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검주와 왕의 자식들(2)2019.03.23.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내공이 한 줌도 없는 상황에서 합격술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기도 해풍과 해수에 다 녹슬고 삭아 형편없었다.
“어디 어르신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느냐!”
“으하하하! 잘됐다! 이 집이 뉘집인 줄 알고 이 난리냐!!”
그때 집 안에서 감령과 필두가 뛰쳐나왔다. 표홀한 신법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무인들이 움찔했다. 설미수의 저택 안에서 나왔는데 입고 있는 옷이 무명천으로 만든 하인들이 입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저놈들은 또 무엇이냐!”
이찬이 와락 인상을 썼다. 자신이 처음 보는 놈들이 자꾸만 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옥면산군?”
“역수교어!”
문형일과 마익후가 그 둘을 알아보고는 경악했다. 중원에 있어야 할 산적과 수적의 두괴가 조선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감령과 필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기에 쳐다봤더니 거의 거지꼴이지만 무림에서 유명한 두 인사인 괴검과 괴권이었기 때문이다.
‘만 대협을 따라온 건가.’
‘근데 왜 같이 안 오고?’
감령과 필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둘이 검주를 따라다니는 수족이란 것은 중원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안 그래도 조선으로 오는 길에 그 둘이 동행하지 않아 궁금해했는데, 길이 엇갈렸거나 이들이 뒤따라 온 모양이었다.
[잠깐. 감령!]
그때 필두가 감령에게 급히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감령이 필두를 쳐다봤다.
[저, 저들이 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뭐가 어떻게 돼.]
감령과 필두는 서로 전음을 하면서 계방의 무인들과 어울렸다. 만우가 살상을 엄금했지만 계방의 무인들은 감령과 필두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지금은 우리가 저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 않은가.]
필두의 머리는 비상했다. 특히나 자신의 안위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저들이 오면, 우리는 정말 노비 취급을 받지 않겠나?]
[그, 그런가?]
필두의 의견에 감령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전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우리밖에 없으면 만 대협은 우리를 무시해도 다른 이들은 무시할 수 없네.]
[헌데 저들이 오면…….]
[저들이 우리 자리를 차지하면, 우리는 저놈들의 말까지 들어야 된다는 말일세.]
[그래서 어찌하자는 것인가.]
둘은 재빠르게 전음을 주고받았다. 이건 그들의 생존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도 연관된 일이었다. 만우의 무력에 눌려 오 년을 하인 노릇을 하기로 했지만 만우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됐다. 그런데 저들이 그 사이에 끼어든다면? 게다가 저들은 만우의 무력에 눌려 억지로 머슴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만우의 수족을 자처하는 자들이다.
[만 대협께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네.]
[어떻게?]
[지금 저들은 무공을 쓰지 못 하니, 우리의 무공을 보여주세!]
감령의 눈이 번쩍였다. 한마디로 무력시위를 통해 저들보다 우위라는 것을 보여주자는 소리였다.
[좋지!]
그렇게 힘을 쓰는 것이라면 가장 자신 있는 사람이 바로 감령이다. 순간 감령의 전신에서 내기가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옥면산군. 하지만 아무리 무림이 없는 조선이라고 해서 실력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자들은 조선의 무인들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엄선한 세자를 지키는 호위들이 아닌가. 후웅!!
“큿!”
본격적으로 나서려던 감령이 뒤로 물러섰다. 순간 그를 향해 강맹한 기운을 담은 검이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내 동료다!”
“하!”
설운이었다. 완숙한 초절정에 든 감령과 필두보다는 못 했지만 설운도 초절정 초입이다. 비록 중원처럼 무공을 수련하는 법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무파(武派)는 없지만 각 무가(武家)마다 나름대로의 수련법이 있었다. 그 무가들이 대단히 폐쇄적이어서 서로 교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긴 했지만.
“그럼!”
그때 역수교어 필두가 나섰다. 물을 거슬러 오르는 상어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역수교어란 별호답게 필두의 전신에서 사나운 기세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너희 같은 무뢰배들이 한양을 활보하다니. 내 설 부사에게 이 죄를 물을 것이다!”
이찬의 매서운 검이 필두를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도 세자익위사, 계방의 책임자답게 설운과 비슷한 경지의 무인이었다.
“하악. 하악. 하악.”
그 와중에 방매와 문형일, 마익후는 잠시간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들 숨이 턱 끝까지 치밀어올라 헉헉댔다. 하지만 네 명의 초절정들의 대치에 계방 무인들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형일은 검을 늘어뜨리면서 마익후를 쳐다봤다.
“야. 저 둘이 여기 왜 있는 거냐.”
“그러게. 닮은 사람인가?”
“그러기에는…….”
문형일은 왜 감령과 필두가 조선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하오문이 흘린 정보에 부나방처럼 그들이 만우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 계집. 괜찮아?”
문형일이 헉헉대고 있는 방매에게 물었다. 비록 한어였지만 그 뉘앙스는 이해가 됐기 때문에 방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 하악.”
문형일과 마익후는 낭인 출신으로 이런 개싸움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체력이 버텨줬다. 하지만 방매의 경우에는 이런 개싸움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저잣거리에서 만나는 파락호라고 해봤자 그녀가 배운 수박희면 얼마든지 상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슷한 실력의 무사들을 상대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피하면서 싸운 적은 없었다.
“제법 괜찮더라, 너. 잘 배웠어.”
체술을 주로 사용하는 마익후는 방매의 보법과 각법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언어가 큰 문제였다.
“부딪친다!”
문형일이 초절정 고수 네 명이 대치 중인 상황을 보다가 말했다. 운기조식을 하지 못해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은 없지만 감각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형일의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초절정 고수 넷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짜악!!!!!
“컥!!”
“커헉!!!”
우당탕탕!! 그들이 충돌하려는 찰나 손바닥 두 개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냥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그 소리가 만들어낸 여파는 보통이 아니었다.
손바닥이 부딪치면서 난 소리에 담긴 내공이 서로 부딪치려는 네 명의 초절정 고수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고들면서 맥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흐름과 맥은 굉장히 중요했다. 내공이 흐르는 길은 몸 속의 혈도라고 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무공들에는 일정한 박자와 흐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지가 올라갈수록 서로의 박자를 뺏어오는 사람에 의해 승부가 갈리고는 한다. 그런데 손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수 넷의 박자를 완전히 흩트렸다.
“그만.”
문형일과 마익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검주 만우. 만우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네 명의 고수를 쳐다보면서 대문 안에서 걸어 나왔다.
“일반인들이 사는 곳에서 이런 깽판을 부리는 건, 좀 아니지 않소?”
만우는 이찬을 보면서 말했다. 이찬은 자신이 흙먼지 투성이가 되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땅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만우를 쳐다봤다.
“저들은 내가 아는 자들이오.”
만우가 문형일과 마익후를 쳐다봤다. 그 둘은 만우를 보면서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그간의 개고생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너희.”
“대장!!!”
“우리만 놓고 가다니! 그런 게 어디 있소!”
문형일이 목 놓아 만우를 대장이라 불렀고 마익후는 투정을 부렸다.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자마자 이 소란을 피우다니.”
만우는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을 쳐다봤다. 북촌이라고 하지만 모두 양반만 사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앞집 뒷집의 담벼락과 길거리를 오가던 이들이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본 만우가 비릿하게 웃었다.
“대련이다. 너희 전부. 설운까지.”
“!!!!!!!”
뒷골을 오싹하게 하는 싸늘함이 감령과 필두, 문형일과 마익후 그리고 설운의 등골을 스쳐지나갔다.
“거기 무인 나리들은 들어오십시오. 저하와 대군마마는 안에 계십니다.”
박수 소리 한 번과 말 몇 마디로 격렬한 싸움을 종식시킨 만우가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나, 나도 같이 가!”
뻘쭘해진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방매가 그런 만우의 뒤를 따라 허겁지겁 설미수의 저택 안으로 따라들어갔다.
“저, 저자는 대체…….”
홀로 남겨진 이찬만이 멍한 눈으로 자신의 귀를 훔쳤다. 저자의 박수 소리에 담긴 공력 때문에 귀에서 약하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초강자(超强者)!’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설운도 저 남자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찬은 이를 악물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 안에는 그가 목숨을 다해 바쳐야 할 그의 주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대체 무슨 용담호혈(龍潭虎穴)인지 알아야겠다.’
이찬의 발이 대문의 턱을 넘어섰다. *** 삼복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굳었다. 십령수는 그런 삼복의 얼굴을 애써 무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복을 위해 나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검주라고. 검주. 그 검주.’
십령수는 때려죽여도 검주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옥면산군이 조선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장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판에 검주라니.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이류 고수라면 중원 전체에서 넘쳤지만 하오문에서는 그마저도 소중한 인력 자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오문에서 미리 가불받은 돈 때문에라도 십령수는 함부로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하오문과 척을 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같은 하류 인생인 그에게 더욱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죽겠네, 진짜.”
십령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자 불결해 보이는 하얀 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지만 십령수도 삼복도 개의치 않았다.
“나리. 제발…….”
“난 문주께서 시키신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네. 그리고 난 이곳의 식객일 뿐. 한양지부장은 자네가 아니던가.”
십령수는 삼복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나마 십령수는 삼복에게 지금까지 받아먹은 것이 있어 캥기기 때문에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았다.
“어서 가시게.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자네도 알 것이라고 생각하네만.”
정확히는 삼복은 몰랐었다. 어제까지는. 하지만 십령수가 사색이 되어 돌아온 후 그의 이야기가 중원의 총본타로 넘어갔고 그곳에서는 난리가 났다. 불과 칠 일이 약간 넘어가는 시간 만에 검주라는 자에게 가져다 줄 보상금들이 중원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것도 그냥 대충 집어서 보낸 보상금이 아니었다. 누가 보면 마치 황제에게 조공품을 바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 대단하신 윗선들이 모여 있는 총본타에서 이 정도로 공을 들였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신경을 써야하는 대상이란 것의 반증이다. 덧붙여 총본타에서는 그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이 일을 바깥에 발설하는 자는 지옥까지 쫓아가 목을 벨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심기를 절대로 거스르지 말라. 설령 그가 부탁하거든 모든 것을 다 해주어라. 네 목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삼복은 총본타에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밑바닥 인생들이 모인 집단이지만, 그들은 사회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다. 게다가 밑바닥 인생에 걸맞는 독기와 오기로 무장한 하오문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외압에도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다. 차라리 외압이 들어오면 이 자리에서 흩어지고, 외압을 넣은 상대가 그것을 포기할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이 하오문의 방식이다.
‘그런데…….’
삼복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양지부장인 그가 총분타에서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인물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총분타를 통해 검주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총분타에서는 혹시라도 그가 검주에게 잘못을 저지를까 싶어 가히 연대기급으로 정리가 된 검주의 무림활극사(武林活劇史)를 정리하여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반만 사실이어도 이건 인간이 아니라 무신(武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