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사냥꾼과 사냥감 (4)2021.12.21.
“오도리 부족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환대에 감사드리외다.”
설미수와 동맹가첩목아가 인사를 나누었다. 동맹가첩목아는 설미수에게 말했다.
“십 년 전쯤 조선에 들어가 상왕을 알현했던 적이 있소. 그때 뵌 듯 하오만.”
“그런 우연이.”
설미수와 동맹가첩목아 사이의 분위기는 다행히 별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 외교란 것이 이렇듯 입에는 달콤한 과실을 물고 소매 속에는 칼을 숨기는 법이었으니까.
“한데 호송단이라 들었소만. 죄인은 어디 있는 것이오?”
동맹가첩목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설미수를 쳐다봤다. 하지만 설미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얼굴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사행단의 수장으로서 실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우리는 사행을 나서는 길이오. 호송과 죄인이라니 금시초문이외다.”
“명 천자께서 내리신 칙서의 내용과는 다르오만.”
동맹가첩목아는 심유하게 눈을 빛냈다. 같은 칙서를 받아 놓고 왜 말이 다르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설미수는 당황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수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전하께서 명 천자께 보내는 친서에 이유가 있으니, 작은 오해 때문이외다.”
설미수는 오도리 부족의 동맹가첩목아가 명 황실로부터 칙서를 받았다는 것에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조선에만 칙서를 보낸 것이 아니라 여진족에도 칙서를 보내 만우를 죄인으로 삼아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린 셈이었기 때문이다. 오도리 부족의 대추장이 한 때 상왕의 의형제였다고는 하나 지금까지도 그가 조선을 따를지는 알 수 없었다.
‘곤란하군.’
만약 이들이 조선의 주장보다는 명의 칙서를 받들겠다고 하면 일이 곤란해진다. 황실의 칙서는 명백한 명분이 있는 반면 사행단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송단이 아닌 사행단을 보내는 것 자체가 일단은 명 황실에서 내려온 칙서에 반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잠자코 있던 척일이 나섰다.
“허허헛. 오랜만이오. 날 기억하시오?”
“……?”
“사행단의 서장관을 맡은 척일이외다. 척일.”
“척일…… 척…… 척일!!!!!!”
동맹가첩목아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는 척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그대가 이곳까지!”
곡산척가를 여진족의 대추장 중 하나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무신처럼 공포로 여진족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여진족의 전사들이 곡산척가의 무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가.
“우리 제근각의 아이들이 그대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고 들었네. 허허헛.”
그중에서도 척일은 척가의 전대 고수지만, 그가 얼마나 뛰어난 무용을 가지고 있는지 이성계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견식할 기회가 있었던 동맹가첩목아다.
“동맹가첩목아, 아니, 그대들의 말로 먼터무라고 했지. 대추장.”
그때와 비교하면 척일은 그냥 옆집의 인상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 정도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동맹가첩목아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무신이 누군가와 타협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그 무신이 타협을 하여 서로 양보할 정도로 곡산척가란 곳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
동맹가첩목아는 척일을 보고서는 복잡한 심경에 입을 다물고는 설미수와 척일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 동맹가첩목아를 대면하는 것은 설미수와 동군영, 그리고 척일이면 족했다. 그 외의 무기를 지닌 자는 막사 안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족 전사들의 견제 아래 방매와 일행들은 여기저기 기대어서는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그때 조용히 있던 여포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 오고 있군.”
“응? 누가?”
여포의 말에 감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척사영이 여포의 말을 이어받았다.
“수는 스무 명 정도. 주변의 이런 전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호오…….”
감령이 그제야 흥미가 생겼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주변의 여진족 전사들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가장 약한 것이 초절정인 사행단에게는 별다른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여진족 전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경거망동할 생각하지 마라. 산강아지.”
“이 미꾸라지가. 내가 애냐?”
“산적 놈들이 원체 무식해야 말이지.”
“하. 수적은 누가 보면 한림학사 정도 되는 줄 알겠네?”
필두가 감령에게 말하자 감령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원체 산적과 수적의 사이가 저랬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티격태격해도 그게 전부지, 무기를 뽑아드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전사들 사이에서 감령의 눈에 익숙한 중원풍의 통일된 의복을 입은 이들이 걸어 나왔다. 그중에서도 맨 앞에 서 영웅건을 둘러맨 가장 어려 보이는 이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가장 강렬했다.
“호오…… 칠성?”
문형일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저들의 옷에 새겨진 일곱 개 별, 칠성의 문양을 본 것이다.
“모용이라고?”
“모용세가가 왜 여기서 나와?”
감령과 필두가 중얼거렸다. 반면 중원 무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척사영이나 여포, 그리고 슌스케는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어려 보이는데.”
“제법인데?”
“저놈도 오룡이니 뭐니 그런 건가?”
“그런 거 없어진지 오래잖아. 대장한테 왕창 깨져 나가서.”
감령의 말에 필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정파는 참 용이니 봉이니 하는 것들을 좋아했다.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몇 명 뽑아 늘 몇 룡, 몇 봉 하면서 부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정파에서 그렇게 불리는 놈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룡사봉(五龍四鳳)이던가? 대장 앞에서 깐족대다가 싸그리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는 바람에 그놈들 사문에서 나섰다가 하마터면 대장이 무림공적이 될 뻔했었지.”
그때만 해도 감령이나 필두나 녹림과 장강의 왕으로 군림할 때였다. 잠시 그때를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감령과 필두였다.
“모용을 아는가?”
반면 남은 팔검단의 무인들과 함께 조선의 호송단을 보러 온 모용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호송단 군졸들의 군기와는 별개로 자유분방한 분위기인 데다가 그들의 면면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 한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몇은 자신들이 모용세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기 때문에 모용청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감령과 필두에게 물었다.
“모용세가를 어찌 모를까.”
감령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모용세가가 비록 한미한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문파와 세가의 자존심 때문이지, 그들을 무시하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모용세가의 무공은 소문난 일절이었으니까.
‘정녕 이것이 호송단 무인의 수준이란 말인가.’
모용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입 밖으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 당장 모용청의 감각을 계속해서 건드리는 수준의 무인이 다섯이었다.
‘그리고 저 둘은.’
꿀꺽 모용청은 멀뚱하니 서 있는 척사영과 여포를 보고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모용청은 불과 약관이 조금 넘은 나이에 절정의 벽을 넘어 초절정의 초입에 다다른 천재 중의 천재다. 만약 모용세가가 요녕이 아니라 중원의 한복판인 하북이나 호남에 있었다면 이미 다음 대를 짊어질 후기지수로 소문이 자자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모용청은 스스로의 무위에 자신이 있었다. 이 호송단이라 주장하는 괴물들의 집합소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버님, 혹은 그 윗줄.’
그런 모용청이었기에 척사영과 여포를 쳐다보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저갱이 둘로부터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초절정 초입에 달한 모용청보다도 아득한 윗줄의 고수라는 뜻이다.
‘벽을 넘어선 자들이란 말인가!’
초절정인 모용청을 그리 아찔하게 만들 정도라면 그들이 최소한 초절정의 벽을 넘어서 초인의 반열에 든 무인이라는 뜻이다. 무림십좌. 화경의 고수란 것이 그리 흔하지 않기에 그중 가장 강한 열을 뽑아 절대고수로 칭송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무림이다. 한데 자신과 나이도 그리 차이 나지 않아 보이는 두 남녀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절정의 벽을 깬 초인이라니. 꿀꺽
‘대체 저들이 호송해야 할 자의 무위가 어느 정도기에.’
모용청은 영락없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득 모용청은 이상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호송단이라 들었는데 죄수를 태운 수레는 어디에 있는 것이지?’
대개 수레를 이동용 옥사로 개조하여 죄인을 태우는 경우는 죄인의 지체가 높을 때거나, 죄인을 다루기가 힘들 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러니 만약 이들이 호송단이고, 호송단의 면면이 이 정도의 고수로 채워져 있다면 당연히 죄인을 호송하는 데 쓰이는 이동용 옥사도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주변에는 그럴 만한 것이 없었다.
“뭘 그리 보는 것이지?”
감령이 눈을 굴리는 모용청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놀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모용청이라고 해도 저보다 더 크게 놀라면 놀랐지 저리 의젓하게 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엄하다!”
그런데 그때 팔검단의 고수 중 하나가 나서서는 감령을 나무랐다. 감령은 잘 봐줘도 수행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엄하다고?”
감령이 피식 웃어 보였다. 팔검단의 고수들은 일류와 이류 고수들로 이뤄져 있었다. 절정에만 올라도 한 성의 최고수가 될 수 있고 초절정에 오르면 한 주의 최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류와 이류 고수가 삼십 명에서 최대 오십 명까지 일개 단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가문의 가세가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요녕에서 모용 씨를 달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선 팔검단의 무인은 감히 가문의 직계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는 수행원을 보면서 눈을 부라렸다.
“고작해야 짐이나 나른 놈으로 보이거늘. 도련님에게 말버릇을 달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리 네놈이 조선에서 온 물정 모르는 놈이라 하여도…….”
“그만!”
모용청이 손을 내뻗어 무인의 입을 막았다. 모용청을 위해 입을 대신 연 이도 마찬가지로 모용 씨였지만 모용청의 한 마디에 바로 입을 꽉 다물었다.
“아니 재밌네. 끝까지 해 봐.”
거기서 그쳤다면 분위기가 어색해졌지만 그래도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감령은 절대로 딱 거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무림인이다. 무림인이란 것은 흔히 자존심과 명예로 먹고 사는 족속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감령은 바로 도부터 휘두르는 녹림의 대채주였고 말이다.
“무엄하다, 무엄하다. 모용세가의 가주도 아니고, 그 아들놈한테까지 내가 무엄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감령이 웃으면서 도발했다. 그러자 팔검단의 무인 전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동시에 그들에게서 날카로운 살기가 올올히 일어났다.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다 말인 줄 아는 놈이로구나.”
“아니, 상식적으로 이 정도까지 했으면 한 번은 물어볼 만도 하지 않아?”
감령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 모용청을 쳐다봤다. 모용청은 입술을 질겅거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멈추고 싶지만, 감령이 모용세가의 가주를 들먹인 순간 나설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길래 감히 모용세가의 가주를 놓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말이야.”
감령은 그렇게 말하면서 혀를 쯧쯧 찼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고 했거늘. 어찌하여 고작 이 정도 놈들이 요녕성의 패자라고…….”
이제는 가문까지 감령이 걸고 넘어졌다. 모용청은 그런 감령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감령은 처음부터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기지 못한다고 하여 물러난다면, 그것이 어찌 한 성을 지배하는 가문의 적통이라 할 수 있을까.’
다행인 점이라면 지금 앞에서 말하는 멀쑥하게 생긴 자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이 나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나선다면 손도 쓰지 못하고 패하겠지만, 저 자 하나라면 승산이 있었다.
“우리 쪽의 말이 심했다고는 하나, 그쪽에서 모용을 걸고 넘어졌으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되었소이다.”
“도련님! 어찌하여 저런 무뢰한에게 말을 높이시는 것이옵니까!”
팔검단의 무인들이 모용청을 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눈에 감령은 그냥 나대는 무뢰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감히 모용을 모욕한 중죄를 지은 무뢰한 말이다. 모용청은 혀를 쯧쯧 하고 찼다.
“상대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 하는 안목을 지녔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 무사히 살아나간다면 그 버릇을 고쳐야 할 것이오.”
“안목이라니 도련님.”
“저 자와 저 사람들을 보면서 느껴지는 게 아무 것도 없소? 어찌하여 내가 말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까!”
모용청은 답답하다는 듯 무인을 책망했다. 그러자 무인의 얼굴이 굳었다. 모용청에 비해 자신의 실력은 비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모용청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겠지. 그렇지 않소이까?”
딸랑!!! 감령이 씩 웃으면서 등에 메고 있던 도를 풀어서는 손에 쥐었다. 도를 감싸고 있던 천이 스륵하고 흘러내리자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울…… 방울이 달린 도라. 특이한 도…….”
감령의 도를 보면서 말을 하려던 모용청의 눈이 커졌다.
“옥면산군…… 감령.”
“오, 옥면산군! 녹림십팔채의 대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