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 옹주와 호위무사(2) (189/400)

189. 옹주와 호위무사(2)2020.10.20.

16553236758654.png“아바마마....”

방매는 숨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나라인 지존이 저 안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동생이고, 한 번 얼굴을 봤다고는 하나 그게 편할 리 없었다.

16553236758659.jpg“어마마께서도 기다리고 계시어요. 옹주자가를 뵈려고요.”

경안공주가 환하게 웃으며 방매의 팔에 매달렸다.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에 대롱거리는 경안공주가 퍽이나 귀여웠다. 하지만 긴장은 된다. 원경왕후 민 씨, 즉 중전마마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16553236758654.png“으. 토할 것 같네.”

만우는 끌려가는 방매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만우와 방매는 상선의 안내와 함께 근정전 안에 들어섰다.

16553236758659.jpg“모든 주변의 이들을 물려라!”

16553236758659.jpg“예, 전하.”

끼익…… 탁. 방매와 만우가 예를 표하고 난 뒤 임금은 근엄한 목소리로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라 명했다. 그리고 임금이 일어서 뒤에 앉은 사관(史官)에게 말했다.

16553236758659.jpg“그대도 지금 이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기록하지 말라.”

하지만 사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관의 거부에 임금은 끙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이런 명령을 하더라도 거부하라고 가르쳤었기 때문이다.

16553236758659.jpg“허면 알아서 각색해서 기록하라.”

16553236758659.jpg“예, 전하. 그리 하겠사옵니다.”

아예 기록하지 않는 것은 안 되도, 각색은 가능하다. 임금은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쌓아올린 이 권위가 만우 앞에서는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조선의 백성이기 이전에 임금 스스로와 동등한 힘을 가진 자이다. 그것이 일개 개인의 힘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지만, 임금은 그런 만우를 귀이 대했다. 언제 어떻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16553236758659.jpg“이제 편히 말해도 좋다.”

1655323675869.png“후하!!!!”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자 만우가 단박에 쓴 갓을 확하고 풀어 던진 다음,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서는 늘어뜨렸다.

16553236789623.png

촤라락! 검은 머리카락이 만우가 고개를 흔드는 것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한 만우의 행동에 임금과 권희달, 방매와 왕자 둘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1655323675869.png“여.”

대전에 버젓이 검을 차고 들어온 것만 해도 만우의 행동은 용납할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갓을 벗고 머리까지 푼 만우가 목까지 채운 깃을 흔들어 보이며 임금에게 건방지게 손을 들어 올리자 왕후 민 씨가 탕하고 팔걸이를 내리쳤다.

16553236758659.jpg“무엄하다! 감히 여기가 뉘 앞인…….”

16553236758659.jpg“되었소, 중전.”

16553236758659.jpg“허나 전하!!!!”

왕후 민 씨는 지혜롭고 당찬 여인이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임금은 지금 그 자리에 있지 못 했을 것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쓸려나간 것은 정도전이 아니라 임금일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16553236758659.jpg“저자는 조선의 국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자. 그러니 나와 동등하다고 보면 될 것이오.”

16553236758659.jpg“예, 예? 전하. 어찌하여 그리 참람한 말씀을.”

중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선의 지존은 임금이다. 그런데 임금이 저 오만방자한 이를 인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16553236758659.jpg“검주. 과인의 말이 틀렸는가?”

1655323675869.png“뭐. 틀린 부분은 없는데.”

만우는 뾰로통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세자의 동생이자 충녕의 형인 효령이나, 두 공주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만우는 방매를 쳐다봤다.

1655323675869.png“애초에 방매랑 인사하려고 부른 거 아닌가? 보여주는 건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16553236758659.jpg“저, 저자가!!!”

16553236758659.jpg“중전! 체통을 지키시오. 저자의 언행은 임금은 과인이 허락한 것이오.”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임금은 일단 중전을 그렇게 찍어 눌렀다. 만우는 그런 중전을 보면서 고개를 까닥였다.

1655323675869.png“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되어 뭐 난감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중전마마.”

16553236758659.jpg“…….”

임금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말하는 만우를 보는 중전의 분노 어린 눈이 임금의 뒤로 향했다. 그런 중전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권희달이 서있었다.

16553236758659.jpg“…….”

스윽. 운검인 그는 중전이 왜 자신을 쳐다보는 지 눈치챘다. 저런 무도한 자가 있는데도 왜 나서서 죄를 묻지 않느냐는 뜻이다.

16553236758659.jpg‘죄송합니다. 중전마마.’

하지만 권희달은 그런 중전의 눈을 슬며시 피했다. 그것을 본 중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운검인 권희달은 임금을 지켜야 하는데, 그걸 회피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전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 상황이 되자 감히 임금 앞에서 무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는 만우를 응시했다.

1655323675869.png“손님이 왔는데 늘 궁은 손님 접대가 소홀하단 말이야.”

만우는 투덜거리면서 대전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어서 대전 위 옥좌에 앉아있는 임금을 쳐다봐야 하는 것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딱히 없었다.

16553236758659.jpg“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부르도록 하지. 이곳은 대전이라.”

임금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방매를 가리켰다.

1655323675869.png“오늘은 방매가 주인공이잖아. 그러니까 할 거 있으면 하지?”

16553236758659.jpg“으음…… 옹주는 가까이 오라.”

임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서있는 방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방매가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임금의 곁으로 다가왔다.

16553236758659.jpg“중전. 인사하시오. 아바마마께서 새로이 사성하신 아이요.”

16553236758659.jpg“……많이 어리군요.”

중전은 만우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방매를 보고는 말했다. 방매는 중전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16553236758654.png“소녀 방매라고 합니다.”

16553236758659.jpg“방매라. 그래, 내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구나.”

중전 민 씨는 방매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만우 일은 만우 일이고, 지금은 새로이 옹주가 된 방매가 신기했기 때문이다.

16553236758659.jpg“양인이라 들었다. 헌데 피부가 곱고 예쁘구나. 아주 어여뻐.”

중전은 방매를 보고는 감탄했다. 확실히 미(美)에 대한 관심은 왕족이나 양반이나, 양인이나 천민이나 여자들에게는 모두 공통된 주제다.

16553236758654.png“가, 감사합니다, 중전마마.”

16553236758659.jpg“그래. 내 무뢰한 때문에 잠시 추태를 보였지만 너를 보고 싶었단다. 상왕전하께서 새로이 딸을 들이셨다고 해서.”

만우는 ‘무뢰한’이라고 말할 때 자신을 째려보는 중전의 시선을 느꼈지만 피식 웃었다.

16553236758659.jpg“그래. 저자와 함께 반란의 무리를 제압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다고.”

16553236758654.png“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방매는 평소에 쓰지도 않는 말을 하려 하니 자꾸만 더듬거렸다. 중전은 그런 방매를 보면서 웃었다.

16553236758659.jpg“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것이니. 곤란한 상황이 벌여졌기도 하고.”

아마 왜의 사신과의 마찰을 이야기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궐까지 오면서 대놓고 광고를 하며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그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16553236758659.jpg“능력 있는 매분구라 들었다. 그래, 치장하는 것은 모든 여인들이 궁금해하는 것이지. 그러니 와서 내게도 알려주겠느냐? 네가 원하는 게 그것이었다면서?”

16553236758654.png“저, 정말입니까?”

방매의 눈이 커졌다. 만우가 궐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무언가를 받기로 했듯, 방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궐 내에서 방매 그녀가 매분구로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이었다.

16553236758659.jpg“그래. 네가 정말로 실력이 출중하다면, 내 못 해줄 것도 없구나. 물론 네가 옹주라는 것은 숨겨야겠지만 말이다.”

16553236758654.png“맡겨만 주셔요. 얼마든지요.”

방매가 눈을 빛냈다. 만우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여인 둘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임금을 쳐다봤다.

1655323675869.png“자식이 많군.”

16553236758659.jpg“할 말이 그건가?”

임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희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만우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중전을 만난 것 따위는 그리 큰 일이 될 수 없었다.

16553236758659.jpg“참. 좌정승 하륜이 이번 일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게 과인에게 꾀를 빌려주면서 부탁한 것이 있네. 그런데 그게 그대와 관련된 일이라.”

만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누가 이런 걸 기획했는지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만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임금은 손을 내저었다.

16553236758659.jpg“해코지를 하려거든 참아라. 그래도 좌정승 덕분에 왜와의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무사히 넘어간 것이니까.”

1655323675869.png“마찰? 그런가? 왜까지는 너무 먼 길이겠지.”

만우의 태연한 말에 임금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가 멀어서 쳐들어가려는 것을 참겠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16553236758659.jpg“어쨌든. 그 좌정승 하륜이 그대를 한번 모시고 싶다고, 연회에 초대를 하겠다고 하더군.”

1655323675869.png“연회?”

만우는 임금을 빤히 쳐다봤다. 좌정승 하륜은 만우와 면식도 없었다.

16553236758659.jpg“명나라 사신 유사길. 그 자와의 대담 자리에서 그대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은혜를 갚고 싶다고.”

1655323675869.png“아. 그 양반이 좌정승이나 되는 양반이었어? 대단하네.”

그제야 만우는 하륜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좌정승이라면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관직이다.

1655323675869.png“본주가 도움을 주긴 줬지. 하지만 연회에 가고 싶지는 않은데. 별로 그런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

여자와 술을 딱히 마다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가서 괜히 낯 뜨거운 찬사나 들으면서 즐길 정도로 그런 자리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떠들썩한 것은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별로 즐기지 않는 만우다.

1655323675869.png‘그것도 이제는 멀리해야지.’

원래 그러려고 조선에 왔다. 하지만 마치 그런 만우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것처럼 계속해서 주변에서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이번에도 동군영의 일만 해결되면 이제 정말 끝이다. 끝.

16553236758659.jpg“역시. 그대라면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말인데, 좌정승이 그대가 만약 거부하면 이 이야기를 하라 전하더군.”

1655323675869.png“내가 거부할 걸 알았다?”

16553236758659.jpg“그래. 음…… 혈세천마? 그래. 혈세천마라고 했네. 헌데 혈세천마라면 무림강호의 별호…….”

쿠궁!!!! 말을 하고 있던 임금의 눈이 커졌다. 만우의 주변으로 암석으로 만든 대전의 바닥이 움푹하고 꺼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근정전의 서까래가 끼긱거리며 무너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16553236758659.jpg“전하.”

그와 동시에 권희달이 임금 앞을 막아섰다. 권희달이 그런 만우를 보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툭하면 기세로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만우의 취미인 모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655323675869.png“누구? 혈세천마?”

하지만 만우는 조선 임금의 입에서 흘러나온 전혀 의외의 인물에 다시 한번 반문했다. 임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만우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세천마. 마교 교주의 이름이 대신인 좌정승의 입에서 나왔다는 소리다.

1655323675869.png“어디지? 좌정승의 집?”

  ***** 만우는 들어갈 때는 차분하게 걸어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궐의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만우는 허공을 날듯이 가옥들의 지붕을 즈려밟아 북촌에 위치한 좌정승 하륜의 집으로 향했다.

1655323675869.png“기다렸다고?”

북촌에 접어들자 만우는 자신을 부르는 듯한 짙은 마기(魔氣)에 조소했다. 노골적인 마기가한 방향에서 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우는 기다릴 것 없이 그곳을 짓쳐들어가 허공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콰지직!!! 처음부터 가리지 않고 기세를 발출한 덕분에 만우가 떨어져 내리는 가옥의 지붕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슬아슬하게 버틴 가옥 사이의 사랑채 앞마당으로 떨어져 내린 만우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1655323675869.png“그래. 여기 계셨다?”

16553236940169.png“검주.”

그곳에는 결연한 표정으로 각자 공력을 끌어올린 투기대의 고수들이 만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좌정승 하륜의 집에 투귀대의 고수들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은월루나 하오문이라고 해도 그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설마 조정의 대신과 중원마교의 고수들 사이에 접점이 있을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진 못 한 것이다.

16553236940169.png“오랜만이오.”

주창이 마련검을 들어올리며 만우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 주창의 표정인 짐짓 여유로워보였지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주창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크허어엉!!!! 그런데 그때 지붕을 뛰어넘어 희끄무리한 물체가 만우 옆에 휙하고 뛰어내려서는 착지했다. 만우가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 펑하는 소리와 함께 호선이 착지했다.

16553236940179.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