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자네, 그…… 저녁, 먼저 먹지 않겠나?
쏴아아……!
사격장 근처 모텔은 특이하게도 화장실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불투명 유리였지만 밝은 조명과 하얀 타일 때문에 누군가 들어가도 그 형태가 그대로 드러났다.
만약 그 벽을 가려주는 커튼이 없었다면 샤워하는 마왕의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보였을 거였다. 하지만 이 커튼이 날 시험에 들게 했다.
저 커튼은 일반적으로 쓰는 천으로 된 커튼이 아니라 블라인드였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되는 얇은 인공재질 천 수십개가 모여서 화장실 내부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쳤던 반동으로 얇고 길쭉한 판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사이로 샤워 중인 마왕의 하얀 그림자가 보였다.
화장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마왕도 봤을 거라 확신했다.
왠지 나오니까 얼굴이 붉어져 있더라!
쏴아아, 뚝!
시야는 블라인드가 어느 정도 가려줘도 소리는 거의 그대로 들려왔다. 물이 끊기고, 젖은 바닥을 걷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차박! 차박!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실루엣이 문 근처에서 멈췄다. 커튼이 문까지는 가려주지 않아서 만약 멈추지 않았다면 그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멈춘 그녀는 물기를 닦는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약 10분쯤이 지나고, 그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이 서려서 희뿌연 문을 열어 실내로 들어왔다.
젖어서 뭉친 은발을 하얀 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오는 마왕은, 섹시하게 보였다. 샤워하느라 상기된 얼굴, 남은 물기로 인해 젖은 피부, 얇은 가운 사이로 희미하게 음영진 가슴골.
그 모습이 침대에 앉아있는 날 못 일어나게 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접은 수건 사이에 넣어 비비던 마왕이 날 돌아봤다.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날 말없이 내려봤다.
이때도 말리고 있던 손은 멈추지 않아서, 가운 옷깃이 처음 볼 때보다 살짝 더 벌어졌다. 그렇게 벌어진 옷깃 사이로 속살이 드러났다.
“!”
우유같이 흰 피부와 하얀 가운 사이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즉, 가운 아래 속옷을 안 입고 있다는 거였다.
나도 팬티는 입고 있는데!
황급히 시선을 돌려 얼굴을 바라봤다. 마왕은 수건을 내릴 때까지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네.”
그녀가 수건을 내리며 날 불렀다. 난 여기서 뭔가 농담이라도 해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 줄 거라 믿었다. 욕조가 좋다며 같이 거품 목욕하자고 날 놀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와 달리, 마왕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자네, 그…… 저녁, 먼저 먹지 않겠나?”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처음엔 그냥 평범한 사격장 데이트였을 건데.
약 1시간 전, 나와 마왕은 클레이사격에 이어, 권총 사격, 공기총 사격까지 성공적으로 해내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미등 켜진 지프차 앞에서 사라졌다.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나였다.
“어, 야! 차 불 켜져 있는데?”
“그럴 리가 없잖나, 음?”
마왕이 차 헤드라이트 부분을 살폈다. 내가 말한 대로 불이 미약하게 들어와 있었다.
“이거 괜찮은 거냐?”
“흠, 잘 모르겠군.”
“모르면 안 되지!”
“일단 한 번 확인해 봐야겠네.”
그렇게 말한 마왕은 차 문을 따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러는 사이 난 해가 지고 있는 산등성이를 올라봤다.
사격하느라 시간이 꽤 많이 흘러서, 슬슬 저녁시간이 다 됐다. 올 때만 해도 주차장 절반을 채웠던 차들도 거의 빠져서 두 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앵앵앵! 앵앵앵!
역시나 시동은 걸리지 않았고, 힘없는 엔진 소리만 들렸다. 거는 데 실패한 마왕이 열린 차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 되겠네. 방전돼서 시동이 안 켜진다네.”
“그래? 하아, 망했다.”
사격장은 소음이 심해서 그런지 깊은 산속에 위치했다. 그 때문에 버스는 물론이고 택시도 안 보였다. 심지어는 작은 편의점 하나도 없었다.
“뭐 어떻게 안 돼?”
“보통 이러면 다른 차주에게 부탁해서 점프하네만…….”
점프가 뭔지 모르겠지만, 마왕은 고개를 돌려 주차장을 둘러봤다. 아까 말했다시피 여기엔 우리 차 포함해서 단 두 대밖에 남지 않았다.
“안 되겠군.”
“왜? 저 차 주인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아?”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회색 승용차를 가리켰다. 그러자 당황했는지 마왕이 말을 더듬었다.
“저, 저것 말인가? 승, 승용차와 지프차는 사, 사양이 달라서 점프가 안 된다네!”
“그래……?”
“자네도 면허 있지 않나! 배운 걸 생각해보게! 애초에 승용차와 지프는 기름도 다르잖나! 배터리도 그런 셈일세!”
무면허에 가까운 장롱 면허라서 저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답답한 심정에 팔짱을 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냐?”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마왕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여기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되는 곳에 모텔이 있다네!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시 오세!”
“뭐?”
“어차피 내일은 일요일이지 않나! 분명 오늘처럼 사람이 많을 테야! 짐처럼 지프차를 가지고 온 자도 있을 거네!”
신경 쓰인 점은 그게 아닌데…….
마왕을 수상하게 바라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 한국인 아가씨 아니야!”
돌아보니 익숙한 아저씨가 보였다. 그는 아까 접수처에서 마왕에게 눈을 떼지 못하던 사격장 직원이었다.
마지막 남은 차 주인인지, 그는 회색 승용차로 향하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무 문제도 없다네! 걱정 말게!”
“왜 무슨 문제가 없어! 그게 사실은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가 부끄러웠는지 마왕이 괜찮다며 거짓말했다. 하지만 난 그런 그녀에게 소리치고 아저씨에게 진상을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왜 그러냐는 듯이 말했다.
“그럼 보험 부르면 되잖아?”
“그래요? 야! 보험 부르자!”
내 말에 마왕은 여전히 수상한 반응을 보여줬다.
“그게 말이네! 사실, 보험료를 안 냈다네. 그 바람에 해지 돼서 안 올 게야!”
“야! 그걸 제때제때 냈어야지!”
“깜빡했네! 깜빡해서 미안하게 됐네! 하핫!”
“미안하다는 얘가 웃고 있냐!”
한편, 다투는 우리 모습을 보던 아저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내가 점프시켜줄까? 금방이면 되는데.”
“괜찮네!”
아저씨 말에 마왕이 소리쳤다. 나는 놀라면서도 아까 그녀에게 들었던 말을 직원분에게 알려드렸다.
“승용차랑 지프차랑은 사양이 달라서 안 된다는데요?”
“어, 그래? 아닐 건데?”
그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마왕에게 말했다.
“아하핫! 아가씨가 착각했나 보네! 아가씨! 외국은 몰라도 한국 차는 어떤 차든지 다 점프가 가능해요!”
“으, 음……!”
“거기서 좀만 기다려요, 내가 도와줄게!”
도와준다는 말을 듣고도 그녀는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것처럼 아저씨에게 외쳤다.
“자네! 자네 혹시 저녁 약속은 없나?”
“있긴 있는데, 이거 하고 가지 뭘. 얼마 안 걸려.”
“그럴 것 없네! 어서 가게! 늦을 수도 있잖나!”
“여친이 많이 착해. 좋겠네. 좋겠어!”
직원은 날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승용차를 돌아가 트렁크로 향했다. 하지만 마왕은 이상하게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거기 자네!”
불린 그와 더불어 나도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마왕이 전화한 거라고 화면에 나와 있었다.
“너 전화는 왜 했냐?”
바로 앞에 있는 발신자를 쳐다봤다. 그때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아저씨를 향해 얼굴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마왕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으며 날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는데 뒤에서 다소 어색한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나 빨리 가야 하는데!”
“네?”
“역시 그랬나! 어서 가게! 늦으면 안 되지 않나!”
“어, 잠깐.”
마왕과 아저씨는 날 무시하며 자기 할 말만 지껄였다.
“손님들은 내일 다시 와서 도와줄게. 아니면 내가 근처 마을까지 태워줄까?”
“그러면 고맙겠네!”
“대충 아무 모텔이나 내려주면 되지?”
“더할 나위 없구먼?”
그녀는 웃으며 차에서 내려 문을 잠갔다. 그러더니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내 팔을 잡아 이끌었다.
“어, 야!”
“뭐 하는가. 저 친절한 분이 우릴 태워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하다고 하는 겐가. 타인의 친절을 함부로 무시하는 것보다 무례한 건 없네.”
그렇게 말한 마왕은 아저씨 승용차 뒷좌석을 열었다. 그러더니 그 열린 문으로 내 몸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들어가게!”
“미, 밀지마! 알아서 들어갈게!”
밀어대는 마왕 때문에 반 억지로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손으로 내 허벅지를 딛으며 말했다.
“아니, 야!”
“짐도 타겠네. 좀 비켜주게.”
“그, 그럼 들어갈, 때까지, 기, 기다리던가!”
“그럼, 빨리, 들어, 갔어야, 하지 않겠나.”
말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 몸을 타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손바닥이었지만, 다음엔 엉덩이를 내 허벅지에 대놓고 앉았다. 그 부드러운 감촉을 무시하려 하며 등을 최대한 차 시트에 묻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를 쳐다봤다. 마왕도 빨간 얼굴로 눈웃음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껏 손 만지는 건 물론이고 껴안기까지도 했다. 물론 사격장에서 그런 것처럼 키스도 했고. 하지만 이런 식은 처음이었다. 아까까지는 친하게 대해주던 강아지 같은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뭔가 목적을 가진 뱀처럼 보였다.
마왕은 몸을 타고 지나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때 차 주인인 아저씨가 운전석에 탔다.
“어휴, 원랜 남자가 이래야 되는데.”
아저씨가 시동 걸면서 중얼거린 말이었다. 계속해서 듣는 말에 물어봤지만, 그는 혼잣말이었다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차는 생각보다 금방 숙소에 도착했고, 이 주변은 음식점이나 펜션 몇 개 있는 게 전부였다.
우리가 내리자, 아저씨는 차 창문을 열며 마왕을 불렀다.
“거기 아가씨!”
“음?”
나도 따라가려 했지만, 그가 날 막았다.
“아가씨한테만 할 거니까 학생은 좀 빠져 있어요. 하! 여자한테 이런 말 할 줄 몰랐는데!”
헛웃음을 짓던 그는 다가온 마왕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얼마 안 돼서 차가 떠나고, 돌아온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아저씨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닐세! 그저 필요한 건 다 안에 있다고 하더군!”
마왕은 대답하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근처에 있는 모텔로 들어왔고, 결국 침대에 앉은 채 어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똑똑똑!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져올게!”
“그럼 짐이 먹게 준비하지!”
가운 차림으로 걸어가서 방문을 열었다. 배달원은 여기 배달이 익숙한지, 복도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치킨이 담긴 봉투를 들고 실내로 들어왔다. 마왕은 방 구석에 있는 작은 원형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저녁이로군!”
“저녁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치킨을 먹으면 들어오기 전처럼 자연스러운 사이로 돌아올 줄 알았다.
“……으적으적”
“……으적으적”
하지만 아니었다. 우리는 말없이 치킨 조각을 뜯었다. 취하면 괜찮아 질까 봐 시킨 맥주도 마셨지만, 가슴만 더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찌익
“쭈우우웁, 꿀꺽, 꿀꺽.”
마왕도 긴장됐는지 치킨 무 비닐을 뜯어서 그 국물을 마셨다. 이번에만 벌써 세 번째였다. 추가 주문시킨 게 5개였으니, 아직 안 뜯은 게 2개나 남아 있었다. 치킨 몇 점 먹는 동안 절반을 넘게 먹는 걸 보니, 금방 다 먹을 것 같았다.
나는 좀 풀어질 기회라 생각해서 한 번 물어봤다.
“그거 맛있냐?”
“이거 말인가?”
치킨무 국물을 먹다 말던 마왕이 화색 하며 대답했다. 그녀도 이 상황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시원하니 맛있다네. 자네도 한 번 먹어보게.”
그녀가 하얀 사각형 플라스틱 통을 내밀었다. 내가 그걸 받아먹으려 하자 그 통을 약간 뒤로 뺐다.
“왜?”
“자네 손에 묻은 양념 말일세.”
내밀었던 손가락을 내려봤다. 치킨에 발라져 있던 새빨간 양념치킨이 묻어 있었다.
“아 미안.”
“잠깐 기다리게.”
사과하며 손을 치우려는데 그걸 마왕이 막았다.
“왜?”
그녀는 대답 대신 조용히 치킨 무를 내려놨다. 그러더니 그걸 들었던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어, 야?”
“그냥 닦으면.”
“응?”
“……아깝지 않나.”
그렇게 말한 마왕은 뭔가 결심하려는 듯이 짧게 심호흡했다. 긴장돼서 가만히 지켜보자, 그녀가 입술을 벌리고 내 검지를 입에 넣었다.
“!”
편의점에서 내 왼손 약지를 깨물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촉감이었다. 손가락 뿌리가 연분홍색 입술에 덮이고, 부드러운 혀가 묻은 양념을 핥아갔다.
“쪽, 쩌업.”
“!!!”
손을 뺄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지금 난, 손가락을 맛있는 듯이 핥는 소희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켰던 치킨이 새벽 내내 식어갔고, 반대로 우리는 더 뜨거워졌다.
다음 날 아침, 세희에게서 문자가 1통 와 있었다.
세희: 다음은 제 차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