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니가 아는 검주가 아냐 (1)2021.10.09.
“그러면 이제 본주와의 사이를 생각해 보지.”
백달원은 패도적인 기세를 흩뿌려 대는 만우를 보면서 굳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달원이 만우의 기세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아까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말투부터 시작해 목소리하며 눈빛까지 모두 다 바뀌었으니까.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의 검객이었구나!’
백달원은 자신이 어떠한 칼잡이를 준비시켰어도 오늘 이 자리가 무사히 마칠 수 없었을 것이란 것을 눈치챘다. 만우에 대한 판단이 아예 처음부터 잘못 되어 있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적이 많은 이 세상에, 여기 있는 좌익찬까지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으니까.”
만우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본주 하나로 충분하지 않나?”
“…….”
백달원은 답하지 못했다. 목에 뭐라도 턱 걸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늙었다고는 하나 달변에는 자신이 있었던 그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백달원. 본주에게 하나의 거짓도 없이 고해야 할 것이다.”
설운은 질린 표정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어쩐지 이 양반이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를 하면서 사근사근 군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그냥 백달원 저 노인네를 놀래키기 위한 모양이었다. 웬만해서는 거의 표정을 읽어 낼 수 없었던 백달원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으니까.
“열양공을 익힌 놈. 어디 있어.”
“…….”
백달원의 눈이 커졌다. 설운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설운이 입에서 우물거리던 음식을 꿀떡 삼켰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열양공이라니. 이곳에 무공을 익힌 또 다른 자가…….”
펑!!!!!!! 바로 그때, 아스라이 먼 곳에서 폭음이 들려 왔다. 만우와 설운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동시에 일진광풍이 장내에 몰아쳤다.
“무슨…….”
설운이 입을 떡 벌렸다. 그는 만우가 움직이는 것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한번 몰아쳤다고 생각했는데, 만우의 전음만이 머릿속에 남아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인네는 나리가 상대하십쇼. 난 삼밭을 불태운 그 화마(火魔)를 찾은 것 같으니.]
설운의 눈이 번뜩였다. 만우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만우가 백달원에게 물은 것을 반추해 봤을 때 삼밭에 불을 지른 놈이 있는 것이다. 그놈을 잡을 수 있다면 동군영을 구할 수 있는 증좌를 잡는 셈이다.
“백달원!”
설운이 고개를 돌려 백달원을 쳐다봤다. 하지만 백달원은 그 자리에 없었다. 설운은 빠르게 멀어지는 백달원의 기척을 느끼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주 날 호구로 봤네?”
사나워진 눈빛을 한 설운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 화르르르륵!!
“아욱!!!”
방매는 침음을 삼키면서 몸을 날려 장력을 피했다. 그런데 보통 장력이 아니라 화기(火氣)를 한껏 품은 장력인지라 그 열기에 살이 익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 손에서 어떻게 불꽃이 쏟아져 나오는 거야!”
방매는 가마터 뒤에 몸을 붙이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 여기저기에 검댕이 묻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나와! 나오란 말이야!!!”
방매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다른 도공들에게 구박이나 받던 남루한 사내가 열양공을 익힌 고수일 줄이야.
“분명 제대로 들어갔는데.”
가마터 한 켠에 수북하게 쌓인 자기의 파편 속에서 멀쩡한 자기 속 송유를 찾아 낸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몸을 돌린 방매의 앞에 작달막한 남자가 아무런 기척 없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놀란 방매가 수박희로 남자의 다리를 걸면서 가슴을 그대로 밀어 찼다. 하지만 상대는 무릎이 거의 직각으로 꺾였으면서도 뒤로 넘어가지 않고 버텼다. 철판교. 절정의 체술과 근력으로 버틴 남자의 눈이 그 순간 회까닥 돌아가더니 방매를 향해 장력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 있었구나?”
오싹. 방매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동시에 방매가 이를 악물고는 앞으로 굴렀다. 치익!!!
‘닿으면 안 돼.’
방매의 머리카락 몇 올이 타면서 나는 고릿한 냄새와 함께 열기를 품은 장력이 방매의 뒤통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방매는 감히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는 거의 구르다시피 몸을 날려서는 자세를 낮추며 몸을 일으켰다.
“잘 피하네?”
도공은 두 눈에서 귀화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열기를 이기지 못한 소매가 팔뚝까지 타서는 바스러졌지만 도공은 오히려 방매가 신기한 듯했다.
“어떻게 피하는 거지? 내공은 느껴지지 않는데.”
방매의 몸에서는 한 줌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았다. 때문에 도공은 자신의 장력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는 방매가 이해되지 않았다. 방매는 입으로 들어온 흙먼지를 퉷 하고 내뱉었다.
“퉷! 궁금하면 어디 한 번 알아보든가.”
“팔다리 중 하나가 서서히 불타들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보자.”
열양공을 일으킨 남자의 두 손이 일렁거렸다. 들끓어 오르는 화기(火氣)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주변 풍경이 일그러졌다. 방매는 후끈 느껴져 오는 열기에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돌자.’
방매는 도공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움직이기로 했다. 만약 만우와 함께하면서 저런 무공 따위가 눈에 익지 않았더라면 처음 몇 수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우와 함께한 덕에 적어도 보는 눈이 어느 정도 열린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방매의 무재(武才)와 오성은 중원의 후기지수들과 비교해 보아도 뒤쳐지지 않을 수준이었다. 파바밧!!! 맨 처음 도공의 가슴팍을 걷어찼던 짚신의 바닥이 불타 바스러졌기 때문에 바닥의 느낌이 발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방매는 돌멩이 몇 개가 발바닥에 박히는 것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참아 내면서 몸을 굴렸다.
‘불. 불이면 물.’
방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가마터 주변에는 우물이 없었다. 기껏해야 나무통에 담아 놓은 물 정도인데, 그 정도 물로는 열양공을 쓰는 저 도공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듯했다.
‘그러면…….’
위기에 처한 방매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하고 빛냈다.
“맞불.”
산이나 들판에서 불이 크게 나면 오히려 불을 더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맞불을 붙여서 한 쪽으로 몰려가는 불이 더 많은 것을 태우지 못하게 불을 부딪쳐 불을 제압하는 것이다. 방매는 저 도공이 사용하는 화기 넘치는 저 무공을 제압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주변에 물은 별로 없는 대신, 불이 가득한 것도 방매에게 그런 발상의 전환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만 도망가.”
도공은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말을 했다. 아이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매를 죽이겠다는 살기만큼은 진짜였기 때문에, 방매는 이를 악물고 몸을 최대한 땅에 납작하게 붙이며 튀어나갔다. 쾅! 콰가강!!!! 방매가 지나간 자리로 장력이 날아와 틀어박혔다. 다행인 점이라면 도공이 체술이 아니라 장력으로 방매를 태워 죽이려 한다는 점이었다. 근접 박투보다는 장력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익숙한 듯했다. 데구르르!!! 파바박!!
“윽…….”
방매는 몸을 날려 바닥을 굴렀다. 그런 방매의 몸에서 핏방울이 맺혔다. 그러더니 이내 예리한 것에 베인 듯, 일어난 방매의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달그락! 방매가 몸을 날린 곳이 송유 단지를 발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실패작을 깨뜨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땅바닥에 널브러진 날카로운 자기 파편들이 방매의 몸을 할퀸 것이다. 온몸이 쓰라렸지만 방매는 송유 단지를 품에 안으며 곧바로 몸을 날렸다. 펑! 펑!!! 땅이 한 움큼씩 파이며 불꽃이 일었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방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시라도 여유를 부리거나 방심했다가는 저 장력에 통구이가 될 것이 자명했기에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방매는 도공이 날린 장력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땅이 파인 정도를 지켜 본 방매가 다시 몸을 날려서는 가마터 뒤로 몸을 숨겼다. 퍼버벅! 우르르! 도공들이 쉬기 위해 만들어 둔 가벽이 허물어져 내렸다. 도공은 자꾸만 피하는 방매 때문에 짜증이 난 것인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도망가! 어차피 넌 죽어야 돼, 내 손에. 힘들게 죽지 말고 편하게 죽어!”
확실히 말하는 것이 앞뒤가 없었다. 방매는 가벽의 지붕을 지탱하던 볏짚으로 꼬아 만든 줄을 손에 말아 쥐고서는 송유가 담긴 단지에 묶었다. 찰랑찰랑 송유가 넘칠 듯 찰랑거렸지만 방매는 어쨌든 줄을 매달았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읍…….”
가벽의 지붕을 지탱하던 볏짚은 가마터가 비에 젖지 않기 위해 만들어 둔 가림막 아래에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 송유 단지를 매단 방매는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부릅떴다. 훙!!!! 송유 단지를 반대 방향으로 온 힘을 다해 집어던진 방매가 갑작스레 튀어나가면서 도공의 다리를 수박희의 호미걸기로 걸었다. 덜컥!
“안 통해.”
하지만 도공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공을 보내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아예 사전에 막아 버린 것이다. 방매는 그런 도공의 가슴을 다른 발로 밀어 차려고 했다. 덥썩!!! 치익!!
“아악!!!”
방매가 고통스런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방매의 다리를 붙잡은 도공의 손에서 끓어오른 화기가 방매의 발목에 침투했기 때문이다. 방매는 이를 악물고는 몸을 비틀면서 두 팔로 땅을 짚고는 한 발을 송곳처럼 위로 차올렸다. 후웅!!!
“위험!”
도공이 고개를 젖혀 그런 방매의 발끝을 피해 냈다. 그대로 있었다면 턱이 부서질 수도 있었을 강력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피한 줄 알았던 방매의 다리가 순간 채찍처럼 휜 것이다. 위로 차올렸던 다리를 굽혀 도공의 머리를 공격한 방매의 무릎에 타격감이 느껴졌다. 빠악!! 하지만 도공은 멀쩡했다. 그 순간에 다른 손을 들어 올려 방매의 무릎을 막아 낸 것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다리를 비틀어서 빼낸 방매가 쩔뚝거리면서 뒤로 간신히 물러섰다. 그런 방매를 보는 도공의 두 눈에 살기가 솟구쳤다.
“못 도망가겠네?”
방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발목이 붙잡혔기 때문에 기동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런 방매를 보면서 살기 어린 미소를 베어 문 도공의 손에 이글거리는 장력이 노도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방매는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도공이 손을 내지르려는 순간, 도공의 장력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나갔다. 쨍그랑!!!!! 방매가 밀쳐 낸 송유 단지가 크게 원을 그리며 반대로 도공에게로 날아온 것이다. 도공은 방매가 숨겨 둔 한 수가 고작 이것이었다는 것에 비웃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화르륵!!!!! 송유 단지가 깨져 나가면서 그 안에 담긴 송유가 고스란히 도공에게로 쏟아진 것이다. 그것도 불이 붙은 송유가 말이다. 하필이면 화기가 일렁이는 장력이 단지를 깨뜨린 것이 도공의 실수였다.
“으, 으아아악!!!!”
송유에 붙은 불이 도공의 얼굴을 비롯해 전신을 덮었다. 도공의 손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열양공의 장력을 담은 불이 송유를 타고 거세게 그의 몸으로 옮겨 붙었다.
“뜨거워, 뜨거워!!!!”
화르륵!!!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에 놀란 방매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을 정도였다. 방매는 도공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작열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도공에게서 거리를 벌린 방매가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