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0. 연경에서 날아온 비보 (3) (390/400)


390. 연경에서 날아온 비보 (3)
2022.09.24.



“목숨을 던져 가문을 구하려 하는가?”

만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깔리자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설마 하는 얼굴로 제갈명공을 쳐다봤다. 하지만 개 중에 몇몇은 그런 가주의 각오를 짐작한 듯 침중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갈명공은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대협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든 하겠나이다. 자결하라면 자결을 할 것이고 발등을 핥으라면 발등이라도 핥겠나이다. 부디 가문만은, 수백의 식솔들만큼은.”

만일 만우가 제갈세가를 멸(滅)하겠다 다짐한다면 이곳 융중의 제갈세가 집성촌 전체가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런 만우의 다짐은 황제가 방효유의 십족을 멸하라 했던 것보다 더 많은 피를 흐르게 할 것이다. 그것을 제갈명공은 원하지 않았다.


“봉문을 하여 무림에 나서지 않겠나이다. 그것을 원하신다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옵소서.”

제갈명공은 극진한 태도로 만우에게 읍소했다. 만우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어떻게든 공력을 일으켜 만우의 허공섭물을 끊어 내려 애를 쓰고 있는 독왕을 뒤로 한 채 제갈명공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목숨 따위가 중한가?”

“아닙니다.”

“그 쓸모없는 목숨 따위 끊어진다 하여 본주가 후환을 남겨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제갈명공이 목숨을 끊는다 하여 끝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아니다. 제갈명공이 스스로 자처하여 자결하더라도 제갈세가에서는 만우를 원수로 여길 것이다.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것.

그것만이 무림의 지독한 은원의 고리를 끊어 내는 일이란 것을 만우는 알고 있었다.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영악한 네놈은 이미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핏줄을 대피시켰을 터.”

고오오오오!!!

제갈명공이 그랬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만우는 제갈명공이 하는 모든 말들이 입 바른 말이라고 생각했다.

우직, 우지지직!

쩌저저적!!!

그런 만우가 목소리에 공력을 담자 기어코 만우의 공력에 짓눌리던 삼층 전각이 견디지 못하고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우당탕탕!!!

제갈명공은 전각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제갈명공이 걸친 의복 이곳저곳이 찢어지고 흙투성이와 먼지투성이가 됐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다 삐져나와 산발이 되었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앞섶을 흥건하게 적셨다.

패잔병과도 마찬가지인 몰골이었지만 제갈명공은 무너진 삼층 전각의 잔해를 밀쳐내고는 일어섰다.

후두둑!

주륵!

제갈명공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생겼고 피가 흘렀다.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가주의 그 참담한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식솔들의 목숨을 놓고 대협께 거짓을 고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제갈명공은 그런 와중에도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만우에게 간곡하게 읍소했다.


“그저 연명하고자 하였음이니 오해를 풀어 주시옵소서.”

“연명이라.”

투욱.

허공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온 만우의 발끝이 땅에 닿았다. 제갈명공은 그런 만우 앞에 다시 무릎을 털썩하고 꿇었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모든 제갈세가가 네놈과 같은 생각을 한다고 믿는 듯한데.”

쐐액!

텁!

만우가 내뻗은 손에 저 멀리 있던 제갈연이 딸려 와서는 스스로 가져다 바치는 것처럼 제갈연의 목 줄기를 만우가 손으로 움켜쥐었다.

파르르!

그런 제갈연의 모습에 제갈명공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본주를 죽이고자 사림곡의 독졸 놈과 손을 잡고 함정을 파 놓고서는 이제와 하는 이야기치고는 치졸하기 그지없구나. 아니 그런가?”

꾸욱!


“켁…… 케엑…….”

치졸하다.

오대세가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둥이자 무림맹의 대들보인 제갈세가의 자존심을 와장창 무너뜨리는 수식어다.

허나 만우의 눈에 제갈세가는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웃는 낯으로 밑에 칼을 숨겨 놓고는 그것을 꺼내들었다가 안 될 것 같으니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이 와중에도 자신을 어떻게든 죽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독왕의 감정이 더 직선적이고 솔직했다.


“너희는 이미.”

만우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제갈연의 얼굴이 퍼렇게 질리기 시작했다.


“용접곡에 이어 두 번이나 나와, 내 주변을 노렸다. 허니.”

한 번쯤은 봐줄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르니까. 허나 두 번째에도 그랬다는 것은 세 번째, 네 번째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나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태세전환을 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믿을 수 없다.

그런 만우의 결정을 읽어 낸 제갈명공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세 번은 없다. 네놈들에게 더 이상의 미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만우의 입에서 사형선고가 떨어져 내렸다.


 
우드득!

그 시작은 제갈연의 목이 돌아가서는 안 될 각도로 꺾이는 것에서 시작됐다.


“아, 안 돼!! 안 돼에에에에!!!”

제갈명공의 절규가 제갈세가를 가득 채웠다.

*****

제갈세가의 장원이 푸른 창천의 기운에 뒤덮였다.

시릴 정도로 새파란 그 기운은 융중 전체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고 강렬하기 그지없었으나 한 다경이 채 지나지 않아 언제 있었냐는 듯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사라진 후로 제갈세가 내에서 단 한 사람도 걸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문이라.”

“가시겠습니까?”

“이미 무림왕이 일보고 지나간 것 같은데…….”

톡, 톡, 톡.

주고후는 객잔에서 들은 소문이 구할 구푼의 확률로 진실일 것이라 믿고 있었다. 검주가 직접 제 발로 제갈세가에 걸어 들어갔다는 것은 제갈세가에게 볼 일이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림맹에서 황실과 사림곡이 손을 잡고 검주를 습격했다고 했으니, 아마 그 죄를 묻기 위함을 것이다.


“제갈세가는 멸문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군.”

주고후는 제갈세가의 멸문을 거의 확신했다. 제갈세가를 뒤덮은 푸른 창천의 기운, 아마 그렇다면 검주가 단신으로 제갈세가를 멸문으로 인도했을 것이 주고후의 예상이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손을 쓸 정도로 독해 보이지는 않던데. 뭐 보나마나 제갈세가에서 선을 넘었겠지. 아니 그런가 유모?”

“쇤네는 그런 복잡한 사정은 알지 못하옵니다 전하.”

“어쨌거나 한 발 늦었네…….”

검주, 아니 동군영을 좇아 호북성 융중까지 온 주고후다. 허나 이미 검주는 한 발 먼저 융중을 뜬 모양이었다.


“일단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유모, 제갈세가로 가자.”

“전하. 위험한 일이옵니다.”

“위험?”

주고후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피식하고 웃었다.


“왜, 제갈세가 멸문의 주범으로 우리가 지목될까 봐?”

“……사람 일이란 것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니옵니까.”

“괜찮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고민을 덜어 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왕이란 자의 책무이기도 하니. 그리고…….”

주고후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가져다 붙였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진심을 담았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의 흔적이라도 견식해 보고 싶지 않아? 어찌하여 그가 천하제일이라 불리는지 유모는 궁금하지도 않냐 이 말이야.”

주고후가 두 눈을 반짝였다. 호광성 비무대회에서 본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허나 무인이라면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자의 수준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쇤네는 전하의 안위만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본왕이 그걸 못 보면 궁금해서 죽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가자고.”

그 말을 한 주고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주고후를 말릴 수 없었던 유모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 그것만 보시고 바로 남경으로 가셔야 합니다, 전하.”

“알아. 나도 그 동군영이란 선비를 한 번 더 보고 싶으니까.”

주고후가 하는 말을 일말의 위안으로 삼은 김 씨는 주고후를 따라 제갈세가로 향했다.


“흐음. 제갈세가라.”

제갈세가는 융중 한 복판에 나 있는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가장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고아하고 청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학자나 선비의 기상을 그대로 품은 것 같은 곳이 제갈세가라 하였다.

제갈공명.

촉황제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받아 천하삼분지계를 논하여 객장이던 유비에게 사천 지방의 촉을 안겨 주고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와 함께 천하의 균형을 논하였던 신산(神算)의 책사.

그 이야기를 한왕인 주고후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주고후는 제갈세가의 대문을 보고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음울하군.”

그런 제갈세가는 소문이 사실인 듯 조용하고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문 앞에 그 흔한 위사 하나 없어 오히려 세가 전체가 음울함으로 뒤덮여 있는 듯했다.


“전하. 쇤네가 먼저…….”

“뙜네. 김 씨도 느끼고 있을 텐데.”

주고후와 김 씨의 뒤를 따르는 네 명의 절정고수에 이른 가마꾼들이 긴장하는 것이 주고후에게도 느껴졌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란 걸.”

“전하.”

끼익!

김 씨가 그런 주고후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대문을 밀어젖혔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세가의 대문이 밀렸다.


“웁!”

대문을 열어젖힌 주고후가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소매로 가렸다. 대문을 엶과 동시에 자욱한 혈향이 열린 틈 사이로 훅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그 혈향에 주고후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쉬익!

김 씨가 그런 주고후의 앞에 서고 네 명의 절정고수들이 주고후를 둘러쌓았다. 허나 그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사방에 널린 죽음들.

전장의 선봉에 섰던 주고후라고는 하나 그것은 역성(易姓)과 반역을 두고 명운을 걸고 싸운 전장터였다.

허나 주고후는 제갈세가 내부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학살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전하! 제갈세가이옵니다! 어떠한 기관진식이 깔려 있는지 모르는데…….”

“그런 게 있을 성 싶은가? 설령 있더라도, 작동을 할까?”

제갈세가 내부에는 언뜻 봐도 성한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땅거죽은 뒤집혀 있었고 드높았던 전각들은 마치 수백 년이 지난 듯 손가락을 가져다 대기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삭은 듯 보였다.

제갈세가 내부와 외부의 시간의 흐름이 달랐던 것만 같은 모습에 김 씨는 주고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널따란 제갈세가 안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가 자신만의 것이란 생각을 하자 훨씬 더 을씨년스러웠다.

사방에 시체들이 즐비한 그 한 가운데를 걷고 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고후는 그 시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시체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설마.”

주고후는 발걸음을 빨리하면서 제갈세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주변의 시체들을 전부 확인하고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김 씨를 쳐다봤다.


“유모.”

“예, 전하.”

김 씨와 네 명의 절정고수들은 주변에서 어떤 위험이 튀어나올지 몰라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상태였다.

주고후는 그런 김 씨에게 말했다.


“주변의 시체들을 좀 살펴보도록. 전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공통점…….”

주변을 슥 둘러본 김 씨와 네 명의 절정고수의 눈이 커졌다. 주고후의 안위에 주변을 경계하느라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전부 죽은 자세가 가지각색이었다.

그렇다는 뜻은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었다는 뜻이다.

만약 도망가려 했다면 전부 바깥쪽을 보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많은 사람들을, 그게 가능한가?”

황실무공을 익힌 주고후지만 그는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주고후가 고개를 돌려 네 명의 절정고수들을 쳐다봤다.


“그런가?”

“……송구하오나 전하. 그것은…….”

불가능하다.

주고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이지만 그들의 대답 역시 주고후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고후는 시체에 새겨진 상흔을 쳐다보았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상흔을 가리켰다.


“일검(一劍)이다.”

김 씨와 네 명의 절정고수들은 그것을 진즉에 발견했다. 주고후는 시체에 새겨진 검흔을 따라 손가락을 옆으로 쭈욱 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같은 높이에, 사람뿐만 아니라 구조물에까지 같은 검흔이 새겨져 있었다.

그 검흔은 비단 주고후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 검흔은 모든 것을 관통하여 새겨졌다.


“만일 이것을 무림왕이 했다면.”

주고후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를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 부르지 않으면 대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검신(劍神)? 무신(武神)?”

주고후의 소회가 김 씨와 절정고수들의 귀에 인이 박히듯 틀어박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