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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52)화 (52/200)

52화

2001년 9월 11일이 평화롭게 지나감으로써 미국 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진 가운데, 정우현은 뒤늦게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밝힐까 생각했다.

어나니머스는 나라고.

하지만, 곧 그러지 않기로 했다.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먼저 어쨌든 미 정보국인 CIA 내부망을 해킹한 것에 관해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항공기 테러 정보를, 대한민국에서 학교만 다니고 있는 어린 소년이 어떻게 입수했는지에 관해 해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결집하는 웹 사이트를 해킹해 정보를 입수했다며 둘러대 볼까 했다.

그렇지만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는 법, 그렇게 되면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또한 어나니머스가 자신임이 드러나면,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 정보부의 감시망 안에 들어갈 것이고, 최악의 경우엔 이슬람 테러 단체에 의해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밝히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밝혀지면 세계적인 영웅으로 거듭나기는 하겠지만, 현재로서 그는 딱히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정우현이 KGI 교정 안 벤치에 앉은 채,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하고 싶은 공부도 잔뜩 하고, 집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전혀 부족함이 없지. 그리고 참 고맙게도 국내는 물론 해외의 사람들까지 나를 좋아해 주고 말이야.’

또한 정우현은 이번 일로, 무려 사람을 살렸다. 테러가 일어나지 않음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만 약 3,000명이었다. 거기에 부상자 및 2차 피해자들까지 생각하면 사상자가 최소 수만 명에서 최대 수십만 명까지 추산되는 끔찍한 일이 바로 9.11 테러다.

그런 참혹한 사건을 정우현이 막아 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자다가도 푸근한 마음에 홀로 슬며시 웃고는 했다.

생명을 지켜냈다는 것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고 내리는 명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실로 이는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니까.

“우현아아!”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운동장에서 정우현을 불렀다.

구태호였다.

구태호가 밝게 웃으며 정우현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뭐해? 너도 놀자아아!”

이에 정우현이 벤치에서 사뿐히 일어났다.

“너가 술래할래? 얼음땡!”

어느새 구태호 옆에 다가온 권유라가 정우현을 보고 역시 소리쳤다.

‘…그래.’

그런 자신의 친구들을 보며 정우현이 생각을 이었다.

‘난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다.’

그러고는 권유라와 구태호를 잡기 위해 무진장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

이에 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하하하하하하하!”

몹시도 즐거워하며.

* * *

시간이 흘러 2002년.

한국 영재 학교에서는 학기 초, 작년 한 해 학생들의 연구 성과를 결산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의 학생이 우수한 과제를 제출해 선생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그 중 특히 두드러지는 이들이 있었으니 당연 정우현과 권유라 그리고 구태호였다.

먼저 구태호가 제출한 과제 ‘고대 동아시아의 법률 비교’는 한국역사학회에까지 발표되어 역사학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고대 한국 및 중국 그리고 일본의 언어를 정확하게 해석함으로써 언어사(言語史)적으로도 성과를 인정받았다.

이에 구태호는 학회지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우리 KGI 재학생이자 제 친구인 정우현. 예, 인류의 수학적 난제를 해결한 위대한 제 친구가 사실 많이 도와줬습니다. 특히 일본 고서와 관련해 고대 일본어를 해석할 때는, 거의 전적으로 정우현에게 도움을 받았죠. 그래서 제 논문을 KGI를 통해 학회에 제출할 때, 마음 같아선 정우현의 이름도 올리고 싶었지만, 규정상 그게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구태호는 학회 등 이곳저곳에서 정우현의 공로를 빠트리지 않고 언급하는 것은 물론 논문 맨 앞장에, 이렇게 문구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내 위대한 친구 정우현의 도움을 받아.’

한편 권유라의 경우는 더 놀라웠다.

어느 날 그녀가 학교에 와서는 예의 밝은 목소리로 정우현을 크게 불렀다.

“우현아!”

“…응?”

“…나!”

“….”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권유라였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전에 없이 반짝거리는 등 무척 기분이 좋은 게 틀림없었다.

“특허 출원하래!”

“…뭐?”

“작년에 낸 연구 과제 있잖아! ‘연속가변밸브의 제어와 적용’!”

“응.”

“그거 학교에서 실용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설계도면을 특허청에 제출했는데 심사에 통과했어!”

“와아.”

짝짝짝!

정우현이 손뼉을 크게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축하해, 유라야!”

“고마워어어어!”

하고서 권유라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정식으로 등록해야 하는데.”

“응.”

“우현이, 네 이름도 올리려고!”

“…뭐?”

정우현인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말 그대로야! 나뿐만 아니라 너까지 해서 공동 명의로 특허를 출원하겠다는 거지!”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정우현이 입을 다물었다.

이에 권유라가 곧장 말했다.

“왜 우현아? 아니, 솔직히 네가 알려 준 아이디어로 내가 다 한 거잖아. 즉 네 머릿속에 있는 걸 내가 펼쳐 보인 것뿐이라구!”

“…으음.”

고마웠다. 고맙긴 한데, 어쨌든 권유라가 적지 않은 시간 고생해서 완수한 과제였다. 그렇게 해서 놀랍게도 특허까지 출원하게 됐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공동으로 올려 그녀의 성과를 나눠 가져도 괜찮은지 판단이 잘 안 됐다. 또한 이 역시 딱히 욕심이 나지 않기도 했고.

“근데 유라야.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그냥 너한테 얘기만 좀 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네가 다 한 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니?”

“…왜?”

권유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네 이름으로 네가 연구하고 제출한 결과물인데, 정작 성과가 나와서 특허 등록할 때는 내 이름도 올리자고 하니 이렇게 하는 말이야.”

“….”

권유라가 어울리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이에 정우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라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네가 이렇게까지 날 생각하는지는 몰랐어. 그렇지만.”

하는데 순간 권유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가 싫다면….”

그러고는 뒤로 홱 돌더니 크게 소리치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도면이고 뭐고 다 불태워 버릴 거야!”

“….”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 * *

“…흑흑….”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왜 그러세요!”

KGI 정문 밖으로 나온 권유라에게 그녀의 경호원들이 깜짝 놀라서는 물었다.

권유라가, 그러니까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항상 밝고 씩씩하기만 했던 그들의 아가씨가, 눈물을 흘리며 학교 밖으로 나온 것이다.

“아가씨!”

“…아무 일 없어.”

권유라가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계속 손으로 훔치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공부할 기분 아니야. 집에 가자.”

“….”

권유라는, 슬펐다.

정우현이 자기 뜻을 알아주지 않아서.

권유라에게 해당 과제는 단순한 연구 결과물이 아니었다. 무려 정우현, 그러니까 그녀가 몹시도 따르는 친구 정우현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받아 완성시킨 결과물이라는 게 중요했다.

즉 그냥 과제가 아니라 정우현과 함께한 과제라는 것에서 그녀는 훨씬 큰 의미를 찾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공동의 이름으로 과제를 제출하고 싶었지만, KGI 규정상 그럴 수 없었다.

한데 용케도 특허 심사를 통과하게 되면서 공동 명의로 출원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래서 곧장 정우현에게 얘기한 것이다.

그것도 정우현이 엄청 기뻐할 것이라는, 무척이나 큰 기대감을 품고.

한데 아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정우현은 단박에 그녀 자신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특허고 뭐고, 이제는 다 싫어졌다.

* * *

한남동 권유라의 집.

“유라야.”

권유라의 어머니가 그녀의 방문 앞에 서서 불렀다.

“권유라.”

“….”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놀랐다.

집에 있어도 매일 친구들 얘기를 하며, 학교 가기를 몹시 즐겼던 딸 권유라가 어느 날 갑자기 수업도 마치지 않고 울면서 집에 오니까.

이에 그녀는 재빨리 KGI에 전화를 걸었고, 이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주 큰 일은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하나뿐인 딸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그래서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잠시 혼자 둘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권유라!”

그녀의 어머니가 권유라를 더 크게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와 봐, 얼른.”

“….”

“우현이 왔어, 정우현.”

정우현이 학교를 마치고 권유라의 집에 온 것이다.

권유라는 믿을 수 없었다.

정우현이 자기 집에 왔다니.

잠자코 누워 있던 권유라는 밖에서 들리는 엄마의 놀라운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얼른 나오라니까, 우현이 기다린다!”

하지만 분명히 엄마의 입에서 정우현의 이름이 나왔다.

이에 권유라는 눈을 질끈 감고 생각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엄마가 날 밖으로 나오게 할 작정으로 한 거짓말!’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유라야.”

그러고 있는데 이내, 문밖에서 진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우현이었다.

찰칵!

정우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권유라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더 이상 방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정우현이 왔으니까!

그것도 우리 집에!

문을 열자, 정말 자신의 방 앞에 정우현이 서 있었다.

그러자 권유라가 예의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말했다.

“우현이다!”

정우현 앞에서 얼굴이 빨개져서는 끝내 눈물을 흘리며 학교 정문을 나온 부끄러움은 온데간데없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뒤늦게, 토라져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며 표정을 고치기 위해 애써 노력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친구 정우현의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어머, 엄마가 부를 땐 꿈쩍도 안 하더니!”

이 모습을 보고 권유라의 어머니는 놀라움도 잠시 기뻐하며 슬며시 웃었다. 사실 그녀는 정우현이 자신의 집에 왔기에, 이 작은 에피소드가 금세 해결되리라 확신했다.

정우현이 그런 권유라 앞에 꼿꼿이 서서는 또렷한 목소리로 진심을 다해 말했다.

“미안해, 유라야.”

그러고는 오른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네 마음을 못 알아 줘서.”

3년 전, KGI 입학식 날 권유라가 정우현에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듯, 이번엔 정우현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에 권유라는 가까스로 억눌렀던 기쁜 마음을 결국 참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폴짝 뛰더니, 악수를 청하는 정우현을 강하게 끌어안고 말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어머, 어머, 얘 봐!”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 딸을 보고 마구 웃었다.

권유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에게 말을 이었다.

“너한테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같이 이름을 올리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잘못했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우현과 권유라. 

아직 열 살밖에 안 됐지만, 무려 햇수로 벌써 3년 차인 친구 사이다.

그것도 서로가 서로에게 첫 친구였다.

그렇게 그들은 3년 동안 거의 매일을 함께했다. 학기 중엔 학교에서, 방학 때는 핸드폰 연락을 하다가 종종 함께 만나 놀며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한 친한 친구 사이.

그런 그들에게 중요한 건 연구 과제니 특허니 뭐니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 자신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정우현은 친구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기꺼이 그녀의 집에 올 수 있었고, 권유라 또한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며 진심으로 반성할 수 있었다.

“우현아.”

권유라의 어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온 김에 밥 먹고 가렴. 뭐 먹고 싶니? 아줌마가 다 해 줄게!”

물론 재벌가의 사모인 그녀는 요리할 줄 몰랐지만, 눈앞에 있는 정우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그리고 며칠 후.

정우현은 권유라와 함께 공동으로 특허를 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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