 분들을 매일 볼 수 있습니다! 같이 다니거든요!”
쫄래쫄래 날라 다니던 운디네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흠...그렇단 말이지. 그런거면 썩 나쁘진 않지만...아무리 봐도 나는 너 같은 성격은 좀 별로라...착한 스타일은 귀찮단 말이지. 뭐라고 툭 말하면 울기나 할 것 같고. 아오! 생각만 해도 짜증나네. 왜 내 친구들은 이런 애들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아무튼 난 그런 거 정말 못 보는 스타일이야.]
정령이 중얼거렸다.
김주희의 인상이 확 돌변했다.
“아, 그래? 그런 거면 진작 좀 말하지. 연기하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잖아.”
말투도 어느새 반말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되려 정령의 표정이 굳었다.
[...너 뭐야?]
“보면 몰라? 사람이잖아.”
[...원래 이런 성격이었어? 행여나 나한테 맞추기 위해 애써서 연기하는 거라면 좋은 꼴 못 보기 전에 지금이라도...]
“말 제대로 못 들었어? 연기는 방금 전에 했던 거라고. 난 원래부터 이런 성격 이였어. 너희 종족 원래부터 착한 애들 좋아한다며?”
[노, 노린거야?]
“그래. 그러니깐 그랬지. 그보다 계약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선배님들 기다리는 거 안보여? 그리고 너 이거 계약 안하면 다른데 갈 수나 있냐? 너 소환한 이 아이템도 얼마나 힘들게 얻은 건데.”
김주희가 거칠게 몰아쳤다.
운디네는 차분히 턱을 괬다.
[...흠. 하긴 요새는 세상이 흉흉해졌는지 마땅한 소환자도 보기 힘들어졌지...너 지금 성격이 진짜 성격 맞지?]
“그런데?”
[그렇다면야 뭐. 까짓 거 계약하자. 이분들하고 같이 다니는 거 진짜지?]
“그럼 진짜지.”
[못 믿겠는데...]
“그럼, 선배님들께 네가 직접 물어보던가.”
몇 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서로 성격이 비슷해서 그런지 둘은 죽이 척척 맞아 돌아갔다.
운디네가 유세현을 향해 물었다.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인가요?]
“...어, 어 그래 맞아.”
빛보다 빠르게 돌변하는 운디네의 표정은 아직까지 적응이 잘 되지 않았지만, 유세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디네가 신이나 이강호와 유세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하하! 좋아! 좋아! 그럼 계약하자 계약해!]
“진작 그럴 것이지. 계약이란 거는 어떻게 하는 건데?”
[아! 그건 말이야? 여자랑은 더러워서 하기 싫었던 건데 에라이...]
“엇!”
쪼르르 날아온 운디네가 김주희의 입술에 자신의 자그만 한 입을 맞췄다.
주위를 뒤덮고 있던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점점 작아지며 김주희의 왼쪽 쇄골에 스며들었다.
계약이 성사 된 것.
운디네는 김주희와의 입맞춤이 기분 나빴는지 땅에 침을 한번 뱉은 뒤 자연스럽게 유세현의 어깨에가 앉았다.
정령이 유세현을 향해 속삭였다.
[우리 인간 오빠는 어떤 스타일 좋아해? 글래머? 아니면 귀여운 스타일? 나 형태변환 가능하거든! 말 만 해봐!]
“아...”
타인이 듣기에는 달콤한 속삼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유세현에게는 그저 정신이 사나울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마왕성. 즉 적진이다.
지금이야 몬스터를 잡은 직후라지만,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좀 더 긴장할 필요성이 있었다.
유세현은 김주희를 향해 눈치를 보냈다.
웃으며 다가온 김주희가 손을 뻗어 정령을 붙잡았다.
“야, 너 운디네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보다 이거 안 놔? 어디서...]
“너 지금은 쓸모없으니깐. 일단 내가 부를 때까지 들어가 있어.”
[뭐? 이제 막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싫어!]
“호호. 너의 의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그럼 잘 가~”
[뭐? 잘 가? 야! 이 망할 계집...]
이윽고 재잘거리던 정령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김주희의 표정이 다시 확 바뀌었다.
이번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배님! 계약 성공했어요! 연기 잘했죠?”
“어, 어 그래 잘했어...”
이제는 도대체 어느 부분이 연기이고 어느 게 진심으로 전혀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들은 일단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주위를 살피자 정면과 우측으로 2가지의 갈림길이 열려있었다.
정면은 당연히 성위로 올라가는 길이었고, 좌측은 성 아래로 계단이 나있었다.
유세현과 이강호의 시선이 동시에 교차했다.
여기서 아래로 나려간다면 남태영이 붙잡혀 있는 지하 감옥이 나올 것이다.
문제는 생존자들.
그들의 힘을 본 이상 안전을 위해 억지로라도 따라올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을 사전에 배제해야만 한다.
“길이 나뉘는 군요.”
“흠...그렇군요.”
“그럼 이쯤에서 갈라지죠.”
“예?”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생존자들의 입에서 당혹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유세현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희는 처음부터 등장하는 몬스터를 혼자서 전부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예. 그렇긴 한데 그게 같이 안 가는 것과 무슨...”
“외길이었기 때문에 양보했다는 뜻이군요.”
눈치가 빠른 김주환이 한 생존자의 말을 끊으며 껴들었다.
유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외길이었기 때문에 몬스터를 양보한 것 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길이 나뉘죠.”
“...아.”
너무 강한 셋 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나, 생존자들 또한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이곳을 돌파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세현이 굳이 말을 덧붙이지 하지 않아도 말뜻을 이해했다.
“갈라지죠.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저희가 수가 적으니 우선 지하로 가겠습니다. 만약, 길이 끊겨있다면 추후 따라서 올라 가겠습니다.”
“그럼,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처럼.”
“알겠습니다.”
“아쉽구만...”
중사 정동호가 입맛을 쩝 다셨다.
이윽고 생존자 집단이 계단 위로 사라졌다. 이강호는 유세현을 향해 쓰윽 엄치를 치켜세웠다.
이것으로 남태영과 먼저 조우하는 것은 자신들.
일은 차근차근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 * *
넓디 넌 지하 감금소에서 조우하게 된, 개의 형태를 띠고 있는 마수들은 1층의 마기병보다도 강했다.
허나, 지금 유세현의 앞에 선 마수들은 짖기만 할뿐 좀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시험 삼아 발동시킨 암흑투기.
사용마력이 어둠의 마력이 아닌지라 상당한 제약이 걸려있음에도 효과는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서걱.
유세현과 이강호, 김주희는 움직이지 못하는 마수들을 순식간에 베었다.
“와...이 스킬 장난 아닌데요? 선배?”
“그러게...”
당사자인 유세현도 떨떠름했다.
이 스킬의 장점은 단순히 적의 심신을 제압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프로즌 디퓨전과 다르게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피아를 식별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암흑투기의 진정한 장점이었다.
‘아쉬운 게 있자면 마력을 장난 아니게 갉아 먹는다는 건가.’
고작 3분을 유지하는데 가지고 있던 마력을 전부 소진했다.
그러니 암흑투기를 유지하며 싸운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셈.
적을 한 번에 제압될 필요성이 있는 순간이나, 찰나의 틈을 만들 용도로 사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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