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55)화 (55/200)

55화

베를린에서 세계 해킹 대회의 우승자를 이긴 정우현이지만, 해당 사실이 언론에 크게 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인터넷 시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해킹 자체가 대중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언론은 글로벌 스타이자 세계적 수학자인 정우현이 독일 베를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데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이에 그는 친구들 및 선생들과 유럽 여행을 다니며, 다시 브래드 퍼트가 준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고, 때에 따라선 선글라스까지 썼다.

본인도 본인이지만, 무엇보다 자신 때문에 친구들의 여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또 알아보고 베를린에서처럼 마구 몰려든다면, 계획한 여행 일정에 차질이 빚을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우현이는 진짜 짱이야.”

폴란드 바르샤바 왕궁.

권유라가 선생들을 따라 왕궁 안 여기저기를 보면서도 옆에 있는 정우현과 구태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현이가 10분도 안 돼서 그 여자애를 이겼다고?”

구태호가 권유라를 보고 물었다.

“응! 그 얼음 같던 애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니까!”

“…와, 대단해.”

정우현이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잠자코 생각했다.

그날 이후, 정우현은 곧장 독일 현지 언론을 통해 우승한 소녀에 관한 소식을 찾아봤다.

정우현의 출현으로 세계 해킹 대회보다는 정우현의 소식을 중심으로 기사가 났기에, 그녀에 관해선 주로 간략하게 언급됐다.

한데 다행히도 한 IT 기술 전문 잡지에서 그녀의 우승 소감과 대회 후기 등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해당 잡지사의 부탁으로, 소녀가 뒤늦게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솔직히 우승보다는 마지막에 한 번외 경기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소녀는 자신이 해킹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짧게 쓰고선 정우현을 언급했다.

‘대회 중 사람들의 함성으로, 그 소년이 정우현인 줄은 알았습니다. 푸앵카레의 추측을 입증한 정우현이요. 하지만 특정 수학의 난제를 해결한 것과 컴퓨터 해킹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하고서 그녀는 정우현에 관한 글을 이었다.

‘하지만 막상 붙어 보니, 놀랐습니다, 정말 놀랐어요. 저와는 완전히, 완전히 다른 수준의 실력이었거든요. 그에게 패배한 순간, 대회고 우승이고 하등 중요한 게 아닌 것이 됐습니다. 그러고서 당황해 그 자리에서 빠르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죠. 저는 여태 제가 마음먹은 분야에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져 본 일이 없거든요. 근데 지나고 보니 후회가 드네요. 짧게 인사라도 나눌걸.’

그리고 계속 글이 이어졌다.

‘하여간 그와 시합해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실력을 숨기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것 같아서 참 고마워요. 저는 알 수 있거든요, 상대가 전력을 다하는지, 안 하는지. 장담컨대, 그는 분명 전력을 다했을 겁니다.’

하고 조금은 격정적으로 몇 마디를 더하고서는 이메일을 마쳤다.

‘만약 정우현이 제 실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봐주거나 일부러 지기라도 했다면, 저는 패배의 아픔보다 더한 수치심에 이렇게 차분히 이메일을 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평생 이렇게 소중한 경험은 또 없을 것 같아요. 이번의 패배로 더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됐거든요. 정우현, 그를 뛰어넘을 수는 없어도, 저 자신은 뛰어넘고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정우현 또한 그녀에게 여러 감정과 함께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한데 이렇게 잡지에 실린 그녀의 글을 보니 다행히도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 *

한국 영재 학교 학생들의 유럽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러 10월 23일 밤 9시,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예술 극장.

학생들은 러시아 최초의 브로드웨이식 뮤지컬을 보고 있었다.

뮤지컬 관람을 끝으로 숙소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오전 세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여객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정우현 또한 즐거운 여행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 슬슬 가족이 보고 싶고 집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Лунный свет очень яркий! (달빛이 몹시도 영롱하군요!)”

뮤지컬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대사를 하고 춤을 췄다.

정우현은 물론 구태호, 그리고 몇몇 언어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러시아어를 원어 그대로 들으며 뮤지컬을 한창 즐기고 있었다.

한데 한순간 무대 위로 군복과 니캅 즉 얼굴을 가리는 이슬람 여성 의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배우들을 한편으로 쫓아 냈다.

관객들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관람하고 있는 뮤지컬이 현대극이면서도 특수 효과가 많았기 때문이다. 즉 군복을 입고 등장한 사람조차 뮤지컬 속 배우들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탕! 탕탕탕탕!

놀랍게도 그들은 들고 있는 AK 소총으로 극장 천장을 향해 총알을 마구 발사했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였다. 무장 괴한이 극장에 난입해 총을 쏜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곧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는 등 극장 내부는 아비규환이 됐다.

“아아!”

“…뭐지?”

정우현의 양옆에 있던 권유라와 구태호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

정우현은 눈을 치켜뜬 채 잠자코 무대 위의 괴한들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Тихо, тихо! (조용, 조용!)”

괴한 중 유일하게 복면을 쓰지 않아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 리더로 보이는 한 남자가 관객을 향해 러시아어로 소리쳤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내 말을 끝까지 듣는 사람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은….”

하고 다시 위협의 의미로 천장을 향해 총을 쏘며 말을 이었다.

“죽는다.”

“아아아…!”

사람들이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이전보다 조용해졌다.

즉각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우현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쉽게도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미 괴한들이 본관에 들어오기 전 극장 내 안전 요원을 제압한 후 한곳에 포박해 둔 것이다.

아쉽게도 엄규환과 권유라의 경호원들은 뮤지컬이 시작되기 전 예술 극장 문 앞까지만 동행한 뒤, 뮤지컬이 끝나면 다시 문 앞으로 오기로 했기에 극장 내부엔 있지 않았다.

정우현과 권유라가, 여행의 마지막 밤이니만큼 그들의 경호원에게 따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라고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극장 내 안전 요원이 또 있으니 마음을 놓기도 했고.

물론 엄규환을 포함한 경호원들이 수차례 같이 극장 내부에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정우현과 권유라가 작정하고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어떻게든 자유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와 같은 사달이 일어나고 말았다.

“너희들은….”

괴한 중 리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우리의 인질이다.”

“아아!”

“우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다. 테러리스트. 범죄자. 악당 등등. 하지만 우리가 고집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오로지 하나. 바로, 체첸 군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 체첸을 위해, 이렇게 총을 들었을 뿐이다.”

체첸 군인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관객 중 대다수가 러시아인이었기에 이제 어떤 상황인지 대강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너희들은 약 700명. 700명의 목숨을 대가로, 우리가 러시아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체첸 내에서 모든 러시아군의 즉각적인 철수다. 이 요구를 듣지 않을 시, 너희들은 단 한 명도 이곳에서 살아남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정우현이 잠자코 리더와 그들 테러리스트를 바라봤다.

일단 리더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서른이 채 안 되어 보였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은 대략 40명. 놀랍게도 그중 반은 여성이었다. 즉 니캅을 입고 있었다.

한데 자세히 보니 여자들은 폭탄을 자신의 몸에 두른 상태였다. 즉 언제든 자폭 테러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자들은 그러고서 극장 곳곳에 역시 폭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엄청난 양이었다.

이를 보고 옆에 있는 권유라와 구태호는 공포에 질렸다.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괜한 소리로 테러리스트의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이에 정우현은 양팔을 뻗어 두 친구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

그렇게 친구들을 애써 진정시키고서는, 침착하게 좀 더 상황을 지켜봤다.

곧 러시아 정부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요구에 관해 어떤 답변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요구를 따르는 조건으로, 체첸에 있는 러시아군을 철수시켜 인질 모두를 안전하게 구해 낼 수 있었다.

반면 일절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답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상황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터였다.

어쨌거나 일단 러시아 측의 반응을 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전까지는 테러리스트들 또한 원하는 바가 있기에 인질들을 해칠 수 없으니까.

이윽고 한 시간이 조금 지나 무대 위에 있는 테러리스트 리더와 몇몇 사람이 어수선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서는 한순간 다시 천장을 향해 총을 쐈다.

“아아아아아!”

사람들이 놀라는 가운데 리더가 다시 크게 외쳤다.

“러시아 정부가 너희들을 버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리의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겠다고 한다!”

“아아아아….”

사람들이 실망한 듯 크게 소리를 냈다.

사실 리더가 밝히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대신, 인질을 모두 놓아주기만 하면, 그들 모두 안전하게 제3국 망명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답한 것이다.

즉 민간인들만 살려 주면, 테러리스트들 모두를 어떤 처벌도 하지 않고 놓아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현재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들의 생존이 완벽히 보장되지는 않게 됐다.

테러리스트들과 러시아 정부의 대응에 따라 얼마든지 위험한 일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으음….”

계획한 일이 어그러지자, 테러리스트들이 자기들끼리 체첸어로 말하며 또한 동요하기 시작했다.

실상 그들로서는 뜻대로 안 풀릴 경우 자살 폭탄 테러까지 염두에 두고 이곳에 난입했기에, 모든 시나리오는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때 객석에 있는 누군가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정우현이었다. 정우현이 잠자코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다가는 천천히 손을 든 것이다.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는 러시아 정부 측의 답변을 들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대로는 인질들 즉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포함한 모든 민간인이 실제 위험에 처할 터였다.

“…뭐지!”

리더가 객석을 둘러보다가는 손을 든 아시아의 한 소년을 보고 크게 말했다.

이에 옆에 있던 권유라와 구태호가 놀라며 어수선해졌지만, 정우현이 그들을 보고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왼손 검지를 자신의 입에 댔다. 안전을 위해, 친구들은 잠자코 있으라는 뜻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우현이 드디어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러자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첫째 분명한 아시아인 소년이 러시아어도 아니고 소수 언어에 불과한 그들의 언어 즉 체첸어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아무리 봐도 그가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아!”

“정우현이다!”

이에 관객들도 뒤를 돌아 정우현을 봤는데, 드디어 그의 정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곳 예술 극장에 들어올 때는 브래드 퍼트의 모자를 눌러 써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정우현?”

리더가 깜짝 놀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자신 또한 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년 전 그의 영화 <인크레더블 킹 보이>를 무진장 재밌게 봐, 극 중 소년 왕 정우현의 대사를 몇 마디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즉 테러리스트 또한 정우현의 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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