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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83화 (83/130)

83화

발레린이 가만히 듣고 있자 루네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하녀들 중에는 왕자비님이 얼마나 오래 버틸지 내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었다니까요.”

“그래?”

발레린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루네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왕자비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오히려 흥미로운데. 그래서 내기를 한 사람은 어떻게 됐어?”

“제가 보좌관님께 말해서 내기를 한 사람들은 모두 징계 처분이 내려졌어요. 가장 심하게 한 사람은 6개월 감봉에 처했고요. 아마 그 사람들이 왕자비님에 대해서 더 떠든다면 이젠 왕궁에 평생 들어오지 못하고 감옥으로 가겠죠.”

발레린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그렇게 진행된 것이 그저 흥미로웠다. 루네스는 여전히 발레린의 눈치를 보았다. 발레린이 쳐다보자 루네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왕자비님, 죄송해요.”

“뭐가?”

“이런 것도 말씀드려야 했는데 보좌관님께서 최대한 조용히 일을 진행시킨다고 하셔서 왕자비님께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그런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

“한 달 전 일이에요. 제가 막 여기에 들어왔을 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이면 하인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할 시기이긴 했다.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작게 속삭였다.

“루네스는 왕궁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되는 사람치고는 잘 아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로프의 말에 발레린은 루네스를 쳐다봤다. 루네스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발레린은 오히려 더 의아했다.

“루네스, 혹시 왕궁에 아는 사람이 있어?”

“아는 사람이요?”

“왕궁 사정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아서.”

그 말에 루네스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 어머니가 왕자님의 궁에 계시면서 하녀장을 하셨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몸이 안 좋아서 쉬고 계세요.”

“왕자님의 궁에서 하녀장을 하셨으면 왕자님에 대해서 많이 아셨겠네.”

“네, 소문도 워낙 많아서 어머니가 단속한다고 많이 애쓰셨어요.”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어쨌든 배도스 공작이 문제야.”

“저도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궁에 직접 오니까 확실히 그런 문제가 보이더라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발레린도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책을 많이 읽어서 대충 알기는 했어도 이렇게까지 더러운 권력이 집중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발레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몸을 돌렸다. 공원의 산책로는 꽤 잘 되어 있었는데 주변의 기사들 덕분에 사람들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을 수 있었다.

발레린은 주변 풍경에 무척이나 감탄하며 머릿속으로는 왕궁에서 돌아가 배도스 공작을 내칠 궁리를 했다.

『천년 왕국사』와 여러 책을 참고해 볼 때 사람을 내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을 먼저 고립시키고 잘라 내야 했다.

발레린은 먼저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을 잘라 낼 명분도 충분했다. 그들은 제르딘의 궁 뒤편에서 왕자를 모욕했으니까.

발레린이 골똘히 궁리하는 사이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이곳이 마음에 드시나요?”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은 처음이야. 이렇게 강이 흘러가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내심 발레린은 탑 안에서 보던 숲이나 왕궁에서 보던 정원과는 다른 느낌으로 좋았다. 물론 왕궁 정원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탁 트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발레린이 강물을 보는 사이 루네스가 차분히 말했다.

“이런 풍경을 꼭 왕자비님께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왕궁으로 돌아가면 이곳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르잖아요.”

발레린이 돌아보자 루네스가 황급히 말했다.

“물론 시간이 나면 올 수 있지만 왕궁 상황이라는 것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요.”

발레린이 말없이 보자 루네스가 빠르게 말했다.

“그렇다고 왕자비님이 잘못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어머니 곁에서 봐 온 왕궁 생활은 꽤 위태로웠거든요.”

발레린도 왕궁 사정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루네스가 이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기까지 했다.

“고마워, 루네스. 네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랐어.”

“제가 처음 모시는 분이기도 하고, 또 저를 살려 주셨으니까요.”

“그땐 우리 둘 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 마침 내가 널 발견했으니까.”

루네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만약 제가 그때 죽었다면 저희 어머니가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어머니는 저밖에 없거든요. 저도 어머니뿐이고.”

발레린은 루네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발레린도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발레린에게 호기심과 함께 앞으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머니는 지금 괜찮으셔?”

“네! 다행히 예전에 있던 병이 조금은 나아졌어요. 요즘은 제가 일을 하고 있어서 형편도 괜찮아졌고요.”

“그런데 어머니가 하녀장까지 했으면 연금은 나오지 않아?”

“나오긴 하는데 어머니가 연수를 못 채우고 나오셔서 생활비 수준밖에 되지 않아요. 그때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거든요.”

루네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정도 견뎌 낸 건 대단하긴 해요. 그렇게까지 어머니가 견딘 것도 조금이라도 연금을 더 받기 위해서였거든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왕자비님 곁에서 평생 일하고 싶어요. 어머니 말을 들어 보면 왕자비님 같은 분은 없다고 하시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발레린은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루네스가 무척이나 새로웠다. 그로프를 힐끗 보자 그저 개꿀개꿀 울었다.

루네스는 여전히 발레린을 밝은 얼굴로 쳐다봤다. 발레린도 미소를 짓긴 했지만 마음속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어차피 제르딘과의 관계는 계약뿐이었고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두 말할 수는 없었다. 계약서에는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는 비밀 조항이 있었다. 발레린은 루네스를 잠시 바라봤다. 루네스는 이제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 있었다. 혹시나 위험한 사람이 있나 싶어서 보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루네스 같은 하인은 없을 텐데.’

발레린도 아쉽긴 했다.

그러나 발레린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앞으로 루네스에게 이전처럼 잘 대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음속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한가득했다.

발레린은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공원의 산책로 주변에는 특히 짝을 이룬 사람이 많았다. 그로프도 알아챘는지 나직이 말했다.

“죄다 짝을 이룬 사람들이군요.”

“그러게. 여기가 확실히 아름답긴 한가 봐.”

루네스도 달콤한 분위기가 흐르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주변에 별장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요즘 작위를 이르게 받은 귀족들 사이에는 이 근처에 별장을 짓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새로 안 사실에 발레린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가족 단위나 짝을 이룬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서로를 보며 웃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척이나 단란해 보였다.

그중에는 잔디밭에 천을 깔아 놓고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가족이 눈에 띄었다. 아이는 무척이나 행복하게 엄마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발레린은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로프는 발레린이 보는 곳을 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행복한 한때입니다.”

“그러게.”

발레린은 그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어릴 때 저주가 아니라 지금처럼 능력을 가졌다면 어머니와 저렇게 지낼 수 있었을까?”

“…….”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를 저렇게 봐 줬을까?”

그로프는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멍한 눈빛으로 화목하게 웃고 있는 가족을 바라봤다. 그때 그 사람들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힐끗 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도 주인님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발레린이 눈을 맞추자 그로프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독기를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왕국에서 주인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긴 해. 탑에 있을 때조차도 나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건 못 들었으니까.”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발레린의 발걸음은 아까보다는 조금 경쾌해졌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눈치를 살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제 주인님의 기분이 좋을 땐 그로프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발레린은 공원 주변을 둘러본 뒤에 마차로 돌아갔다.

마차는 발레린이 산책로를 다 걷는 지점에 대기하고 있었다. 발레린은 가벼운 마음으로 마차에 탔다. 공원 주변을 구경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루네스와 언젠가 헤어진다는 사실이 씁쓸했지만 어쨌든 발레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제르딘을 위해 배도스 공작을 몰아내는 것뿐이었다.

발레린이 창문 밖을 보고 있을 때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왕궁으로 돌아가면 배도스 공작을 완전히 몰락하게 만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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