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네가 조사의냐(3)2020.05.02.
“아, 아닙니다, 대협!”
필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강의 왕으로 살아가던 시절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공도 처음 올 때보단 늘었으니까. 아예 얻은 것이 없는 건 아닌가?’
필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만우에게 억지로 끌려온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얻은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무림인에게 가장 큰 것을 얻은 셈이다. 무공의 성취. 무림인은 무공으로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만우와 함께 하면서 그 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니 얻은 것이 없다 할 수는 없었다.
“그래. 하는 것도 없이 입 두 개가 느는 것보다는 낫지.”
만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마익후를 쳐다봤다. 마익후는 만우의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려 파란 눈으로 묵묵하게 만우를 쳐다봤다.
“형일이도 내 곁을 떠나는 시간이 있을텐데. 너는. 네 나라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냐?”
마익후는 구라파 출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지 만우는 짐작할 수 없었다. 마익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어떤 것이든 괜찮다.”
“그렇다면…….”
마익후는 우묵한 눈으로 간장을 쳐다봤다. 간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마익후는 고개를 돌려 만우에게 말했다.
“쇠 두드리는 일. 하고 싶습니다.”
“야장일을?”
만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익후가 그런 쪽에 관심이 있을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마익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줄 아는 것이 있더냐?”
마익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만우의 눈이 더 커졌다. 마익후는 타고난 신력을 타고 났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근골이 범상치 않았다. 그게 야장일로 기른 것인 모양이었다.
“고향……에서 몇 번 조수.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마익후가 말한 적이 없던 그의 과거의 파편이었다. 만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간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파안대소했다.
“역시!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불 냄새랑 쇠 냄새가 난다 하더니만. 아주 좋은 조수로 쓸 수 있겠수다! 형님! 크하하핫!!”
“마익후의 힘은…… 황소보다도 세니까 쓸 만할 것이다.”
“정말이오? 쇠를 두드릴 때 이제 좀 편해지겠구려! 크핫핫!”
간장은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마익후 옆으로 다가가 마익후를 이리저리 관찰하듯 살펴보기 시작했다. 만우는 그런 간장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때, 만우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슌스케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넌 뭐.”
“주, 주인님. 저는…….”
“왜. 외팔로 너네 나라 가서 죽기라도 하게?”
“…….”
슌스케는 간절한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외팔의 검객이 된 슌스케는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만우가 조금씩 감질나게 가르치는 가르침이 확실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체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어. 하체가 좋아지니 쾌검에도 도움이 되고. 게다가 그 찌르기는…….’
슌스케는 처음에는 만우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도록 그렇게 달리고 나서는 이상하게 숨 참는 연습을 시키고, 가장 기초적인 찌르기 연습이 쌓여가자 자신의 변화를 귀신 같이 눈치챘다. 한 팔이 잘렸다곤 하지만 초절정 고수의 감각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답이야. 찌르기!’
일격필살에 가까운 찌르기. 그 찌르기에 강대한 공력과 극쾌가 담긴다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한 팔을 잃어버린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슌스케의 팔을 날려버린 것은 만우와 이성계지만, 강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수모를 감내할 수 있었다.
“넌 있어.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왜로 갈거니까.”
“왜? 왜로 간다고????”
만우의 말에 슌스케가 놀라기도 전에 방매가 고개를 훽하고 돌렸다. 만우가 흠칫했다. 방매의 두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넌 객주 차린다면서. 식읍지 하사 받아서.”
“하. 만우. 진작에 느낀 거지만 넌 돈에 대한 감각이 너무 없어.”
방매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내가 매분구를 하고 있지만, 가장 큰 돈을 벌어들이는 건 무역이야. 그중 돈을 가장 많이 벌어들이는 건 송상(松商)과 내상(萊商)인데, 알아?”
만우가 알 리 없었다. 눈을 굴리고 있는 만우 대신 동군영이 대답했다.
“송악, 개경을 거점으로 하는 상인들과 동래를 거점으로 하는 상인들 말인가?”
“역시 나리는 아시네요.”
방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삼, 도자기를 내다팔고 비단을 들여오는 게 송상이고, 왜에서 은을 들여오는 것이 내상이야. 그런데 그 돈이…… 어마어마하거든!”
“삼? 삼을 파는 건 불법…….”
“법을 어기지 않고 어떻게 큰돈을 벌겠어. 안 그래?”
어사를 앞에 놓고, 옹주가 된 이가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와락 찌푸린 동군영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방매는 동군영의 표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 여자도 같이 갈 거잖아. 그렇지?”
방매는 척사영을 휙하고 돌아봤다. 척사영은 만우가 왜로 갈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얼굴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당연합니다. 은공이 가시는 곳이니까요.”
만우는 척사영을 빤히 쳐다봤다. 진짜냐는 표정이었다. 척사영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그녀는 곡산척가가 배출해 낸, 어찌 보면 최강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곡산척가를 놔두고 왜로 간다니. 가문에서 허락할 리 없다.
“척가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때문에 가주님이나 원로분들께서도 안 된다고 하실 수 없을 겁니다.”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척사영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엄청난 무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전부 아이만도 못 했다. 지금도 척사영은 당연히 세가의 어른들이 내뱉은 말을 지킬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만우는 그들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나도 갈래!”
“객주 한다면서.”
“만우 너도 한양에 어느 간은 있을 거 아니야. 그동안 객주 해보고. 똘똘한 놈 뽑아서 맡기면 돼. 왜에 가서 어마어마한 재물을 벌어오는 게 더 나으니까!”
방매는 눈을 반짝였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달간 방매와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방매가 가진 잡지식이 꽤나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해라.”
“아싸.”
그런 방매를 보는 척사영의 눈가가 잠시 가늘어졌지만 만우가 쳐다보자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동군영은 그런 만우에게 말했다.
“어디에 있는지 말해놓게. 그러면 내가 놀러갈 테니까.”
“놀러오긴 어딜. 오지 마슈. 괜히 귀찮기만 하니까.”
“검을 마저 가르쳐줘야지? 그리고 나도 양반이야. 양반 하나 알아두는 게 만우 자네에게 나쁠 것은 없어.”
동군영은 자신만만하게 검지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하지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왕한테 가면 되지.”
동군영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만우는 다른 이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항상 왕이 있는 곳까지 알아서 들어가곤 했었다.
“뭐, 검이라면. 가끔 와도 되고.”
동군영과도 한양에 도착하면 헤어져야 한다. 어사는 어디까지나 임시직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사직을 훌륭하게 수행을 한 동군영은 영전할 것이 분명했다. 만우와 함께 다니면서 큰일을 여러 번 겪고, 검까지 배운 덕분인지 소심증이 많이 사라졌기 떄문에 이제 그의 총명함이 막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왕이 보석이 되어가고 있는 동군영을 다시 기사관 같은 자리에 묶어둘 리 없다.
“어디에서 살 건데? 북촌? 전하한테 부탁하면 북촌에 있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도 줄 텐데.”
이제는 만우가 어디서 살 것인지 궁금한 것인지 방매가 만우를 콕콕 찔러댔다. 그렇게 방매와 잠깐 투닥거리던 만우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응?”
매 한 마리가 허공을 날아 뚝하고 갑자기 떨어졌기 때문이다. 만우는 찰나의 순간에 뛰어난 안력으로 그 매의 다리에 묶여 있는 서신을 발견했다.
“전서구네.”
“전서구?”
동군영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하지만 이미 매는 사라진 뒤 오래였다. 만우는 동군영에게 말했다.
“매의 다리에 서신이 묶여 있었수다. 전서구인 것 같은데.”
“전서구라니. 누가 감히 전하께서 행차하시는데 전서구를 보낸다는 말인가?”
왕에게 전서구를 보내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위다. 그 무례함을 각오할 정도로 급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조선 안에서 왕에게 무언가를 알리고 싶다면 반드시 인편이 와야한다. 동군영의 혼잣말을 들은 만우는 갑자기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을 봐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만우의 신형이 바람 한줄기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만우가 사라지자 남은 이들만이 눈을 꿈벅거리며 만우가 서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
“무엇이라? 괴한이 궁을 습격하였다?”
“예. 그리 적혀 있사옵니다.”
임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반란에 이어 무도한 일이 또 다시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금군(禁軍)들은 대체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궁을 지키는 것은 금군들의 주업무다. 그렇기 때문에 궁궐에 무도한 이들이 침입하였다 하는 것은 곧 금군들이 제 임무를 다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한 궁의 오방을 지키는 오위(五衛) 역시 뚫렸다는 소리다. 임금의 진노를 바로 앞에서 받은 이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무도한 무리를 막아선 금군들 백여 명이 사망하거나 크게 다쳤다고…… 송구하옵니다 전하.”
“백? 적은 몇이나 들어왔다고 하더냐?”
“여섯, 여섯이라 하옵니다.”
“여섯!!!!!”
임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전 같았으면 고작 여섯이 어떻게 궐 안에 들어와 금군을 백이나 죽일 수 있었겠냐며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우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권희달의 무위 역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은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어찌하여. 과인을 노렸다면 궐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대체 무엇이 목적이길래…….”
임금은 설마 마교 고수들이 궐을 습격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단지, 무공을 익힌 고수가 궐에 침입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금위와 겸사복이 나서자 도주를 하였다고 하온데…….”
금군은 궁궐을 수호하기 위해 가려서 뽑은 최정예군이다. 금군은 크게 세 부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무예 실력이 뛰어나고 신체 조건이 좋은 자들만 가려서 뽑은 부대가 우림위(羽林衛)다. 2000명으로 이뤄진 그들은 왕의 친병이다. 그런 우림위보다 숫자는 훨씬 적지만 정예화 된 이들이 바로 내금위다. 그들은 100명에서 200명 이내의 숫자를 유지하는데, 주로 임금의 침전과 대전, 그리고 왕족에 대한 경호를 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뛰어난 자들은 겸사복에 속해있었다. 겸사복은 단 오인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돌아가면서 2인 1조로 임금의 초근접 경호를 선다. 물론 주로 그 일은 겸사복장인 권희달이 해오고 있었지만 겸사복은 최소 절정 이상의 고수들로만 이뤄져 있었다.
“내금위와 겸사복까지 나섰는데도 적이 도주하였다?”
“예 전하.”
“놓친 것이로구나. 내금위와 겸사복보다 뛰어난 고수들인 게야. 그렇지 않나?”
임금은 탄식하듯 권희달에게 말했다. 권희달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보였다.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겸사복의 실력이 침입자들보다 약해서 놓친 것이니 수장인 그의 잘못이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
그때 권희달이 고개를 돌려 천막 바깥을 쳐다봤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것처럼 막사의 문이 위로 들리더니 만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가 있게.”
“예, 전하.”
감히 임금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불쑥 들어온 만우를 신하가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임금은 신하를 내보냈다. 신하가 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선 만우는 신하가 나가자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지? 궁궐이 어찌 되었다고?”
만우는 이미 멀리서부터 하는 이야기를 다 들은 상태였다. 권희달이나 임금은 이제 그런 것으로는 놀라지도 않았다. 임금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한양으로 돌아가 어찌된 일이지 알아봐줄 수 있겠나?”
“궁궐에 침입자라…….”
“이천의 우림위를 뚫고, 내금위와 겸사복의 협공을 받고서도 도주한 이들이네. 육인이라 하였어. 틀림없이 무공을 쓰는 자들일 것이야.”
명에서 많은 무림인들이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궁에까지 저들이 침입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만우는 임금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