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6화 〉자취방에 가면서 (66/72)



〈 66화 〉자취방에 가면서

교수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강의실 앞에서 난 고개 숙여 핸드폰을 봤다. 보고 있는 건 내 여친인 마왕에게 온 문자였다.

마왕: 오늘 같이 들어가세


같이 가자는  말고도, 그녀가 강의는 듣는 호실까지 나와 있었다. 그걸 본 나는 강의가 끝나자 마자 여기로 온 거였다.


기다리다 심심해진 나는 문자 어플을 끄고 유튜●를 켰다. 영화 리뷰해주는 영상을 3개째 연달아 보고 있을 때, 강의실 안에서 “수고하셨습니다!”라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강의가 끝났다는 소리를 듣고 폰을 바지에 넣었다. 그리고 얼마  돼서 닫혀 있던 강의실 문이 열렸다.


선배로 보이는 사람들 여러 명이 나오고, 뒤이어 은발을 휘날리며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


평소 추리닝을 좋아하는 그녀답게, 오늘도 추리닝을 입었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은색이 아니라 감색인 정도였다.

마왕은 눈웃음 사이로 푸른 눈동자를 내게 향하며 물었다.

“오래 기다렸는가?”


“뭐, 조금?”


“그럴  방금 왔다고 하는 걸세.”



서운한 것처럼 그녀가 내 팔뚝을 약하게 때렸다. 날 때린 곳 반대쪽 손엔 대학교 교재로 보이는 책들이 들려 있었다. 내가 그걸 보자 마왕이 여전히 웃음을 띄운  말했다.


“이것들 사물함에 넣고 들어가세.”

“그래, 그러자. 줘.”


그녀가 들고 있는 책에 손을 뻗자, 마왕은 과장스럽게 감산타를 내뱉었다.

“크으! 이래서 짐이 자네와 사귀는 걸세!”

“헛소리는.”


우린 학과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거기에 도착하자, 마왕은 자기 배 높이에 있는 사물함에서 자물쇠를 풀었다. 두꺼운 책 여러권으로 가득 찬 내부가 보이고 그녀가 말했다.


“넣겠나.”

“자.”


“자네 걸 넣으란 소린 아니네. 어서 바지 올리게.”


“야! 무슨 소리야!”


“하하핫! 농담일세!”

이상한 소릴 지껄인 마왕이 호탕하게 웃었다. 난 그 모습을 뜨거워진 얼굴로 쏘아봤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히려 내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사격장에 다녀온 후로 계속 저런 농담을 해댔다. 그때 그녀는 차 배터리가 방전됐다는 이유로 모텔에서 묵었고, 우린 한층  깊게 사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계속해서 해대면 부끄러웠다.

마왕은 웃음을 멈추고 사물함에 달린 자물쇠를 잠갔다. 이제 다시 복도를 걸어가는데,  안쪽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너 사물함 안에 책 많던데,  네 거냐?”

“당연하지 않나.  짐의 책이라네.”

“그렇게 많아? 전공 책이? 너 아직 2학년 1학기잖아.”


“하아아…….”


갑자기 마왕이 발걸음을 멈추며 깊게 한숨 쉬었다. 마치 심각한 일인 것마냥 허리춤에 양손을 얹으며 내게 충고했다.


“자넨, 이런 거 피지 말게.”


“책 보는 게 담배 피는 거냐!”


“백해무익한 것이니, 절대로 피면 안 된다네.”


“우리 전공인데?! 졸업은 해야지!”


“기껏해야 지잡대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지!”

“지잡대 졸업증 수백개보다는, 자격증 한 개라도 있는 게  낫다네.”


“그건 맞긴 하지만!”

“그러니…….”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말하던 동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엔 달성감으로 반짝였다.

“자격증 따지 않겠나?”


“뭐? 무슨 자격증?”


“총포 소지 허가증 말일세. 저번에 짐이 괜히 사격장 데려간 게 아니었잖나.”

“그냥 구실 아니었어?”

“뭐, 틀린 건 아니네만, 그래도 3분의 1은 자격증이 목적이었네.”


절반 이상이 그쪽이었구나.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좀 있으면 중간고사잖아. 나중에 따도 되지?”

“자넨 이게 공무원 시험인 줄 아나. 매번 있으니 걱정 말고 공부에 집중하게.”

“그럼 이야기를 꺼내지 말던가. 아, 근데  왜 기다리라고 했냐?”

“무슨 말인가.”

“허가증 따라고 불러낸 건 아닐 거 아니야.”

“그건 맞네만.”


“왜 부른 거야?”


“짐과 자네가 만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음…… 아니?”


“그렇네. 허나 굳이 따지자면 이유가 없는  아니네.”

“뭔데.”


마왕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네가 보고 싶어서 말일세. 자넨 짐이 안 보고 싶었는가?”

“물론 뭐,”

 고개 돌려, 마왕과 눈을 마주쳤다.

“보고 싶었으니까 여기로 왔지.”

“뭔가, 자네도 마찬가지였나.”


그대로 우리는 학교에서 나왔다. 나는 그렇게 걷다가 자취방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나와 마왕은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자네 그거 들었는가?”


“뭘 들어.”


“이 근처에 클라이밍하는 곳이 새로 열었다고 하네.”


“그게 뭔데.”

“그거 있잖나!  타고 올라가는 거 말일세!”

“프리러너? 그거 말하는 거야?”

“그게 아니네! 절벽 같은 곳에 돌 박아놓고, 그거 잡고 올라가는 거!”

“아, 그거!”


머리속에 영화 한 장면이 펼쳐졌다. 클라이밍이 취미인 주인공이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 가족을 구해낸 이야기.

안 그래도   해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좋네. 다음에  번 가보자.”

“그러세! 열어서 얼마 안 됐으니 초보자에겐 할인 이벤트도 있다고 하네.”

“넌 그걸 어디서 들었냐?”


“인터넷에서 보고 알았네만?”

“나도 인터넷 하거든?”


“자네는 찐따만 있는 데만 들어가잖나. 반면 짐은 인싸투성이인 사이트로 들어간다네.”

“그게 무슨 사이튼데.”

“말할 수 없네.”

“왜?!”

“인싸만 들어갈  있다고 했잖나!”


“싫어! 나도 말해줘!”


“안 되네!”


마왕이 외치며 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빛나는 은발이 휘날리면서 향긋한 샴푸향이 퍼졌다.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그녀가 날 곁눈질하며 말했다.


“말해줄 순 있네.”

“그럼 말해줘.”

“단, 공짜로는 안 되네.”


“뭐? 야, 치사하게 돈을 달라고 하냐? 나보다 부자면서.”

“짐이 언제 돈으로 달라고 했나?”


그러더니 팔을 올려 팔꿈치와 옆구리 사이에 작은 틈을 만들었다. 팔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아아, 짐의 옆구리가 꽤나 시렵구먼. 만약 여길 따뜻하게 해주는 자가 있으면 어떤 사이트라도 알려줄  있네만.”

난  말뜻을 바로 알아채고, 벌어진 팔 사이로 손을 집어 넣었다.

“자, 이러면 따뜻해?”

“흐음, 아직일세. 아직 시렵다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이렇게 하면 되지 않나!”


“어엇, 야!”


갑자기 마왕이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내게 안겨들 듯이 다가왔다. 난 놀라면서도 그녀처럼 팔짱낀 팔에 힘을 줬다.


방금 전보다 한층 더 가까워진 그녀가 파란 눈으로 날 올려보며 말했다.


“이렇게 닿는 표면적을 늘리는 걸세.”


“아, 그렇냐?”


“역시, 이러니 한층 더 따뜻하군?”

“그럼 이제 알려줘야지?”

“무얼 말인가?”

“사이트! 인싸들만 들어간다는 사이트 알려준다며!”

“뭣이?!”


“왜 놀라는데!”


“으음…….”


신음을 흘리던 마왕이 이젠 대놓고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은 인형같이 예쁜 외모가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그런 내 반응을 눈웃음 지으며 쳐다보다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이렇게 귀여운 짐을 보고도 잊지 못했단 말인가?”

“아, 아직은 기억나는데?”

“뭣이? 그럼 귀엽게 해야겠군?”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릴 기댔다. 그리고 얼굴을 비빌 때마다 재잘거렸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도 기억나는가?”


너무 귀여워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애교부리는  보면서 걷자, 어느새 우리는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팔짱  팔을 빼며물었다.


“이러면 기억  날 것 같은데?”

“음? 자네 뭐엇?!”


마왕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신을 있는 힘껏 껴안자 그녀가 깔깔댔다.


“자네 뭐하는 겐가!”

뭐하냐고 질책하는 것 같으면서도, 마왕의 연분홍색 입술은 나처럼 웃고 있었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 껴안다가, 껴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떨어지다 말고 고개 숙여 나와 자기 사이에 생긴 틈을 내려봤다.

“해보고 싶은 게 있네.”


“너 뭐해?”

“기다려 보게.”

그렇게 말한 마왕은 내 발등 위로 자기 발을 살포시 올렸다. 가볍진 않지만 무겁지도 않은 무게감이 느껴지고, 그녀가 고개 들어 어린아이같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걸어보세.”


“이렇게?”

“어서 걸어보게. 짐도 도와줄 테니.”


시킨 대로 밟힌 발에 힘줘서 앞으로 걸어봤다. 그러자 내가 한걸음 디딜 때마다 마왕도 다릴 들어 다음 걸음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오오! 이게 되는 구먼!”


“그러게.”


“조금만  걸어보세!”


넘어지지 않도록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몇 걸음 더 걸어갔다. 걸어갈수록 아기한테 걸음마를 가르쳐주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그렇게 또 걷다가 골목 모퉁이에서 사람이 나오자 마왕이 내려갔다. 그 사람한테 보여주면  되는 걸 보여준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민망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다시 행복감이 올라왔다.


“잡게.”

“자.”


우린 학교를 나올 때처럼, 다시 손잡고 자취방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마왕이 골목 속 자리한 편의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들렀다 가세.”


“왜?”

“살 게  있다네. 들어오게.”

그러더니 먼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곱게 흔들리는 은발을 따라 들어가자, 편의점 직원이 성의 없는 인사로 우릴 반겼다.


“어서 오세…….”

요까지 해야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가볍게 목례해서 인사에 반응했다.

 사이 마왕은 몇 번이나 와  편의점 안을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녀가 멈춘 곳은 반창고나 압박 붕대 같은 의료품이 있는 진열대였다.

“으음…….”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곳은 거기서 좀 아래 쪽이었다. 작고 납작한 사각형 박스, 남녀의 어떤 관계에 필요한 물건에 푸른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다가가기 좀 그래서 그냥 지켜보는데, 마왕이 날 불렀다.


“자네!”

그리고 빨간색과 노란색 상자를 들어 보이며 내게 물었다.

“자네는 딸기향이 좋은가, 아니면 바나나향이 좋은가?”


“야!”


참지 못하고 바로 다가가, 그녀 손에 들린 상자를 뺏었다.  행동에도 마왕은 당황하긴 커녕, 오히려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그런가?”


“너 이러려고  자취방 가자고 한 거였냐?”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거짓말 하지마!”

“짐은 그저 자네 방에서 ●플릭스를 보려 했을 뿐이네만.”


“근데 그걸 왜 사!”


“흐으음.”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다시 ‘그’ 진열대를 내려봤다. 그러면서 내 손에 들린 것보다  더 비싼 걸 집었다.

“●플릭스 보는 김에, 플렉스도 좀 해야겠네.”

“아 좀!”








결국 3개 다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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