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옹주와 호위무사(1)2020.10.17.
“화장은 제가 할게요.”
방매가 자신의 얼굴에 손을 뻗어오는 나인들의 손을 턱하고 붙잡았다. 그러자 놀란 나인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옹주자가. 옹주자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저희 상궁과 나인들의 임무이옵니다.”
그러자 김 상궁이 엄한 목소리로 방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방매에게 씨알이라도 먹힐 리가 없었다.
“안 가는 수가 있어요?”
“…….”
방매가 안 간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방매가 갑자기 안 가버리면 곤란한 것은 임금이고, 그렇게 되면 김 상궁 자신과 나인도 성할 리 없다.
“그러니까 줘요. 이래봬도 내가 한양제일매분구라 불린 사람이에요. 화장은 여기 각시들보다 잘할걸?”
김 상궁을 비롯해 설미수의 집에 나온 나인들은 방매에게 입힐 옷들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나왔다. 며칠 전부터 궁 안의 모든 인원을 동원하여 만든 의복이었다. 방매에게 어떤 의복이 잘 어울릴지 알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치수에 맞춰 왕창 만들어놓은 것이다. 미안수부터 시작해 분으로 얼굴색을 환하게 만들고, 눈썹을 가늘고 또렷하게 다듬은 다음 입술연지를 바르자 얼굴이 확 살아났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실력 있는 화공이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상궁과 나인들의 눈이 커졌다.
“어때요?”
이내 확 달라진 얼굴이 된 방매가 동경을 통해 뒤에 선 김 상궁을 향해 묻자 김 상궁이 박수를 쳤다.
“같은 여인이란 걸 알면서도 가슴이 떨릴 정도예요.”
“별말씀을.”
방매가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화장이 끝나자 나인들이 들러붙어 방매에게 이옷저옷을 입혀보고, 머리를 한다면서 부산을 떨었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자 비로소 방매의 꾸밈이 끝났다. 방매는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지만, 김 상궁이나 나인들은 아름답다면서 옆에서 난리를 피웠다.
“이상한데.”
“이상하다니요. 옹주자가를 보고 이상하다는 사내가 있다면 아마 사내가 아니라 고자일 겁니다.”
상궁이 하는 말 치고는 격했지만 그만큼 방매는 아름다웠다. 맨날 패랭이 모자에 활동이 편한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미모가 제대로 화장을 하고 꾸미자 확 살아난 것이다.
“으음…….”
이렇게 하고 나가려고 하자 창피해진 방매가 움찔거렸다. 그때 김 상궁이 방매에게 말했다.
“호위무사도 치장이 다 끝났다고 합니다. 어서 궁으로 가시지요.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김 상궁의 재촉에 등 떠밀려 바깥으로 나온 방매는 눈을 내리깔았다. 볼이 화끈거리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방매가 궁으로 들어간다는 소리에 궁금해서 보러 나왔던 소령이 그런 방매를 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감령과 필두를 비롯한 나머지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그, 그 왈가닥이 진짜…….”
“저 언니도 예쁘네. 우씨…….”
소령은 뭔가 패배한 느낌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감령을 비롯한 필두 등은 방매의 숨겨졌던 미모를 보고서는 대경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노숙을 하고 흙바닥을 구르던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란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뭘 봐요들!”
방매가 그런 이들의 놀란 얼굴을 보면서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감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소리를 들으면 그 왈가닥이 맞는데. 겉모습은 아닌데.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야.”
“요술이라뇨!”
방매의 목소리가 뾰죡해졌다. 그리고 김 상궁을 비롯한 나인들이 감령을 노려보자 감령이 움찔했다.
“옹주자가.”
방매가 궁까지 타고 갈 가마는 설미수 가옥의 마당에 있었다. 그곳에 나와있던 설미수와 조 부인이 모습을 드러낸 방매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머. 정말 아름다워지셨어요, 옹주자가.”
조 부인이 우아하게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방매는 창피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문득 만우가 보이지 않아 방매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만우는요?”
“은공은…… 저기 있습니다. 큼.”
설미수가 입을 가리고 슬쩍 웃고는 방매에게 말했다. 방매는 그제야 빨간 가마 옆에 우뚝 선 남자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검은색에 붉은색이 섞인 쾌자에 늘어뜨린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 틀어올려 갓을 쓴 만우가 허리춤에는 하얀 검집의 이룡검을 찬 채로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
방매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표정이 펴졌다. 자기만 창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오르시지요.”
방매가 모습을 드러내자 가마꾼들이 이마를 땅바닥에 대고 넙죽 엎드렸다. 방매는 사박거리며 걸어와 만우 앞에 섰다. 만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잘 어울리네.”
“……그능 트르.”
만우는 이를 꽉 물고는 방매에게 말했다. 방매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궁에 들어간다고 하니 긴장되던 것이 만우를 보자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호위무사라면서. 그렇게 말해도 돼?”
“야. 자꾸 믈 스크지 믈고 트르(자꾸 말 시키지 말고 타라).”
그래도 자신이 호위무사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있는지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도록 이를 꽉 물고 이야기하는 만우였다. 소매로 입을 가리고 방매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만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안 그래도 방매의 새로운 모습에 적응이 안 되는데, 웃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 미쳤군. 미쳤어. 이 모든 게 미쳤어.’
만우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만우의 심장이 약간 빨라졌지만 만우는 그걸 무시했다. 그리고는 어서 이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만 생각하며 옆으로 한 발자국 비켜섰다.
“타시지요.”
“그래.”
방매는 짐짓 도도하게 대답하고는 가마 안에 올라탔다. 도포처럼 생겼지만 무관들이 입을 때 편하도록 활동복을 고려한 쾌자 자락이 휘날리도록 만우가 돌아섰다.
“은공.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볼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하셔야 합니다.”
설미수가 그런 만우의 옆에 붙어 주의점을 이야기했다. 만우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쇼, 나으리. 기왕에 하는거 제대로 한 번만 하고 두 번 다시 안 할테니까.”
김향과 동군영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꼭두각시 놀음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만우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가마의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야. 만우.”
“시끄러워. 조용히 하고 그냥 가.”
“아니 이거 토할 것 같은데? 욱.”
만우는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이런 방매를 보고 잠시나마 확 달라졌다며 놀랐으니, 그게 다 부끄러워졌다.
“가자!”
만우가 가마 옆에 서서 명령하자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가마의 뒤로 궁에서 나온 상궁들과 나인들이 따라붙었다. *****
“옹주자가 납신다! 길을 비켜라!!!”
“옹주자가 납신다! 길을 비켜라!!!!”
방매는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다고 생각했다. 옹주자가라면서 비키라고 소리치는 소리꾼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걸 싫어서 백성들은 피맛길(避馬)까지 만들어놓고 피해다녔다. 이 소리가 들리면 머리를 조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워서 큰 길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방매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그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드륵
“빨리 갈 수 없어?”
가마 옆에 나있는 작은 창을 연 방매가 만우에게 말했다. 그러자 만우가 이를 뿌득하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가야 된다잖아.”
“천천히 가야 된다고? 이 속도로?”
“그래도 가까우니까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어.”
만우가 가마에 난 창을 드륵하고 다시 닫았다. 역도의 무리들을 참살한데 큰 공을 세운 옹주와 그녀의 호위무사가 입궐한다는 소문은 이미 저잣거리에 쫙 퍼져 있었다. 임금이 은월루를 동원해 소문을 미리부터 냈기 때문이다. 그래야 조정 대신들의 난리를 빨리 잠재울 수 있다면서 임금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했다. 때문에 만우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백성들의 선망 어린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다.
“으으으…….”
다른 사람이 보내는 시선에 무던한 성격이라고는 하나 이런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만우는 속으로 수십 번이나 벌써 발광했지만 겉으로 그것을 드러내지는 못 했다.
“동구녕. 그놈이 빨리 오면 이런 거 안 해도 되는데.”
만우는 이를 뿌득하고 갈았다. 평소라면 순식간에 갔을 길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은 만우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도착했다. 저벅, 저벅, 저벅. 쫓아오던 백성들의 무리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뒤에 남았지만, 광화문 안에 들어선 이후에도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줄어들지 않았다. 옹주자가와 그녀의 호위무사인 전(前) 삼한제일검의 등장에 조정대신들이 보낸 하급 관리들을 비롯하여 궁궐 수비대의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대전까지만 참자. 대전까지만.’
근정전 입구 안으로는 가마가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 근정전 입구 앞에 가마가 도착했고, 방매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조심스럽게 수습하여 가마에서 내렸다.
“으. 죽겠다.”
“느드 죽겠다. 는 픈하게 그므 트그 왔지(나도 죽겠다. 넌 편하게 가마 타고 왔지).”
방매는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방매 뒤로 만우가 섰고 그 뒤로 김 상궁과 나인들이 늘어섰다. 근정전 앞은 텅 비어있었다. 궁을 지키는 위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도 깔아놨네. 많이도.’
만우는 혀를 쯧 하고 찼다. 다행히 근정전 안으로 들어오자 따라오던 하급 관리들이나 수비대의 시선은 사라졌다. 대신 새로운 이들이 저 멀리 나타났다. 김 상궁이나 나인들만 해도 다섯 명이 넘었는데,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궁인들을 뒤에 두고 익숙한 얼굴들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세자다.”
“하아…… 나 그럼 어떻게 해?”
세자와 둘째인 효령군, 충녕군에 공주까지 있었다. 첫째 공주는 출가했으니 둘째인 경정공주와 셋째인 경안공주였다.
“고모님!”
“……에.”
올해로 아홉 살인 세자나 그보다 어린 두 왕자들보다 둘째인 경정공주와 셋째인 경안공주의 나이가 더 많았다. 셋째인 경안 공주의 나이는 첫째인 세자보다 한 살이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였다. 저 나이 때는 본래 여자아이들이 더 커 보이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방매는 왕자들이 고모님이라 부르며 달려오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고모라니, 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상왕에게 성씨를 하사 받았으니 방매는 임금의 여동생이다. 그러니 고모가 맞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인사를 하는 동안 만우는 그에서 멀리 떨어져 먼 산을 쳐다봤다. 괜히 저 안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세자는 만우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주들이 방매의 양옆에 찰싹 달라붙었고, 세 왕자들이 앞장 서 방매와 만우를 대전으로 안내했다.
“아바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