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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54)화 (54/200)

54화

베를린 슈테글리츠의 세계 해킹 대회장.

이미 우승을 결정 지은 백인 소녀 건너편에, 정우현이 자리에 앉았다.

정우현의 정중한 요청에 소녀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Nein, nein! (안 돼요, 안 돼!)”

하지만 이내 콧수염이 난 40대의 독일 남성이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말했다.

“더 이상은 안 돼요!”

그는 이번 해킹 대회의 집행 위원장이었다.

“한 번은 깜짝 이벤트로 여긴다 해도, 두 번은 안 됩니다! 우리 대회가 무슨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하는데 사람들이 웅성댔다.

심지어 백인 소녀가 순식간에 성인 남성을 압도하며 우승을 차지했을 때보다도 더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대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드디어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정우현을 알아본 것이다.

사실 할리우드에서의 촬영 후 시간이 꽤 흘러, 정우현은 영화 속 모습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우선 키가 훌쩍 크고, 훨씬 의젓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일찍이 브래드 퍼트가 건네준 풋볼팀 모자를, 이곳 독일에서도 푹 눌러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우현의 얼굴을 기억하는 독일 팬들이, 모습을 주의 깊게 보고 마침내 그를 알아본 것이다.

“…저 아이, 정우현이야!”

“…뭐?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소년왕?”

“맞아, 맞다고! 내 눈이 틀림없어!”

그러고서 사람들이 정우현에게 더 몰려들었다.

행사 안전 요원들이 정우현 곁에 가까이 오는 사람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 즉 정우현은 물론 권유라의 경호원들까지 해서 총 세 명이 정우현 곁을 지키며 꼿꼿이 섰지만, 이는 사람들의 추측을 더욱 가중시키기만 했다.

“봐 봐! 지금 보디가드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잖아!”

“맞아! 그냥 아시아의 작은 소년인데, 이렇게나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역시 정우현밖에 없어!”

“난 알아, 그를 안다고! 정우현의 얼굴이 맞아!”

급기야 사람들이 더욱더 접근하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어떡해, 우현아?”

권유라가 뒤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음….”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여기 와서….”

그녀가 고개를 떨구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우현아! 우리 얼른 가자. 그냥 가자! 내 소원대로 해킹 대회에 참석했고, 또 비록 졌지만 우승자랑 시합도 해 봤잖아. 그러니까 얼른 가자!”

하는데 순간 정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정우현이 뒤로 돌아 권유라를 보고 말했다.

“아니야, 유라야. 사실 나도 여기 오고 싶었어. 그리고 이렇게 막상 오니까, 좋아. 진짜 좋고 재밌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하고서 푹 눌러 쓴 모자를 단숨에 벗어 버렸다.

“오오오오오오오!”

그러자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정우현이다!”

“거 봐, 내 말 맞지! 한국의 정우현이라고!”

“아니, 정우현이 왜 여기에!”

하며 더욱더 소란스러워진 가운데 정우현이 아예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Hallo, Berliner! Ich bin Jung Woohyun! (안녕하십니까, 베를린 시민 여러분! 저는 정우현입니다!)”

우뚝 선 채 드디어 자신을 소개하는 정우현의 모습에, 사람들이 이제는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 내고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하더니 그의 이름을 연달아 외쳤다.

“정우현! 정우현! 정우현!”

<인크레더블 킹 보이> 상영 후 시간이 꽤 흘렀지만, 베를린에서도 그의 인기는 여전했던 것이다.

실상 이러기까지 지난날 브래드와 함께했던 유럽 홍보회 중, 그가 베를린에서도 사람들 앞에 섰던 게 한몫했다. 당시 그는 유창한 독일어로, 베를린에서도 물론 큰 화제가 되며 인기몰이를 했었다.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우현이 다시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정우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목소리를 다소 낮췄다.

“갑작스럽지만, 이렇게 인사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지금 이곳 아름다운 도시 베를린을 포함해,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 단체로 온 여행이죠!”

정우현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다만 아까보다는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

그들 중 정우현이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약 1년여 전, 정우현이 학교 과제 수행의 일환으로 인류의 수학적 난제를 해결했음을 그들 역시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알아요, 우현 군!”

이에 정우현의 말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당신은 위대한 수학자이기도 하잖아요!”

“맞아, 정우현은 천재야!”

그러고서는 다시 연달아 외치기 시작했다.

“천재! 천재! 천재!”

정우현이 사람들의 함성에 허리를 숙여 보이며 한국식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하고 고개를 돌려,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잠자코 앉아 있는 백인 소녀를 바라봤다.

“저는 지금부터, 저 앞에 있는 위대한 해킹 챔피언과 실력을 겨뤄 볼 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시합이 끝날 때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그러고서 그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정우현의 말을 알아듣고 뒤로 몇 발치 물러나며 말했다.

“와우! 정우현이 챔피언 소녀와 대결을 한다고?”

“위대한 수학자와 세계 해킹 챔피언과의 빅 매치인 거야?”

이곳 해킹 대회를 실황으로 구경하기 위해 참석한 사람들은 물론 컴퓨터 및 해킹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단순히 독일뿐만 아니라 인근 유럽, 나아가 북미에서도 오로지 이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한데 이미 십 대의 어린 백인 소녀가 성인들을 모두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 것만으로 엄청났는데, 무려 한국의 정우현이, 그러니까 글로벌 스타이자 수학의 난제를 해결한 위대한 수학자가 챔피언 소녀와 대결을 한다니 빅 매치도 이런 빅 매치가 없었다.

결승전을 뛰어넘는 것은 물론, 컴퓨터나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조차 관심을 가질 경기가 될 것이 확실했다.

무려 정우현이라는 세계적 유명 인사가 시합을 펼치니까.

사람들이 이내 완전히 뒤로 물러나 다시 대회장에 공간이 확보됐다.

그러고는 얼른 시합을 시작하라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대회 스태프가 집행 위원장을 보고 말했다.

“…정우현이랍니다, 위원장님.”

“…세상에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심지어 챔피언과 시합을 하고 싶다네요, 어떻게 할까요?”

불과 아까 전까지 두 번째 번외 경기는 강력히 반대했던 위원장이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몰라서 물어? 당연히 속행해야지! 얼른 준비해!”

푸앵카레 추측을 입증한 정우현과 세계 해킹 챔피언 소녀의 대결. 이보다 더 대회를 흥행시킬 수 있는 매치는 없었기에 위원장이 마음을 바꾸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현아, 이길 수 있겠어?”

뒤에 서 있는 권유라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지지 않아!”

정우현이 자신 있게 말했다.

“유라, 너를 위해서라도!”

사실 정우현은 권유라를 따라 참석한 해킹 대회가 물론 흥미롭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나서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면서까지 애써 경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물론 우승자인 소녀의 실력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시합을 결심한 이유는, 역시 친구 권유라 때문이었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온 해킹 대회에서 운이 좋게도 우승자와 대결을 할 기회를 갖게 됐다. 한데 결과는 참패, 그야말로 완벽한 참패라서 그녀의 기가 완전히 꺾이게 됐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마당에 이참에, 우승한 소녀와 해킹 실력을 겨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성사된 세기의 빅 매치.

정우현은 물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 최초로 CIA 내부망을 해킹한 어나니머스 즉 세계 최고의 해커다.

그리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소녀는 공식적으로 이번 세계 해킹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역시나 세계 최고의 해커로 인정받았다.

“….”

소녀는 말없이 정우현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봤다.

시합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듯.

심지어 그녀는, 자신에게 대결을 청한 동양의 소년이 세계적 배우이자 위대한 수학자임을 알고 나서도 좀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만큼 자기 관리가 뛰어났던 것이다.

사실 챔피언 소녀는 올해 13살이다. 즉 참가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이 대회에 참여해 우승했다.

그리고 아직 사람들이 잘 몰랐지만, 챔피언 소녀는 3년 전, 즉 1999년 10살 즉 현재 정우현의 나이일 때 국제 수학 경시 대회에 참석해 만점을 받아 금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즉 그녀 역시 엄청난 천재였다.

한마디로 최고 대 최고, 천재 대 천재의 대결이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더군다나 집행 위원장은 이 세기의 빅 매치를 위해 오랫동안 아껴 뒀던 문제까지 채택했다.

내년 세계 해킹 대회의 개최국은 IT에서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 즉 내년 대회는 올해보다 더한 흥행이 기대됐기에, 그때의 결승전을 위해 간직했던 문제를 하나 쓰기로 결정했다. 물론 올해에 출제된 그 어떤 문제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이윽고 시합이 시작됐다.

타다다다닥.

우승한 소녀가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빠르게 해킹을 시작했다. 누가 보면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잠자코 영상을 보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정우현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그는, 슬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컴퓨터 게임보다 더 재미있는 해킹을, 그것도 어떤 압박감 없이 모처럼 잔뜩 할 수 있게 되니 무진장 재미있었던 것이다.

실상 9.11 테러를 막기 위해 CIA 내부망을 해킹했을 때는, 이와 같은 재미까지 느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해킹으로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뭇 긴장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야말로 이 순간은 해커들을 위한 축제이자 놀이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 축제를 누구보다 즐기고 있는 해커 즉 어나니머스였다.

다만 이번에는 CIA 내부망을 침투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킹을 진행했다. 같은 방식을 사용하다가는 어나니머스가 자신임을, 행여 누군가가 눈치챌까 우려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다가는, 스태프가 갑작스럽게 외쳤다.

“대결 종료!”

“….”

사람들은 스태프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시선을 빨리 돌렸다.

정우현과 우승한 소녀, 둘 다 여전히 컴퓨터에서 손을 떼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우현 군 승!”

“…와아아아아아아아!”

이내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처음으로, 백인 소녀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는 듯, 쓰라린 패배에 미간을 찌푸린 것이다.

하지만 이내 정우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녀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재차 정중하게 말했다.

“도전을 받아 주셔서,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고서는 겸손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어쩌다가 한 번, 운이 좋아서 이겼을 뿐입니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변함없이 당신이며, 당신이야말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실례가 안 된다면….”

하는데 우승한 소녀가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나, 한순간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대회장을 떠나 버린 것이다.

“우현아아아아!”

소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말고 할 것 없이, 뒤에서 무진장 밝은 목소리로 정우현을 부르며 와락 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친구 권유라였다.

“대애애애애애애박!”

“…하하하….”

“어쩜 그렇게 순식간에 이긴 거야? 그것도 우승자를!”

“…운이 좋았어, 하하.”

“역시 너는 짱이야, 짱!”

하고서 그녀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나도 아까 그 애랑 붙어 봤지만! 진짜 장난 아니던데! 근데 네가 그 애보다 훨씬 더 잘한다는 거잖아!”

“하하하.”

정우현은 시합에서 이긴 자기보다 정작 훨씬 신난 친구를 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권유라는 급기야 단순히 기쁨을 넘어 거의 감격하며 말을 이었다.

“아아, 정우현! 내가 너의 친구라서 기뻐. …그리고 정말 고마워!”

그녀 역시 이번 승리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우현이 그냥 이기고 싶어서 이긴 게 아니라, 패배한 자신을 위해 일종의 설욕전을 치러 이겨 냈음을.

“하하, 됐어. 만약 같은 상황이었으면 너도 분명 나처럼 행동했을 테니까.”

“으음….”

권유라가 잠깐 생각했다. 만약 정우현이 먼저 도전했는데 졌다면, 분명 그의 말대로 자신도 친구인 그를 위해 어떻게든 설욕전에 나섰을 게 당연했다.

“맞아, 맞아, 하하하하!”

그런 생각에 이르자 다시 환히 웃는 권유라다.

“잘했습니다, 도련님.”

옆에서 잠자코 있던 엄규환도 정우현을 보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역시 대단하군요.”

“그래요, 정말… 놀랍군요.”

그러고서는 권유라의 경호원들도 그를 마구 칭찬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에 정우현이 한껏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이로써 이 대회 및 축제가 끝이 난 게 아니었다.

잠자코 세기의 빅 매치를 관전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정우현의 이름을 다시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정우현! 정우현! 정우현!”

실상 내심 소녀가 이길 거라고 예상하며 그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하나가 되어 정우현의 이름을 부르고 열광했다.

“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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