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검주와 왕의 자식들(3)2019.03.26.
무림십좌(武林十座)의 일인.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괴물들이 산다는 중원 무림에서도 가장 강한 열 명 중에 한 명! 그것도 이곳, 조선 출신이기 때문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인 일좌(一座)에 앉지 못 했을 뿐, 실질적인 실력으로만 따지면 중원최강, 아니 천하제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별도 첨부로 그가 오 년 간 무림을 독보하면서 남긴 무수한 업적들까지 세세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천하오시(天下傲視). 검주가 별 세력이 없는 홀몸인데도 불구하고 독보강호가 가능했던 데에는 괜히 검주를 건드려 봤자 하등 이득이 없다는 정사마(正邪魔)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건드렸다가 잘못 물리면 괜히 피를 볼 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를 죽일 자신도 없기 때문에 나서는 자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제, 제가 혹시라도 실수를 한다면…….”
삼복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십령수가 삼복을 쳐다봤다. 진짜 실수할까 봐 더럭 겁이 난 것이다.
‘아무리 검주가 모든 하오문을 박멸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십령수는 삼복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검주를 대할 때 어떻게 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지를.
“절대로 머리를 굴리지 마라. 거짓말을 해서도 안 돼. 귀신처럼 눈치를…… 아니 그냥 귀신이라고 생각해라.”
“히익.”
어째 삼복은 더 겁을 먹었다. 하지만 십령수는 검주를 대면할 때는 차라리 겁을 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네가 약자임을 계속해서 주지시켜라. 하오문 한양지부장? 검주의 콧바람 한 번이면, 아니 총분타에 보내는 서찰 하나면 그 날로 사라질 것이니.”
“마, 만약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무리한 부탁이라도 하시면…….”
“총분타에 알리면 된다. 무조건 해야 한다. 거부란 없어.”
사실 검주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자들만 응징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는 자들은 파멸시켰으며 약자는 건들지 않았다. 검주가 중원행을 했던 이유는 중원을 유람해 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이유 없고 사연 없는 힘이란 없었다. 힘을 가진 이상 필연적으로 힘이 있는 다른 이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이 내린 운명이었다. 그런 과정들에서 생겨난 사소한 오해들이 더 큰 오해를 부르고, 종내에는 검주(劍主)라는 광오한 칭호와 함께 하나의 공포의 대상처럼 군림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에게 여러 번 데인 정사마의 각 문파들과 세력들이 검주를 대상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만우는 오히려 천하를 유람하는 것이 더 편해졌기 때문에 그들이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해서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검주는 무림강호의 절대불가촉(絶大不可觸)으로 거듭났다. 대문파에게는 자존심과 명예를 뭉텅이로 깎아먹는 존재로, 그리고 다른 중소문파들에게는 잘못 보이면 그날로 멸문할 수 있는 공포의 존재로.
“약해 보이면 된다. 무조건.”
십령수는 삼복에게 말했다. 삼복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무공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그래도 몇 가지 기술을 배워 밑바닥에서 살면서 제 몸 하나 지키고 하오문을 운영하기에 부족한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검주? 그런 자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섶을 짊어 매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반드시 전해드리거라. 불편하지 않으시게, 언제든지 부탁할 것이 있으시면 오셔도 된다고. 하오문은 언제나 검주 만 대협을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라고.”
“예. 예 알겠습니다.”
삼복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얼굴이 하얗게 탈색된 채로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내 소가 끄는 달구지가 쿠르르 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두 번 다시는 보기 싫다. 정말로.”
그 소리를 들으며 십령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험, 험.”
세자는 어색한 분위기에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좌익위 이찬이 고개를 숙이며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운도 옆에서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내 좌익찬에게 부탁해 은밀하게 나온 것인데, 그대가 잠행을 망쳤구나.”
세자는 이찬을 꾸짖는 어투로 말했다. 그래봤자 열두 살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지만 이찬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허나 소장의 역할은 세자 저하의 안위를 책임지는 일이옵니다.”
“그래서 좌익찬을 대동하지 않았더냐.”
세자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찬은 설 부사의 저택에 자신과 설운에 필적하는 고수 넷과 그를 뛰어넘는 고수가 머문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단지 이찬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세자와 충녕을 데리고 서둘러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디 있는지 기척도 읽히지 않는다.’
분명 박수를 쳐서 일 수에 자신과 설운, 그리고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진 다른 이들을 제압한 이의 내공은 심후했다. 그런데 그런 심후한 내공을 가진 초강자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이찬이 예상했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증거였다. 그런 실력자가 있는 곳에 조선의 미래를 책임질 세자와 충녕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세자와 충녕을 데리고 환궁을 해아만 했다.
“내 명나라 이야기가 듣고 싶어 예까지 왔건만. 그렇지 않으냐?”
“형님. 저희 때문에 좌익위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만 환궁하시지요.”
세자에 비해 충녕대군의 눈치는 과연 비상했다. 좌익위의 안색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챈 것이다. 이찬은 설미수를 쳐다봤다. 이찬의 눈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강자가 이 저택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설미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 부사께 여쭙니다. 정말 그들이 명나라에서 온 이들입니까?”
설미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일복을 통해 다 들은 후였다. 하지만 그런 설미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좌익위와 좌익찬이라면 계방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예를 자랑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과 비견될만한 실력자들이 만우를 찾아온 것이다.
‘은공의 수하가 더 있었던 모양이구나. 게다가 계방 무인들의 합공을 버텨낼 정도라니.’
그는 문형일과 마익후가 감령과 필두에 필적하는 고수란 것은 몰랐다. 그들이 내공이 소진되어 그렇다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중 한 명이 원래 조선에서 살던 백성이었다고 하네. 때문에 명에서 조선으로 함께 가는 것을 청하기에 허락하였네.”
“그자. 혹시 무림인이라는 족속이 아니옵니까?”
설미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운은 나이가 어려 지식이 아직 부족하나 이찬은 그렇지 않다. 그는 무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라성 같은 무인들이 즐비하다는 중원의 무림에 대해 한 자락 들은 풍월이 있을 것이다.
“무림? 그것이 무엇입니까. 처음 듣는 단어입니다.”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오자 먼저 반응한 것은 충녕대군이었다. 모르는 것에 대한 탐구심으로는 궁궐 내에서 충녕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원체 호기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궁궐에서도 그 나이 대에 독파할 수 없는 서적까지 읽고 있는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심지어는 군왕이 충녕에게 잠을 자도록 친히 어명을 내릴 정도였으니 그의 탐구심에 대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설미수는 이찬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이찬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대국에는 일반 백성들이 사는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세상?”
“예.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백성들은 잘 모르는, 무인만의 세계가 있고 그것을 무림이라 부른다 하였습니다.”
“무인의 세계!”
무인의 세계라는 말에 세자가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자는 학자보다는 장수의 자질이 넘치는 성격이었다.
“정녕 그런 세계가 있단 말이냐?”
“예. 저도 명나라에서 온 무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수가 수십 만을 헤아린다고 하더이다.”
세자와 충녕대군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인이 수십 만이 넘어간다는 소리는 군대를 제외하고도 싸울 수 있는 정병이 수십 만에 달한다는 소리다.
“그, 그렇다면 큰 일이 아니더냐. 그 자들을 징집하여 군병으로 사용한다면…….”
“그들을 제어하는 무슨 방법이 있을 터. 대국에서 그것을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다만.”
세자와 충녕대군이 차례대로 말했다. 이찬은 이어서 말했다.
“대군마마의 말이 맞사옵니다. 그들은 대국의 홍무제를 도와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운 일등공신이라 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관직과 녹봉 대신 그들만의 세계를 인정받았다 하더이다.”
“그리하여?”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어 관과 무림은 서로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홍무제에게서 받아냈다 하더이다.”
“허어. 정녕 명은 신기한 곳이로다!”
충녕대군이 무릎을 때리면서 감탄했다.
“우리 조선에는 그런 무인의 세계가 없더냐?”
세자가 두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만약 있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그런 이들을 찾아 나설 기세였다. 하지만 이찬은 고개를 저었다.
“고려에는 있었으나 조선에는 없사옵니다.”
“어찌하여!”
세자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원래 태조께서 가별초란 사병을 키우셨던 것을 알고 계십니까.”
“고려에는 사병의 양성이 가능했으나 삼봉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하여 사병혁파를 주장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의 기세를 꺾었다.”
“그러하옵니다.”
삼봉 정도전의 이름이 충녕대군의 입에서 나왔다. 설미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삼봉의 이름을 함부로 발설하는 것은 금기시된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설 부사. 이곳에는 형님과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흠, 흠.”
설미수는 아홉 살짜리 아이에게 자신의 표정을 들킨 것 같아 얼른 표정을 고쳤다.
“어쨌든. 그리하여 조선에는 그런 무림이란 곳이 없사옵니다.”
“허어…… 안타깝다.”
세자는 고개를 저었다. 충녕이 눈을 반짝였다.
“아닙니다, 형님. 우리가 아까 만났던 그자. 그자가 무림에서 온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맞다!!”
만우를 깜빡 잊었던 세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웃었다. 설미수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좌익위가 여기까지 왔으니 환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허나 좌익위 이찬과 좌익찬 설운은 들으라.”
“예. 저하.”
세자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 매우 능숙했다.
“무림에서 왔다는 조선의 백성. 그자를 데리고 함께 환궁하겠다.”
설미수와 이찬, 설운의 얼굴이 졸도할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
“흠. 흠.”
삼복은 의복을 단정하게 갈무리했다. 첫 인상이 중요한 법이다. 십령수가 그들과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다행히 삼복은 아니었다. 감령이 십령수를 잡아갈 때 삼복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깔려 기절했었으니까.
“이, 이곳이냐?”
“예. 지부장 나리.”
하오문도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나리란 말을 듣자 삼복은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지부장 자리를 날릴 수는 없지.’
사실 하오문도나 지부장인 삼복이나 같은 신분이다. 하지만 자신은 지부장이란 이유만으로 관직을 얻거나 양반이 된 것도 아니면서 나리 소리를 듣고 다닐 수 있었다.
“흐으으……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이런 대궐 같은 저택에 계시다는 말이냐.”
삼복은 부르르 떨었다. 그가 서 있는 저택의 거대함이 삼복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 했다. 대궐 같은 저택이었기에 차마 문을 두드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
“중원에서는 천하제일인. 이곳에서는 이런 대궐이라니.”
삼복은 조심스럽게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순간,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아이쿠…….”
털썩 잔뜩 힘을 준채 긴장하고 있었던 삼복이 헛손질을 하며 그대로 엎어졌다. 땅바닥에 넘어진 삼복의 눈에 비싼 가죽으로 만든 반질거리는 가죽신이 눈에 들어왔다. 미투리가 아닌 가죽신은 지체 높은 양반들만 신는 것이다.
“웬 놈이냐!”
아니나 다를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실 이찬은 도성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인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에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보다 강한 무인까지 있었으니까.
“히익! 죄, 죄송합니다요!”
힐끔 고개를 들었던 삼복이 대호처럼 으르렁거리고 있는 이찬의 서슬에 깨갱거리면서 몸을 얼른 일으켰다.
“되었다. 돌아가자.”
“예.”
어린 목소리가 이찬을 만류하자 이찬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다행히 삼복을 지나쳐 일련의 무리들이 바깥으로 나갔다.
“후우, 후우. 죽을 뻔했다.”
양반이라고 해서 평민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노비를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폭력은 얼마든지 허용됐다. 몇 가지 재주를 안다고 해서 양반을 우습게 보고 달려들었다가는 제대로 경을 칠 것이 뻔한 것이 바로 조선 사회였다.
“누구지?”
삼복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하오문 지부장이다. 중원처럼 거대한 정보망을 구축하지는 못 했지만 하오문 총분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인해 조직을 확장하고 있었다. 최소한 한양에서만큼은 삼복이 구하지 못할 정보가 없다.
‘계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