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그때 제르딘의 방에서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인이 나왔다. 하인은 보좌관을 보자마자 급히 말했다.
“왕자님께서 부탁하신 서류는 어찌 되었냐고 물으십니다.”
그 말에 보좌관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발레린이 인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보좌관은 반대쪽 복도로 뛰어갔다. 발레린은 빠르게 뛰는 보좌관을 잠시 보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옆에서는 루네스가 종알종알 이야기를 건넸다.
“왕자비님, 얼마 전에 제가 들은 소문인데요. 배도스 공작이 사병을 늘리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일까요?”
“왕자님께도 들었던 말인데 사실일 것 같아.”
그 말에 루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발레린을 쳐다봤다.
“전쟁이 나는 걸까요?”
발레린은 여태껏 읽은 역사책을 생각했다.
“전쟁은 안 날 거야. 그렇게 해 봤자 힘만 빼고 나중에 수습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럼 배도스 공작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그냥 왕자님을 위협하는 거겠지.”
발레린은 생각할수록 배도스 공작이 괘씸했다. 안 그래도 제대로 쉬지 못한 제르딘인데 그런 소문까지 퍼뜨려서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게 만들다니.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제르딘이 일하는 감각을 키우는 데는 좋을 것 같았다. 거기다 그가 한 일은 모두 훌륭하기까지 했으니.
어떻게 보면 배도스 공작은 제르딘에게 왕이 되기 위한 혹독한 교육을 시키는 셈이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발레린은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어느새 발레린의 발걸음이 활기차게 변했다.
계단을 모두 내려오자 몇몇의 하인들이 일렬로 서서 인사를 했다. 발레린은 기쁜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호텔을 나갔다.
마침 마차는 호텔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루네스가 급히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이 호텔에서 셀렌디 공원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발레린은 고맙다고 인사한 뒤 마차를 탔다. 마차는 곧 넓은 길로 내달렸다. 발레린은 강이 점점 가까워지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로프는 창턱에 앉은 채 물끄러미 넓은 강을 보았다.
“그로프, 확실히 이곳 풍경이 왕궁보다 더 특이한 것 같아.”
“그렇긴 합니다. 왕궁에는 고여 있는 호수뿐인데 이곳은 넓은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까요.”
발레린은 풍경을 잠시 보다가 밝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로프, 왕궁으로 돌아가면 배도스 공작을 완전히 쳐 내야겠어.”
“주인님이 책에서 봤던 방법대로 말입니까?”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스 공작이 나를 건드린 것으로도 모자라 왕자님까지 그렇게 괴롭히는 건 정말 두고 볼 수 없어.”
안 그래도 제르딘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부작용을 겪으며 힘들게 살고 있었다. 거기다 그런 상태를 숨기고 맛도 없는 음식을 먹으며 혼자서 일을 모두 해결하고 있었다.
발레린은 그렇게 만든 배도스 공작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침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발레린은 기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날씨도 맑아서 주변의 바람과 습도는 적당했다.
발레린은 잠시 고개를 들어 공기를 기분 좋게 마셨다가 이내 앞을 보았다. 주변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옆에는 강이 유유히 흘러갔고 커다란 나무가 안락한 그늘을 만들면서 길가에는 색색이 아름다운 꽃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발레린이 멍하게 주변을 보는 사이 루네스가 말했다.
“왕자비님, 여기가 그 유명한 셀렌디 공원이에요.”
아까 언뜻 들었긴 하지만 발레린은 궁금해서 물었다.
“셀렌디 공원이 원래부터 유명했어?”
“20년 전에는 그렇게까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최근에 귀족들이 강 주변에 별장을 지으면서 유명해졌어요.”
발레린은 책에서 셀린디 공원에 대한 이야기는 보지 못했다. 실제로 주변에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저택이 띄엄띄엄 있었다.
발레린이 막 하얀 석조 저택을 보고 있을 때였다.
“참고로 이 주변에 왕자님의 별장도 있어요.”
“왕자님 별장?”
발레린이 놀라며 묻자 루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곳이 유명하게 된 시기도 왕자님의 별장이 들어서면서부터일걸요?”
“그런데 왕자님은 지금 호텔에 계시잖아.”
루네스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여러 사람이 이곳을 힐끔거렸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여러 기사가 지키고 있어서 더 그런 듯했다.
루네스는 침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별장에서 왕자님이 많이 아프신 이후로 더는 가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많이 아프셨다고?”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때 나이가 열다섯 살 정도 되셨다고 들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발레린은 제르딘의 부작용이 생각났다. 그로프도 발레린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로프가 작게 말했다.
“왕자가 별장에 가지 않는 것은 부작용 때문 아닐까요? 갑자기 그런 경험을 했으니 그 기억 때문에 가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부작용이 더 심해질까 봐 못 가시는 건가? 어쨌든 그곳에서 많이 아팠다고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그 생각을 하자 제르딘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발레린이 문득 멈춰 서자 루네스가 강가 주변에 있는 저택 중 가장 커다란 저택을 가리켰다.
“마침 저기 있네요! 저기가 왕자님의 별장이에요.”
발레린은 루네스가 가리킨 저택을 쳐다봤다. 별장은 조금 특이했다. 발레린이 평소 보던 저택의 양식은 아니었다. 다른 별장은 지붕이 무척이나 멋들어지게 솟아 있었는데 제르딘의 별장은 지붕이 솟아 있지 않는 대신 양옆에 거대한 기둥이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벽면의 양각 장식이 보일 정도로 꽤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발레린이 멍하게 보고 있자 루네스가 기쁜 얼굴로 설명했다.
“예전에 선대왕께서 왕자님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별장이라고 해요.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쉬라면서요.”
“가족?”
“네, 왕궁은 아무래도 보는 눈도 많고 신경 쓸 게 많은 곳이잖아요. 그런데 별장은 최소한의 수행원으로 갈 수 있으니까요.”
안 그래도 배도스 공작이 있는 왕궁이니 더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왕이 별장을 지어 줬어도 제르딘이 쓰지 않는다고 하니 발레린은 더 마음이 쓰였다.
“그럼 왕자님은 열다섯 살 이후로 한 번도 저 별장으로 가시지 않은 거지?”
“네, 심지어 이전에 결혼 약속을 한 분과도…….”
루네스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막았다. 그러고 놀란 눈으로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루네스. 왕자님께서 나와 결혼하기 전에 결혼을 약속한 분이 계셨단 건 알아.”
“정말 아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스 부인이 말씀해 주셨어. 그런데 그분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맞아요. 실제로 결혼식은 하지 않았고 그냥 약혼만 하셨던 분이세요. 왕자비님,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아니야, 전에도 말했잖아.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라도 말해 달라고.”
루네스는 무척이나 조심스레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미처 제르딘에게 물어보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이참에 제대로 알고 싶기도 했다.
“루네스, 그럼 그 사람은 왕자님과 어떤 사이였어?”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정략결혼이라서 그분도 왕자님과의 결혼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셨고, 왕자님도 그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게 이상하긴 했어요. 독살이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신문에서는 지병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살이 맞을 것 같았다.
‘배도스 공작의 짓이겠지.’
안 봐도 뻔했다. 발레린이 속으로 배도스 공작을 생각하는 사이 루네스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분이 결혼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독살이라는 소문도 있어서 왕자님께서는 꽤 성대한 장례식을 열어 주셨어요. 원래 왕자비가 아닌 이상 그렇게까지 장례식을 크게 진행하지 않거든요.”
그때 가만히 있던 그로프가 나직이 말했다.
“왕자는 독살 때문에 마음이 많이 심란했을 것 같습니다. 왕자 주변에 있기만 하면 모두 죽으니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제르딘이 더 마음을 쓰고서 그렇게까지 했을 것 같았다. 발레린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유유히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그때 루네스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비님이 왕자님 곁에 가장 오래 있는 분이세요.”
“내가?”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루네스가 다음 할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루네스는 눈치만 볼 뿐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발레린이 호기심 있게 보자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안 좋은 소문이긴 한데 말할까요?”
“루네스, 내 소문이 안 좋은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예전에 그런 일을 많이 당해서 이젠 면역이 되었어.”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루네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저도 이곳에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왕자비님께서 왕자님 곁에서 오래 못 견딘다고 했거든요. 왕자비님께 독기가 있다고 해도 왕자님 주변에만 있으면 사람이 죽어 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