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보좌관은 탐지기를 슬쩍 보고는 빠르게 말했다.
“좌표 확인했습니다. 곧바로 주변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돌아가도 주변은 샅샅이 뒤지도록 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곤 보좌관은 조사관에게 지시했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관찰하며 쪼르르 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점이 있어 그에게 물었다.
“왕자님, 이제 왕궁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제르딘이 돌아봤다. 그의 얼굴은 보좌관에게 지시하던 표정과 다르게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공녀가 이곳에 더 있고 싶다고 하면 더 있겠습니다.”
“아니에요. 전 왕자님께서 돌아가겠다면 따라갈게요.”
안 그래도 제르딘은 꽤 바빠 보였다. 지금도 할 일을 제쳐 두고 오는 것일 텐데 굳이 이곳에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정말 이곳에 더 있지 않아도 됩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도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이런 동굴에 더 있다가는 산소 부족으로 죽을 겁니다.”
극단적인 말에 발레린은 웃으며 그로프를 보았다.
“그로프, 이 동굴이 그렇게 싫었어?”
“네, 차라리 탑 안에 있는 게 더 나을 정도였습니다.”
발레린도 작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 친위대와 조사관이 동굴 입구를 잘 뚫어 둔 덕분에 발레린과 제르딘은 꽤 쉽게 동굴을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동굴에 모래가 많은 이유가 어떤 행위를 위해서이기도 하니,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발레린은 조사관들이 빠르게 조사하고 판단 내리는 것을 보며 역시 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발레린은 꽤 지친 발걸음으로 마차에 탔다. 독을 먹긴 했지만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으니 배가 고팠다. 발레린은 제르딘도 같은 심정인가 싶어서 그를 살폈다.
제르딘은 이상하게 생생해 보였다. 피부는 퍼석한 게 전혀 없었고 그의 입가는 이제 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거기다 머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단정하기까지 했다.
그로프도 제르딘의 상태가 신기한지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때 제르딘이 고개를 돌렸다. 발레린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창문을 보았지만 그로프는 제르딘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제르딘이 그로프를 보며 눈짓하자 그로프가 중얼거렸다.
“주인님, 왕자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았는데 왜 저렇게 생생합니까?”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나도 모르겠어. 그래도 왕자님께서 멀쩡하시니 마음이 놓여.”
제르딘은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말했다.
“공녀, 정말 제가 쓰러졌을 때 지켜보기만 했습니까?”
순간 발레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르딘은 다행히 그때의 일을 떠올리지 못하는데 직접 입술을 맞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괜한 일을 한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발레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힐끗 제르딘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궁금한 듯 발레린을 빤히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그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이상하게 아까부터 기분이 좋고 머릿속이 상쾌해서요.”
발레린이 말없이 보자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약을 먹고서 부작용을 겪었을 때 이런 기분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결혼식 때 잠깐 그런 기분을 느낀 적 있는데.”
제르딘은 천천히 발레린과 시선을 맞췄다. 하늘빛 눈동자는 묘하게 짙어 보였다. 발레린은 당황해서 말이 빠르게 나갔다.
“그때 이후로 왕자님께서도 저처럼 몸이 회복된 것 아닐까요? 제가 의지대로 독기를 사용하는 것처럼요.”
“그럼 공녀에게 끼친 영향이 제게도 왔다는 말씀입니까?”
발레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제르딘은 더 말하지 않았다. 발레린은 일부러 마차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나마 풍경을 보니 아까보다는 마음속이 차분해지는 듯했다.
14. 소문의 온상
마차는 빠르게 커다란 호텔 앞에 도착했다. 발레린은 잘 닦인 호텔 건물을 보자마자 마음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발레린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숨을 오래 들이마셨다. 시원한 공기가 폐를 채우자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눈을 감으며 숨을 들이마시고 있을 때였다. 이곳저곳에서 말소리가 울렸다.
“왕자님, 지금 왕궁에서 배도스 공작이…….”
“지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발레린은 눈을 뜨고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의 주변으로 여러 사람이 몰려들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제르딘이 돌아봤다. 그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다가왔다.
“공녀, 우선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바쁘신데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르딘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여러 사람과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르딘은 왕국의 왕자이니 바쁜 것이 당연한데도 발레린은 묘하게 괴리감이 느껴졌다.
몇 시간이라도 제르딘과 함께 있는 사이 그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발레린이 제르딘의 뒷모습을 좇고 있을 때 별안간 활기찬 목소리가 울렸다.
“왕자비님!”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루네스가 빠르게 뛰어왔다. 그녀는 발레린 앞에 멈추자마자 고개를 숙이곤 숨을 골랐다.
“루네스, 잘 있었어?”
“아니요.”
“왜? 무슨 일 있었어?”
“왕자비님께서 돌아오시지 못했잖아요.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잠도 제대로 안 왔다니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 루네스.”
“제가 당연히 왕자비님을 걱정해야죠. 몸은 괜찮으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지 못한 것 빼고는 괜찮아.”
“다행이에요. 참고로 음식은 방에 준비해 두었어요.”
“벌써?”
“네, 조사관들이 이때쯤 왕자비님이 돌아오실 거라고 해서요.”
발레린은 기쁜 마음으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안에는 하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은 발레린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활기찬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아직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발레린은 이상하게 힘이 났다.
‘독을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유일하게 제르딘과 단둘이 있던 시간이 길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제르딘은 비록 뜻깊게 여기지 않겠지만 발레린은 제르딘과 같이 있던 시간이 소중했다.
‘언제 왕자님과 그렇게 단둘이 있겠어.’
실제로 한방에 있을 때는 제르딘이 너무 바빠서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제르딘과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경험은 동굴 안에서가 처음일 것이다.
거기다 발레린은 먼저 제르딘에게 입을 맞췄다. 물론 그땐 불순한 의도가 아니었고, 제르딘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그 생각을 하자 발레린은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왕자비님, 혹시 더우세요?”
발레린이 돌아보자 루네스가 걱정스레 덧붙였다.
“왕자비님 얼굴이 붉으신 것 같아서요. 만약 더우시면 제가 호텔 측에 말해서 온도를 조절하라고 할게요.”
“괜찮아.”
“정말 괜찮으세요?”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발레린을 잠시 살피다가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황금 마검을 찾으시는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플린 독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조만간 조사관들이 조사해 본대.”
발레린은 황금 마검에 대한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직접 찾아보지 못해서 아쉽기도 했고 그곳에 정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은 점은 제르딘이 제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따라 주었다는 것이다. 만약 발레린이 탑 안에 있었다면 그런 의견은 그저 저주받은 사람이 한 말이니 실없는 소리로 치부하면서 무시했을 것이다.
‘이곳에 온 것도 모두 공녀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이니…….’
발레린은 무엇보다 제르딘이 자신을 존중해 주어서 고마웠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방문 앞이었다. 발레린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루네스?”
루네스는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린은 서둘러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루네스는 힘겨운 숨을 내쉬며 겨우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어깨 위에 얌전히 있던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의 체력은 아무도 못 따라오는 듯합니다.”
“그로프, 내가 빨리 걷는 걸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만 주인님께서 너무나 기쁜 얼굴이셔서 아무 말 하지 못했습니다.”
“미리 말해 주지. 아까 왕자님 생각한다고 먼저 계단을 올라간 줄 몰랐어.”
“죄송합니다. 주인님. 앞으론 주변을 더 잘 둘러보겠습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나도 앞으로 잘 살펴봐야지.”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보았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보며 개꿀개꿀 울었다. 그때 루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거의 발레린과 가까워졌다.
“루네스, 미안해. 내가 먼저 가 버려서.”
루네스는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체력을 키워야 했는데, 제 탓이죠.”
발레린은 루네스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느덧 루네스는 숨을 내쉬며 발레린 앞에 섰다.
“고마워요, 왕자비님. 이 세상에 왕자비님보다 더 훌륭한 분은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