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네가 조사의냐(2)2020.04.28.
어느새 여자의 모습으로 둔갑한 호선이 투덜거리면서 나섰다. 만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검을 박아넣은 설운을 보고서는 혀를 쯧하고 찼다. 만우의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설운을 보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갈 것이다. 만우에 있는 힘껏 들이박았는데, 그게 막힌 설운은 반탄력으로 인해 몸의 여기저기가 터져나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둘의 공력이 부딪치면서 뿜어져 나온 여파에 의해 몸 여기저기가 찢어진 것이다.
“알았으니까 치료나 해.”
“무슨 날 이동 의원처럼 생각하셔!!!”
호선은 혀를 삐죽 내밀고 만우의 몸에 손을 얹었다. 도력은 충만하지만 도력을 다루는 법이 어색한 호선답게 눈에 띄게 호전되는 치료술은 아니었다.
“한숨 쉬어라. 어차피 조사의는 여기서, 끝이니까. 목이 붙어있을 필요가 있을 뿐이야.”
만우는 가물거리는 설운의 눈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조사의를 따라왔던 오백의 병사들은 만우와 설운의 충돌을 경험하고서는 등을 돌려 도망가는 와중이었다. 살얼음이 낀 살수로 내려가 강을 건너기 시작한 병사들을 본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운은 가물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만우와 부딪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태산(太山)…….’
신검은 자법, 찌르기를 위한 검법이다. 거기에 자신의 공력을 모두 끌어올려 담았음에도 만우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 했다.
“제법이야. 너?”
만우가 튿어진 옷소매와 옷자락을 들어보이면서 피식 웃었다. 그것을 본 설운의 눈이 풀리면서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설운이 정신을 잃었다.
“자, 그럼 이제 여기 일은 일단락 된 건가?”
이룡검을 척하고 검집째 어깨에 걸친 만우가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다가오고 있는 임금의 군대를 쳐다보면서 히죽 웃어보였다. ***** [주상전하의 토벌군이 조사의의 칠천 역도의 무리를 징벌하셨는데, 주상전하의 위엄에 놀라 살수를 건너 도망치다가 죽은 병사가 수백이오, 수천의 역도는 검을 들어보지도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조사의의 반군이 허무하게 궤멸되었다는 것은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어 삽시간에 조선 전역에 퍼졌다. 그러자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움직이려던 불만 세력들은 다시 꽁꽁 숨어버렸고, 임금은 즉위 초기에 자신의 장악력과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주게 되었다. 상왕은 함께 환도하자는 임금의 청을 거절하고 평양으로 향했다. 임금은 부원군과 내관 등을 보내 계속해서 모시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반군의 수괴인 조사의와 조력자인 조홍, 박만 등을 비롯하여 김권, 허형 등 주모자들의 식솔들을 수도로 압송하기 위해 관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중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바로 어사 동군영이었다.
“어사 동군영의 공로는 환도하여 공에 맞게 치하할 것이다!”
임금은 동군영을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칭찬했다. 동군영은 감읍하여 허리를 몇 번이나 조아린 뒤에 임금의 환도 행렬에 포함되어 한양으로 향했다. 만우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땅이라도 주시려나?”
방매는 잔뜩 기대를 해서는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임금은 당장 만우 일행을 위해 임시로 지니고 다니던 어가를 선뜻 내주었다. 그것을 수레로 개조한 것이다. 무려 어가다. 어가(御駕)를 수레로 개조한다는 말에 몇몇 이들이 거품을 물었지만 임금이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고 약조를 하였고, 방매가 상왕에 의해 ‘이(李)’씨 성(姓)을 사성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걸로 딴지를 거는 이들은 사라졌다. 어쨌든 그 덕분에 슌스케만 죽어나가고 있었지만 방매는 잔뜩 들떠있었다.
“땅이라니?”
“왜. 공을 크게 세우면 땅도 주고, 막 그러잖아.”
방매는 신이 나서 팔을 붕붕 돌렸다. 옆에서 듣던 동군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 멈칫했다. 방매가 어찌되었건 왕가의 일원이 됐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식읍이 내려질수도 있었다.
“길목 좋은데 주셨으면 좋겠다. 그거 팔아서 조선팔도에 객주 세우게.”
“그걸 판다고?”
“네, 왜요?”
동군영은 해맑은 방매를 보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임금이 내린 식읍을 팔 생각을 하다니. 만우는 이룡검을 쓰다듬으며 방매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객주에 집착하는거야? 객주 지어서 뭐 어쩌게? 그것도 조선 팔도에?”
조선 팔도에 객주를 지으면 거길 순시하는 것만 해도 일 년이 꼬박 지나갈 것이다. 왜 그 귀찮은 짓을 사서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만우는 지었다.
“다 필요가 있어. 에흠. 옹주가 하는 일인데.”
방매는 옹주라는 신분이 가지는 위치를 만끽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임금을 따라온 내관들에게 하도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이후부터였다.
“옹주가 객주라. 퍽이나 기뻐하겠네.”
“뭐! 내가 하겠다는데!!”
방매는 시시덕거리면서 웃었다. 감령과 필두는 산적과 해적 출신 답게 재물을 바랬고 마익후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문형일은 생각이 깊어보였다.
“저, 저는 만약 아바마마께서 무언가를 주신다면 꼭 무공서를 받고 싶습니다!”
임금이 왔음에도 부친이 아니라 만우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승낙을 받아낸 양녕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만우는 그런 양녕의 기대를 무참이 짓밟았다.
“세자 나리. 세자 나리는 받을 일이 없죠. 오히려 큰 사고를 치고 나오셨는데.”
“검주! 말씀이…….”
“왜. 죽을 뻔했으면서 심하다고 하려고?”
양녕이 시무룩해 하는 것을 본 이찬이 발끈했지만 만우가 힐끗 쳐다보자 이찬이 깨갱했다. 만우는 아무 말 없는 척사영을 쳐다봤다.
“그쪽 아씨는. 집에 안 갑니까?”
척사영이 귀한 신분이란 것을 들은 만우는 듣는 귀가 있을 때는 형식적으로나마 존댓말을 썼다. 척사영은 그게 부담스럽다는 듯 표정이었지만 만우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은인을 따를 생각입니다.”
“……뭐. 나도 나쁘진 않은데 말이야.”
화경의 고수가 자신을 따라와 수하를 자처한다면 만우는 꺼려할 이유가 없다. 자신 대신 귀찮은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척사영은 그 말에 볼을 붉혔다. 그것을 본 방매가 볼을 부풀렸다.
“저 여자는 왜!!! 아주 좋아 죽겠나 봐?”
만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방매를 쳐다봤다. 만우는 그런 방매에게 말했다.
“너도 한양가면 끝이야. 길잡이 필요 없어 이제.”
“…….”
만우의 말에 방매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게 끝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한 듯 했다. 동군영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만우. 말이라도 좀 예쁘게 하면 어디 탈이라도 나는가? 그래서 몇 달을 함께 한 사이인데 말이야.”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잖수.”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만우는 계속해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형일을 힐끗 쳐다봤다.
“형일아.”
“네, 대장.”
문형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만우의 말에 대답했다.
“한양으로 가면 한 육 개월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문형일은 뺀질거리고 꾀를 잘 부리지만 중원에서 거부하는 만우를 끝까지 묵묵히 따라온 두 명 중 한 명이다. 그가 일방적으로 만우를 따라오는 입장이었지만, 만우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정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 얼굴에 서린 고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해결하고 와도 된다.”
“대장님.”
문형일이 놀란 표정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멋쩍은 듯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문형일은 자신의 변화를 만우가 알아채주었다는 것에 감격했다. 만우의 강함에 매료되어 짝사랑 하듯 쫓아다닌 것이 드디어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임금이 제 스승님의 지인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하시면서 머물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문형일은 그런 만우에게 숨길 것이 없다 생각했다. 만우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재에 욕심이 많은 것이 조선의 국왕이란 것을 만우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네게 난 구속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지 않아?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네 스승이란 분, 그리워했잖아. 중원에서도 계속.”
문형일이 천축국에서 무슨 일 때문에 중원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 만우는 그에게 자세하게 물어본 적 없었다. 무슨 문파의 사형 관계도 아니고, 낭인들의 세계에서는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형일은 자신이 좋아서 만우를 쫓아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우는 굳이 그런 문형일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건 저놈도 마찬가지고.’
만우는 우직하고 과묵한 마익후를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색목인인 그가 왜 중원을 유랑하게 되었는지 만우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익후가 묻기 전에 먼저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하는 편도 아니었고 말이다.
‘자유를 줘야지. 이제 난 더 이상 떠돌이가 아니니까.’
만우는 한양에 가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지난 5년 동안 쉬지 않고 저 넓은 중원을 유람하면서 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당분간은 한양에 자리를 잡고 쉬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충분히 쉬면서 은월루가 김향을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볼 셈이다. 김향 스스로가 은월루나 왕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 하였고, 은월루주 어리는 그런 김향을 품었다. 그러니 김향이 그 안에서 구박을 당하지는 않는지 그런 것들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세계제일검.’
만우의 시선이 이룡검으로 내려갔다. 이룡검은 천하를 논할 수 있는 검이라 만우는 생각했다. 젊지만 장인의 혼을 불태울 줄 아는 간장이 천년한철을 삼개월 동안 밤낮 없이 두드려 만든 검신에, 수백 년을 묵은 이무기의 비늘과 질 좋은 물소의 뿔을 검병 삼은 보검이 바로 이룡검이다. 마교 교주의 신검이라 불리는 마련검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것이라 만우는 장담했다.
‘세계제일검으로 만들어 달라 하였지.’
만우는 간장을 쳐다봤다. 장비처럼 생긴 간장은 약관이 훌쩍 넘게 생긴 노안이지만 틀림없는 약관의 청년이다. 천하제일야장을 꿈꾸는 간장이 자신이 만든 검이 천하를 논하는 것을 넘어 세계의 제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김향을 충분히 돌보고 난 뒤, 머무는 것이 귀찮아지면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 슌스케가 온 동영, 왜(倭)만 해도 만우의 흥미를 당겼기 때문이다.
‘중원이나 조선과는 다른 독특한 기예가 발달한 곳 같으니까.’
명이나 조선, 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라였지만 무예는 그 거리와는 상관없이 매우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왜도 만우의 무(武)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슌스케라는 쓸 만한 길잡이가 생겼을 때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양에 가면 네놈과 네놈. 중원으로 돌아가도 좋다.”
만우는 대경하는 감령과 필두의 얼굴을 보면서 피식하고 웃어 보였다. 중원에서는 도깨비나 귀신처럼 불리는 것이 장강수로십팔채와 녹림십팔채의 대채주들이다. 그런 그 둘이 하필이면 자신에게 걸려 조선으로 끌려와 무공에 눌려 팔자에도 없는 꼬붕 노릇을 했으니 이제는 놓아줄 때도 됐다. 솔직히 한양에 만우가 머물면 그 둘이 필요 없기도 하고 말이다.
“도, 돌아가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정말 이십니까?”
단순한 감령은 반색했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필두는 더럭 의심부터 드러냈다. 만우는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할 일도 없으니까. 중원 가면 좀 착하게 살고.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시비 걸지 말고.”
감령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만우가 이런 괴물인 줄 알았더라면, 만우가 있는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계속해서 의심하는 필두에게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싫어? 싫으면 넌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