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6)
“선배님 저도 한번 익힌 스킬 사용해볼게요.”
또 다른 마수가 나타나자 이번에는 김주희가 앞으로 나섰다.
“나와라 운디네!”
물이 형태를 잡아가며 곧 운디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주희가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야! 너 힘 좀 써봐!”
[내가 왜 지 맘대로 하는 계약자를 도와줘야 되지?]
하지만 이전 당했던 것이 억울한지 운디네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나, 이는 이미 김주희도 예상한 상황.
김주희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사람이나 정령이나 결국 필요한 건 보상이다.
“저놈들을 처리하면 그때부터 5분. 딱 5분 동안 마력을 더 유지시켜 줄게.”
[5분? 고작 그걸로 날 움직이겠다는 거야?]
“...고작 5분이라니? 내 마력을 지금도 계속 먹고 있으면서 내 마력의 총량도 몰라? 고작 40분정도 밖에 유지 못한다고! 위험한일 생겼을때 못 부르면 너가 책임질거야?”
[그럼, 10분으로 하자.]
“6분”
[9분.]
“7분 더 이상은 나도 양보 못해.”
[으~이 망할 계집애가...]
잠시 동안 두 사람, 아니 정령과 김주희 간에 대치가 이루어졌다.
허나, 어디까지나 아쉬운 것은 계약한 정령이었다.
막상 한 번 계약을 맺게 되면, 계약자가 죽어 파기 될 때까지 이중계약은 할 수 없었으니까.
[쳇! 그래 7분. 약속 꼭 지켜라. 안 그러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두 번 다시 안 도와 줄거니깐. 나한다면 하는 성격이야.]
“걱정하지 마. 약속은 지키니까. 너야 말로 입만 산 건 아니지?”
[흥! 빌어먹을 계집애. 한 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가만히 보고나 있어!]
김주희의 도발에 운디네가 손가락을 튕겼다.
주위에 있던 수증기가 공명하며 점점 소용돌이치며 커다란 원을 만들어 나갔다.
[아쿠아 볼.]
아주 단순한 영창에 불과했지만 그 파괴력은 무시할 바가 못 됐다.
씌워져 있는 막을 통과해 폭풍 같은 내부 물길에 휩쓸린 마수 3마리의 몸이 대번에 바닥에 쳐 박혔다.
하급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정령인 만큼 약할 줄만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김주희의 말을 잘 들어준다면 앞으로 상당한 전력이 되리라.
[저 잘했죠?]
마수의 죽음을 확인한 운디네가 빙그르르 날아 유세현의 어깨에 착지했다.
“...그래.”
[좀 더 칭찬해주세요~]
운디네는 몸을 으쓱 거리며 앙탈을 부렸다.
만약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흐뭇한 아빠미소를 보여 주었겠지만 유세현에게는 부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고심하던 유세현이 은근슬쩍 말을 툭 내뱉었다.
“난 참고로 조신한 스타일을 좋아해.”
[아, 그래요? 미리 말을 하시지~저 그런 것도 잘해요~]
그 후 운디네는 유세현의 어깨에 앉아 발만 투덕일 뿐 얌전한 모습을 보이다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일행은 계속해서 커다란 지하 감옥을 샅샅이 뒤지며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를 나아갔을까.
이윽고 지하 4층에서 철장에 갇혀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때? 맞는 거 같아?”
“그래.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거 같다.”
이리저리 난잡하게 헤집어진 기다란 머리칼과 넝마쪽이 되어있는 도포.
그 사이로 드러나 있는 흉터.
인기척을 느꼈는지 푹 숙여있던 남태영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사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오오...나 말고도 이 성에 들어온 사람이 있을 줄이야...혹시 의(義)를 행하시는 분들이라면 저를 이곳에서 구해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남해태양궁의 남태영이라고 합니다.”
평소 행(行)을 중요시하는 남태영의 목소리는 현대의 생존자들과는 달리 굉장히 진중하면서도 무거웠다.
이강호는 더 들을 새도 없이 곧장 철문을 자르고 포박을 풀었다.
풀려난 남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곧장 포권을 취했다.
“이런 곳에서 의협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은공님.”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죠.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이곳에 잡혀있던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강호는 차분히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안색이 굳어진 남태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후...말씀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제 연인을 마왕에게 빼앗겼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그래서 저는 이곳에 그녀를 되찾기 위해 단신으로 쳐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적의 군세가 너무도 강해서 이렇게...”
굳게 쥔 남태영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미 짜여있는 각본에 불과했지만, 표정과 행동에서 들끓는 분노를 애써 참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또 구하러 갈 겁니까?”
“예. 연인도 지키지 못한 지금 비록 무인이라 할 수도 없으나.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서라면 저 군세를 향해 몇 번이고 도전할 것입니다.”
남태영의 눈은 태양심법을 지닌 사람답게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를 보며 이강호는 어떻게 해야 될 지 망설였다.
먼저 도와준다고 하면 태양심법을 승계 받을 수 잇을 것인가.
아니면 그가 먼저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가.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갑자기 고개를 꾸벅 숙인 남태영이 그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은공님! 만약 이 성을 계속 올라갈 생각이시라면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
“구해주신 마당에 염치없는 말인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저의 힘만으로는 대적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도와주신다면 남해태양궁의 차기 궁주의 자리를 걸고 제가 보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드리겠습니다.”
흔히 무림인이라고 하는 족속들은 자존심 살고 자존심에 죽는 만큼 고개를 정말 웬만해선 숙이지 않는다.
특히나 앞으로 한 문파를 이끌 재목이 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남태영이 비록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라도 할지언정, 이런 행동은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부탁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강호의 입 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물론. 그런 일이라면 같은 생존자로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오오!”
“혹시 연인분이 어디에 잡혀있는지 아십니까?”
“예. 최상층에 위치한 마왕의 방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이곳을 빠져나가 1층에 도달한다면 3층까지는 빨리 올라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바로 가죠.”
이강호가 선두에 섰다.
이제 구출 하는 일만 남은 것.
그들은 곧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빠르게 성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군주시어 적군이 성 내부로 침입했습니다.”
악마의 전언에 옥좌에 앉아있던 루시뷀트가 서서히 눈을 떴다.
곧 붉은 안광이 내부를 훑었다.
무릎을 꿇은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상급 마기병들과 악마.
루시뷀트를 올려다보는 그들의 눈에는 충성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살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흔쾌히 따를 충직한 부하들.
허나, 그들을 바라보는 루시뷀트의 눈은 공허하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 두 번 다시 나를 깨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대장군이 당했습니다.”
“레오릭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레오릭은 이 성에 있는 마왕 군중에서도 최고 강한 마물이다.
본래라면 이곳과 백화수에게 가는 마지막 길목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그럼에도 그렇게 강한 레오릭을 처음부터 배치 시켰던 것은 루시뷀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무수히 많은 시간을 거듭해가며 그는 스스로 깨달았다.
자신이 어디가에 존재하는 진짜 마왕의 복제라는 것을.
제한 되어있던 권능이 되살아나고, 타인에 의해 프로그램 된 인격이 아닌 제대로 된 인격을 갖게 되었다.
마왕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깨고, 죽이면 다시 잠이 드는 반복되는 창조물의 의지에서 벗어나려 했다.
허나 어떻게 해도 창조물의 의지에는 거역할 수 없었다.
허울만 마왕이지 당장에 성 문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 몸.
대륙에 현신하여 광기어린 무력으로 모든 이를 공포로 이끌었던 기억 또한 자신의 기억이 아니다.
또한 본래의 레오릭은 이렇게 허약하지 않다.
악마들도 그러하다.
자연스레 분노가 들끓었다.
그는 모든 마족들의 왕. 마왕이라는 직책에 걸맞지 않게 직접 나서 나약한 침입자들을 무자비 죽였다.
허나, 그것도 얼마 안가 질렸다.
되려, 생존자를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그리고 결코 가질 수 없는 자유는 점점 루시뷀트를 지치게 만들었다.
생존자들이 들어올 때 마다 기억이 리셋 되어 매일같이 으르렁대며 성을 휩쓰는 남태영과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끌려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인간계집.
자신 또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편했을 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명을 내려주십시오!”
“...침입자의 모습을 비춰봐라.”
루시뷀트의 말과 동시에 두개의 창이 허공에 나타났다.
왼쪽은 무서운 기세로 마물을 죽이며 치고 올라오고 있는 생존자 집단이었고. 오른쪽은 남태영을 구출한데 성공한 유세현 일행이었다.
“둘로 갈렸군. 이중에서 레오릭을 죽인 자가 누구냐.”
“남태영의 옆에 위치해 있는 키가 제일 큰 남자입니다.”
악마의 말에 루시뷀트의 붉은 안광이 유세현을 지긋이 향했다.
그는 한동안 유세현을 바라봤다.
루시뷀트가 중얼거렸다.
“그래, 평생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끝을 내는 것도 괜찮겠지.”
마왕은 초월적인 존재인 만큼 지금 이 상황을 끝내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남태영이 백화수를 구출하는데 성공한다면 자신 또한 자연스레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레오릭을 처리한 저 남자라면 자신을 제외한 남은 모든 마족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여흥.
루시뷀트가 손을 뻗었다.
“전군! 각자의 위치를 고수해라. 침입자들이 도착하면 철저하게 박살내라. 목숨을 쏟아 부어 적에게 마왕군의 공포를 각인 시켜라.”
“명!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받아들은 소 악마들과 마기병들은 순식간에 문밖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루시뷀트는 눈을 감았다.
집착할 때는 그렇게 머릿속을 휘젓던 고뇌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단번에 가라앉았다.
트드득!
곧 루시뷀트의 의지에 따라 입구의 위치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왕성의 최상층에서 함정이 가득한 최하층의 중심으로.
이것으로 그들이 지금까지처럼 조심만 한다면 자신과 조우하는 일은 없을 터.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잠을 청했다.
이제 두 번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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