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왕자님이 있잖아.”
“그래도 제게 잘해 주시는 분은 왕자비님이신걸요.”
루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발레린을 바라봤다. 이마에는 땀이 났지만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초롱초롱 빛났다.
“이렇게 저 같은 사람을 배려해 주시는 분은 정말 왕자비님뿐일 거예요. 그러고 보면 저는 정말 운이 좋아요. 왕자비님이 저를 살려 주시고 이렇게까지 대해 주시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루네스.”
발레린은 싱긋 웃고는 방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루네스가 따라왔다. 발레린이 문을 열기 전 루네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나저나 왕자님께서 일찍 돌아가실 것 같은데 왕자비님도 같이 가실 건가요?”
“나도 굳이 이곳에 오래 있을 이유는 없어서.”
이미 조사관이 제 일을 하고 있기도 하니 발레린이 나설 자리도 아닌 듯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 있는 동안 알아봤는데요. 왕궁의 정원과 비슷할 만큼 정말 좋은 풍경의 공원이 많더라고요. 거기다가 강 주변 산책로는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해요.”
발레린 역시 주변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을 느꼈던 참이었다. 발레린은 반짝이는 강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곳에 왕자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하지만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제르딘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정도로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왕궁도 원래 비워 두면 안 되는데 일부러 이곳까지 온 것이기도 하고.
“왕자비님, 왕자님이 바쁘시니 왕자비님만이라도 그곳을 한번 둘러보시면 어때요? 이곳에 온 김에 말이에요.”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나직이 말했다.
“맞습니다. 이곳에 언제 올지 모르니 볼 건 다 보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레린이 그로프를 보자 그로프는 덧붙이듯 말했다.
“주인님께서도 그동안 많이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풍경을 보며 잠시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루네스는 눈을 반짝였다. 발레린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 눈치였다. 발레린은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곳에서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모임에 약속된 것도 아니니 발레린은 제르딘이 왕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자유였다.
그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배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우선 음식 먹고 생각해 볼게.”
그 말에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쉬시고 불러 주세요.”
루네스가 물러가자 발레린은 방문을 열었다. 방은 이전과 똑같았다. 잘 정돈된 이불에 넓은 침대,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찬 탁자.
발레린은 탁자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동안 제르딘이 준 육포는 정말이지 맛이 없었다. 웬만한 건 가리지 않는 발레린이었지만 그런 맛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그로프를 위한 귀뚜라미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로프는 발레린이 내려주자마자 한 마리를 사냥하며 눈을 깜빡였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포크를 쥐었다. 손힘은 여느 때보다 강했다. 발레린은 가리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청포도를 먹은 뒤 발레린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탁자 위 그릇에는 남아 있는 음식이 아예 없었다.
발레린은 빈 그릇을 보다가 문득 그로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왕자님은 어떻게 그런 육포를 먹으면서 견뎠을까?”
“원래 바깥에 그런 음식을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그렇게 맛없는 육포는 처음이었어. 원래 왕자님 입맛이 그런가?”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마음이 쓰였다. 인간이 온전히 누리는 맛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왕자님은 그렇게 지내왔겠지? 제대로 된 음식 맛도 못 느끼면서 말이야.”
“그럴 것 같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싫어하는 육포를 아침 대용이라며 먹었으니까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마침 들어온 사람은 루네스였다. 그녀는 여러 하인과 함께 발레린이 먹은 그릇을 치웠다. 도와준 하인이 모조리 방을 나가자 루네스가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비님, 혹시 강가로 가는 산책은 생각해 보셨나요?”
발레린은 문득 뒤를 돌아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고 햇살은 좋기만 했다. 이런 날씨에 방에만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발레린은 지금 할 일도 없었다.
“지금 갈까?”
발레린의 말에 루네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곧바로 마차를 준비할게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인사를 하곤 방을 나갔다.
“주인님, 그런데 지치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아까 음식을 먹어서 더 힘이 나.”
발레린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로프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데 주인님, 루네스는 왜 갑자기 왕자비님을 밖으로 데려가려고 할까요?”
“말 그대로 좋은 산책로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야? 이곳 풍경은 멀리서 봐도 예쁘잖아.”
실제로 발레린이 창문을 통해 보는 주변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색색이 예쁜 꽃들이 길가에 핀 것은 물론 커다란 나무가 군데군데 있어서 목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거기다 넓은 잎 식물이 많아서 왕궁에서 보던 풍경과 다르게 이국적인 느낌마저 났다.
발레린은 저 멀리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말했다.
“확실히 여긴 왕궁과 다르게 아름다워. 이곳에 온 김에 주변을 둘러봐도 괜찮을 것 같아.”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물끄러미 보다가 미소 지었다.
“그로프, 설마 아직도 루네스를 의심하고 있는 거야?”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갑자기 루네스가 주인님을 밖으로 다니게 하는 것이 이상해서요.”
“루네스는 그냥 내게 많이 고마워하는 것 같아.”
여태껏 루네스는 누가 보면 의심을 불러올 정도로 열심히 하긴 했다. 또 맹목적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까지 발레린에게 불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루네스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분명 이전에 무슨 사달이 나고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면 루네스는 그다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로프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주인님께서 많이 신경 써 주셨으니 당연합니다. 주인님 같은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창문에 들어오는 바람을 기분 좋게 맞았다. 그렇게 발레린이 풍경을 보고 있던 때였다.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이 들어오라고 하자 루네스와 함께 여러 단장사가 들어왔다. 루네스는 발레린에게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
“왕자비님, 마차는 준비되었어요.”
발레린은 루네스의 안내에 따라 몸을 씻고 이곳저곳을 단장했다. 액세서리도 발레린이 좋아하는, 검은 선으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발레린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제르딘의 방을 살짝 쳐다봤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보좌관이 나왔다. 그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왕자비님, 어디 가십니까?”
“잠깐 주변을 산책하고 오려고요. 그런데 왕자님은 많이 바쁘신가요?”
“어젯밤 일로 전보다 더 바빠지셨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 늦게 왕궁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이요?”
“네, 혹시 이곳에 더 계시고 싶으면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왕자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전 왕자님과 함께 갈게요. 어차피 여기서 만날 사람도 없는걸요.”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괜히 저 혼자 여유로운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그 말에 보좌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 왕자님께서 해결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만약 왕자비님께서 도와주시면 배도스 공작이 더 난리를 칠 겁니다.”
“왜요?”
보좌관은 머뭇거리며 발레린의 눈치를 보았다. 발레린은 대충 눈치를 채고 입을 열었다.
“제가 미령하신 왕자님을 제멋대로 한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혹시 그런 소문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 말에 보좌관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안 좋은 소문도 종종 들어요. 그런 소문에 그다지 마음이 상하지는 않아서 루네스에게 들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요.”
루네스는 발레린을 조심스레 살폈지만 발레린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보좌관은 잠시 헛기침을 하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띄는 사람이 없자 보좌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께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께서 혼자 제 일을 못 한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괜히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시려 하고 있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배도스 공작에게 그 어떤 꼬투리도 잡히지 않으려는 모습이 마음 쓰였다.
“배도스 공작 때문에 왕자님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어쩔 수 없지요. 배도스 공작이야말로 귀족들 중 손꼽히는 세력가니까요.”
“전 정말로 왕자님께서 왕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이 왕국이 바로 서지 않겠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왕자님 같은 분은 찾기 힘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