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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53)화 (53/200)

53화

이런저런 일을 겪는 가운데 특허를 출원하기까지, 권유라의 공동 명의 제안을 끝까지 거절하는 것은 괜한 고집이라고 정우현이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녀의 뜻대로 자신의 이름도 올렸다.

그러는 게 모두에게 이로우리라 판단하기도 했다.

* * *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는 세계 축구 대회가 개최됐다.

이에 한국 영재 학교의 학생들 또한 모처럼 축구 대회로 들떴다. 한국에서의 개최도 개최지만, 무려 한국 국가대표가 토너먼트에 진출한 것이다. 세계 대항전에만 나가면 유럽 및 남미의 강팀을 맞아 오랫동안 약한 모습을 보이던 대표팀이 무려 토너먼트에 진출했으니 더 흥분할 만했다.

“와, 우현아! 어제 축구 봤어?”

구태호가 학교에서 정우현을 보고 말했다.

이탈리아전을 말하는 것이다.

“응, 봤지.”

“진짜 대박이다! 한국이 8강에 진출하다니!”

“준결승까지 갈 거야.”

“…뭐?”

구태호가 놀라며 되물었다.

정우현은 아차 싶었다. 별다른 생각 않고 전생에서의 일을 그대로 말해 버렸으니.

“…준결승을 간다고? 우리나라가?”

“…아, 하하하! 응! 준결승까지 갔으면 좋겠다는 거지! 엄청 잘하잖아, 우리나라! 개최국이기도 하고!”

하고 애써 둘러댔다.

그러자 구태호가 크게 외쳤다.

“…음, 그건 그래. 맞아! 꼭 4강, 아니, 결승전, 아니! 우승까지 하면 좋겠다!”

며칠 후 다시 KGI 교실 안.

“와아, 우현아!”

다시 구태호였다.

어제저녁 한국이 8강에서 스페인을 이기고 4강 진출을 확정 지은 것이다.

“진짜, 대박이야! 네 말대로 진짜 준결승에 진출했잖아!”

“…아, 하하하. 그러게, 잘됐다!”

“응! 이 기세로 진짜 우승할 수도 있겠다? 그치?”

“…응, 그러면 정말 좋겠다.”

차마 한국이 질 거라고는 말할 수 없는 정우현이었다.

“근데 우현아.”

“응?”

“이번에 경기 보니까 말이야.”

“응.”

구태호가 교실 안에서 드리블을 하는 듯한 몸동작을 취하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내 눈엔 선수들보다 네가 더 잘하는 것 같더라.”

“…아, 하하하….”

“진짜야! 네가 우리랑 축구 할 때는 마라도나보다 더 대단하다니까?”

“에이, 무슨 마라도나야, 하하. 그리고, 아직 우린 어리잖아.”

“천만에! 우현이,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마라도나보다 진짜 더 잘할 수도 있는 거다?”

“에이….”

하고 정우현이 말을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딱히 축구나 운동 쪽으로는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얘기를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축구 얘기도 점차 잦아들었다.

한국이 4강에서 진 것은 물론 3, 4위 결정전에서도 패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 축구 시합 중 아이들 사이에서 여전히 가공할 모습을 보이며, 득점 포인트를 마구 올리는 정우현의 인기는 여전히 그칠 줄 몰랐다.

* * *

그리고 낙엽이 떨어지는 10월.

학생들은 다시 한번 신나는 일을 맞이했다.

무려 단체로 해외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원래는 학교 교육 과정상 일정에 없었다.

그런데 작년 한 해 KGI 재학생들이 제출한 과제가 국내는 물론 국외로도 엄청난 성과를 보여, 정부 차원에서 특별히 일종의 포상 여행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학생들과 선생 및 여행에 대동할 안전 요원을 모두 합쳐도 50명이 안 되는 소규모이기에 추진할 수 있는 여행이기도 했다.

또한 애초 KGI를 반대하는 국민 여론조차, 재학생들의 놀라운 성과 특히 정우현의 위대한 수학적 업적으로 인해 찬성하는 측으로 많이 바뀌어 그들 여행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대단한 아이들이 대단한 일을 한 만큼,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며.

이에 구름을 뚫고 상공에 오른 비행기 안.

KGI 학생들이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

물론 정우현도 있었다. 왼쪽에는 권유라 그리고 오른쪽에는 구태호를 두고 가운데에 앉았다.

“…아, 이코노미석은 처음 타 봐.”

재벌가 외동딸인 권유라가 적응이 안 된다는 듯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 난 그래도 한 번 타 봤는데.”

이번엔 구태호가 말했다.

“….”

정우현은 잠자코 있었다. 자기도 이코노미석은 처음이었지만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재밌겠다, 유럽!”

구태호가 소리쳤다.

비행기의 목적지는 유럽이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심지어 러시아 등 유럽의 주요 국가를 각국 수도 위주로 며칠씩 여행 다니고서는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아, 나 기대되는 거 있어.”

좌석 전방의 엔터테인먼트 디스플레이를 둘러보던 권유라가 불쑥 말했다.

“뭐?”

이에 정우현이 곧장 되물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도착할 베를린에서, 대회가 있대.”

“…무슨 대회?”

“세계 해킹 대회!”

“오….”

구태호가 탄성을 내질렀다.

해킹 대회라니.

비록 구태호 자신의 전공은 아니지만, 정우현이나 권유라 같은 다른 친구들은 충분히 흥미를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참가할 수 있어?”

이에 정우현도 궁금해서 곧장 물었다.

“아니, 못 하지! 이미 참가 신청 기간은 끝났고! 결정적으로 나이 제한이 있어. 13세부터 참가할 수 있대!”

“아, 그렇구나.”

“응! 뭐, 나는 어른들도 다 이길 자신이 있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러잖아도 최근 프로그래밍에 잔뜩 흥미를 붙이고 몰두하고 있는 권유라였다.

“그래, 유라야.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우현이, 너도 잘하잖아! 아, 저번에 프로그래밍 수업에서, 또 선생님보다 잘하더만!”

“…아, 그랬나, 하하하.”

당연한 얘기였다. 무려 CIA의 내부망을 해킹해 9.11 테러를 막아 낸 어나니머스가 바로 그였으니까.

정우현이 테러를 막은 기억을 잠시 떠올리며 홀로 슬며시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되게 재밌겠다!”

“그치?”

하고서 권유라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구경이라도 하러, 가기로 했어!”

“…어딜?”

정우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 세계 해킹 대회!”

“하지만 유라야. 너만 따로 떨어져서 갈 수는 없을걸? 우리 단체로 여행 온 거라.”

“아, 하하.”

하고 권유라가 장난스럽게 웃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은 엄마한테 말해서 얘기를 좀 해 놨어….”

“….”

“하루, 딱 하루만 다녀오는 거로. 그래서 결승전 날 가기로 했지.”

그러니까 대기업의 사모가 학교에 전화해 자신의 딸을 하루만 세계 해킹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허용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에 필요한 각종 시설 등을 에이치 자동차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 또한 잊지 않고.

“하하하하, 그렇게 해서 갈 수 있게 된 거야, 하하하하하!”

하고 권유라가, 말괄량이 소녀의 모습으로 자랑스럽게 웃었다.

이에 정우현이 조금은 부러워하며 되물었다.

“…그럼, 경호원 아저씨들이랑 가는 거야?”

“…응!”

권유라의 말대로, 그녀의 사설 경호원들은 지금 비즈니스석에서 편히 앉아 권유라를 따라 유럽으로 가고 있었다. 모두 세계 해킹 대회에 참석하는 권유라를 경호하기 위해서다.

사실 정우현의 경호원 엄규환도 지금 이 비행기에 있었다.

학교 안전 요원이 있으니, 한사코 따라올 필요 없다는 정우현에게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안 됩니다, 도련님. 안전 요원은 어디까지나 학생들 전부를 관리해야 하니, 도련님만의 안전을 책임지는 데는 부족합니다. 유럽에서도 도련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틀린 얘기는 아니었기에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정우현이 이제 다 알겠다는 듯 짧게 말했다.

솔직히 자기도 가 보고 싶었지만, 권유라처럼 학교를 설득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하지만 권유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응?”

“너도 가기로 했어.”

“…뭐?”

정우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너도 가기로 했다고!”

독특한 화법이었다. 분명이 권유라의 입에서 나온 너라는 지칭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텐데, 자신은 아예 처음 듣는 소리니까.

“우현이 너도. 솔직히 가 보고 싶잖아, 세계 해킹 대회. 그치? 그래서 우리 엄마한테 말해서 너까지 같이 가기로 학교와 얘기를 해 놓은 거야.”

“와아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내심 고맙기는 했지만, 친구의 무지막지한 추진력에 좀처럼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때, 좋지?”

“…응, 하하하, 하하하….”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 * *

그렇게 도착한 베를린 슈테글리츠의 한 전시관.

여러 대의 컴퓨터가 놓인 가운데 세계 해킹 대회의 결승전이 막 시작될 참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곳엔 정우현과 권유라, 그리고 그들의 경호원 셋이 함께 있었다.

“도련님, 조심하십시오, 유럽에는 은근히 범죄가 잦다고 합니다.”

엄규환이 조금 긴장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앞에 있는 정우현에게 말했다.

유럽에 온 건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괜찮아요! 독일은 안전한 국가예요! 특히 베를린은 더요!”

“으음….”

“…와아….”

한데 권유라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해킹 대회 결승전 참가자를 보고 놀란 것이다.

한 사람은 그리 놀랄 것도 없었다. 20대 흑인 남자였는데, 뿔테 안경을 쓰고 미간에 힘을 준 표정이 누가 봐도 프로그래밍의 달인일 것 같았다.

한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가관이었다.

어린, 백인의 소녀였다. 은발의 머리에 회색빛의 눈동자를 하고 있는 소녀였는데, 누가 봐도 컴퓨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저 조용한 소녀처럼 보였다.

한데 그런 그녀가 세계 해킹 대회의 결승전에 오른 것이다.

룰은 간단했다. IT 업계의 지원을 받아 마련한 보안 시스템을 먼저 침투해 해킹에 성공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IT 회사들은 대회의 과정과 결과를 토대로 그들 시스템을 더욱더 계발하곤 했다.

이러나저러나 시합은 시작됐다.

“오오….”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이 웅성댔다.

흑인 남자의 실력도 놀랍지만, 백인 소녀가 해킹을 시도하는 속도가 엄청났던 것이다.

그야말로 마치 인조인간인 듯, 표정에는 일절 변화 없이 거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키보드를 눌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회가 끝났다.

소녀가 해킹에 성공한 것이다. 즉 그녀가 우승했다.

“오오오오오!”

짝! 짝! 짝!

사람들이 놀라서 손뼉을 마구 쳤다.

그럼에도 소녀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자신의 실력을 확인했으니, 볼일은 다 끝났다는 느낌으로.

한데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렸다.

“Für einen Moment! (잠깐!)”

권유라였다. 권유라가 조금은 어설픈 독일어로 크게 외친 것이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보고 말했다.

“저랑, 한 번만. 한 번만 해 볼 수 있을까요? 시합이요!”

* * *

이렇게 해서 아까 전 흑인 남자가 앉은 자리에 권유라가 앉고, 소녀는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킹 대회의 번외 경기가 시작됐다.

사실 주최 측은 이 말도 안 되는 대결을 속행하지 않으려 했다.

이미 우승자는 결정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우승자인 백인 소녀가 아시아의 한 소녀에게 져 버린다면, 대회의 공신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번외 경기가 시작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우승한 소녀가 원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권유라를 보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가는, 한순간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고서 잠자코 자신의 자리에 가 다시 앉았다.

권유라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긴장하지 마.”

정우현이 권유라의 뒤에 서서 말했다.

“…응!”

하고 답하는 권유라였지만,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너무나 와보고 싶었던 세계 해킹 대회. 우승자를 눈앞에서 보게 된 것뿐만 아니라, 직접 대결까지 한다니.

실상 그녀 특유의 직설적인 성격으로, 별 기대를 않고 시합을 하자고 한번 크게 소리를 쳐 본 것인데, 놀랍게도 우승을 한 소녀가 자신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아아….”

하지만 대결은 싱겁게 끝이 났다.

우승한 소녀가 또 쉽게 이겨 버렸다.

“…잘했어.”

정우현이 패배해 기가 죽은 권유라를 보고 위로했다.

빈말은 아니었다. 정말 잘했으니까. 더군다나 대회에도 참가할 수 없는 10살이라는 나이를 더 감안한다면 권유라는 일종의 핸디캡을 가지고 싸운 것이었다.

다만 상대방 백인 소녀가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훨씬 잘하기는 했다.

정우현이 고개를 들어 상대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역시 무표정했다.

그러고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Warten Sie mal. (잠깐 기다려 주세요.)”

그때 정우현이 독일어로 정중하게 말했다.

그가 소녀를 바라보고 입을 연 것이다.

“실례지만, 저에게도 기회를 한번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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