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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화 〉수갑 (67/72)



〈 67화 〉수갑

드디어 중간고사가 끝났다. 시험 문제는 별로 어렵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좀 늦게 나왔다는 점이  만족시켰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취방으로 향했다. 거기엔 먼저 시험이 끝난 마왕이 게임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자취방 문 앞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익숙한 운동화가 현관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방안엔 게임에서 나는 소리와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난 현관문을 닫으면서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내 존재를 알렸다.


“나 왔어.”

“오! 자네 왔는가!”

마치 여기가 자기 방인 것처럼 마왕이 날 반겼다. 평소 입던 추리닝은 진작에 벗어서 침대 위로 던져 놓았고, 지금은 더 편한 돌핀 팬츠와 헐렁한 흰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기다렸잖나.”

그녀는 게임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내게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걸음 디딜 때마다 예쁜 은발이 흔들렸고, 동시에 가슴 부분도 미묘하게 흔들렸다.


“야! 너 브라  찼지!”



“무슨 상관인가, 자네 방인데.”


“어어, 야!”


이제  신발 벗고 올라온 날 마왕이 있는 힘껏 껴안았다. 나도 얇은 티셔츠 하나만 입은 상태라 그 감촉이 그래도 전해졌다.

신체 부분이 반응하기 전에 그녀를 떼어냈다.

“아니,  방에  때 속옷 좀 입고 다녀라.”


“에이.”


그 말에도 마왕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눈웃음을 지었다.


“좀 있으면 벗을 건데, 귀찮지 않나.”

“안 귀찮거든?! 빨리 입어.”

“입기 귀찮은데 말이지, 아!”

갑자기 그녀가 뭔가 떠오른 것처럼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날 놀리는 것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봤다.

“자네가 벗기고 싶었나? 그런 겐가?”


“그럴 리가 있겠…….”


말끝을 흐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네. 벗기는  취향이니까 좀 입어주라.”

“아하핫! 알았네. 자네 소원이 정 그러하다면 들어주지.”


마왕은 몸을 돌려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보니, 그녀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자기 옷더미 속에서 살구색 브라 찾는  볼 수 있었다.


내 계략이 통했다.

훌렁!

하지만 그녀가 티셔츠 벗는 건  계략에 없었다. 황급히 고개 돌려 다른 곳을 쳐다봤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다시 마왕을 쳐다봤다.

“왜 그런가?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막 티셔츠 자락을 내린 그녀는 날 귀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나도 웃어 보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항상 처음 보는 것처럼 예뻐서 그렇지.”

“하핫, 자네 볼 줄 아는군?”

“맨날 보는데, 당연히 볼 줄 알지.”

말하면서 등에 멨던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놨다. 그런데 그 옆엔 익숙한 가방이 하나  놓인 게 보였다.


“너 가방 가져왔냐?”

“그렇네만?”


“너 사물함 쓰잖아.”


“가방에  책만 넣고 다니라는 법 있나? 이거 가져왔네만.”


마왕은 자기가 하고 있던 스위치를 들어 보였다. 처음엔 내 건 줄 알았는데, 잘 보니 마왕 거였다.


“오늘은 게임 하려고? 피시방은 안 가게?”

“뭔가. 가고 싶은 겐가?”


“딱히 가고 싶은 건 아닌데.”


“흠, 자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갈 거네만. 아니라면 오늘은 이거 하면서 즐기세.”


“알았어 알았어.”


재차 대답하면서 침대 위에 놓았던 고등학교 운동복을 집어 들었다. 물론 마왕 거 말고 내 거. 어쨌든 갈아입기 위해 그걸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냥 여기서 갈아입게.”

“너 훔쳐볼 거잖아.”


“아닐세. 대놓고  예정일세.”


“자랑이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마왕은 다시 게임 중이었고, 나도 게임하기 위해 책상 옆에 충전시켜 두었던 스위●를 집었다. 그런데 그 도중, 책상 아래에서 사람 머리만  분홍색 종이컵을 발견했다.


31가지 맛으로 유명한 아이스크림 종이컵을 집어 들고 마왕에게 물었다.


“너 아이스크림 시켜 먹었냐?”

“자네가 하도 안 와서 시켜 먹었네만.”


“그럼 내 거는?”


통이 상온에 노출된 만큼, 속은 녹아내릴 만한 아이스크림은 담겨 있지 않았다.


내 질문에 마왕은 게임기를 내리며 날 보고 웃었다.


“자네가 하도  와서, 다 먹었네만?”

“다 먹었냐! 이걸!”


“말했잖나. 자네가 늦었다고.”

내가 소리 지른 건 그녀가   안 남겨서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람 머리만 한 통을 혼자 다 먹은 것에 대해 경악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스크림 통을 책상 위에 두고, 책상 의자에 앉아 게임하고 있는 마왕을 훑어봤다. 그녀는 아직 5월인데도 한여름에 어울릴 법한 얇은 반팔 티셔츠와 허벅지가  보이는 검은 돌핀 팬츠 차림이었다.

이렇게 얇게 입고도 차가운  이렇게나 많이 먹다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충고했다.


“너 그러다 감기 걸려.”

“괜찮네. 자네도 짐의 건강에 대해선  알고 있잖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감기 조심해. 아니면 배탈이나.”

“짐 걱정 말고 어서 게임이나 하게. 기다리고 있네.”

“알았어.”

걱정스러운 마음을 접고, 게임기를 집어 들었다. 게임에 접속하면서, 혹시 모르는 마음으로 마왕에게 질문했다.


“내 거 아이스크림 진짜 없냐?”


“없네만.”


“진짜로?”

“실은, 자넬 위해 사 온  하나 있다네.”

“오! 뭔데!”

“알고 싶나?”

“당연하지!”

“훗! 어쩔 수 없군!”


마왕은 우쭐대는 표정으로 게임기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놨다. 난 여기서 그녀가 냉장고로 걸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향하는 곳은 내 가방 옆에 있는 자기 백팩이었다.


“기대하게나.”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자기 가방에서 꺼낸 건,

“자! 보게!”

챨그락

은색 수갑이었다.

“그게 뭐야아아아!!!”

경악한 내 반응을 보고도 마왕은 뻔뻔하게 수갑을 흔들었다.

“수갑이네만?”

“수갑인  알고 있어! 근데 왜 그게  위해  온 거냐고!”


“그리 눈치가 없어서야.”

적반하장으로, 그녀는 뭘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이불이 어지럽게 놓인 침대를 향해 턱짓하며 당당하게 외쳤다.


“여기서 쓰일  당연하잖나!”

“뭐가 그리 당당해!”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잖나.”


“부끄러워하라고!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걸 원한다고 했어!”

“흠, 그건 저번  월요일이었네.”


갑자기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산을 바라봤다. 사실 내 자취방 벽지는 보는 거였지만.

“자네가 짐 위에서 한창 허리를 흔들 무렵,”

“야!”


“그때 자네가 짐의 양손을 이렇게 잡고,”


내 말을 무시한 마왕은 자기 팔목을 X로 교차시켰다.

“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억압했잖나.”


“아, 아니, 그건, 그랬지만…….”


자세한 상황묘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한창 하는 도중이라 흥분한 바람에 벌인 일이었다. 게다가 마왕도  흥분한 거 같아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자기도 부끄러운지, 마왕도 얼굴을 붉히며 수갑을 내 앞에 흔들었다.


찰그락 찰그락

“아하핫! 뭘 그리 부끄러워하는 겐가! 누가 보면 숫총각인  알겠네.”


“너도 부끄럽잖아, 지금!”


“지, 짐이 말인가? 어딜 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겐가?”

“네 얼굴! 다 빨개졌는데!”


“에잇! 시끄럽네!”

마왕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게임기를 잡고 있는 손에 수갑을 채웠다.

철컥!


“자넬 체포하겠네!”


“뭐?! 왜!”

“짐을 부끄럽게  현행범일세! 침대로 동행하지!”


철컥!

이번엔 자기 손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그리고  억지로 일으켰고,

“으햣!”

“어, 야!”

나와 함께 침대로 몸을 던졌다. 싸구려 침대 속 스프링이 소리지르며 우릴 탄력 있게 받아줬다.

“깔깔깔!”


마왕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그 바람에 손목에 찬 수갑이 아플 만큼 조여왔지만, 웃는 그녀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네.”


웃던 마왕이 몸을 옆으로 누우며 사랑스러운 파란 눈동자로 바라봤다. 그러면서 미란다 고지 비슷한 걸 읊었다.

“자넨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없다네.”

“뭐야 그게.”

“그리고 묵비권은……, 짐이 행사하지.”

“무슨 소리야.”

마왕은 대답 대신 자기 뒤쪽으로 눈짓했다. 거기엔 자기가 가져왔던, 그리고 수갑을 꺼냈던 가방이 있었다.

“도대체 뭘 더 가져온 거냐?”

“같이 한 번 보겠나?”


“안 보고 싶다고 해도 보여줄 거잖아.”


“하핫! 자넨 짐을 너무 잘 안단 말이지!”

밝게 웃던 그녀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 손목에 찬 수갑이 움직이면서, 수갑 때문에 손목이 아파졌다.


“아악! 잠깐만!”

“왜 그런가, 자네?”


“수갑수갑수갑!”


“뭣이?”

마왕이 당황하면서 수갑  내 손목을 내려봤다. 그제야 거의 조일만큼 좁혀진 은팔찌를 보며 내게 물었다.


“많이 아픈가?”


“엄청. 근데 가만히 있으면  아파.”

“움직이면 아프다는 말이군.”


“이거 좀 풀자. 열쇠 없어?”


“가방에 있을 걸세. 일어나 보게.”

즐거웠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왕은 수갑 차지 않은 손으로 가방을 뒤적였다.

“잠깐만 기다리게. 금방, 어엇?”

“뭐야,  ‘어엇?’ 은”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보게.”


“야!”

마왕의 하얗던 얼굴이 파랗게 변해갔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가방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아예 가방을 뒤집어 모든 내용물을 바닥에 흩뿌렸다.


펜 몇 개, 노트 한 권, 빵빵한 파우치, 동전 한 줌, 게임기 충전기, 심지어는 구멍 난 탁구공이 달린 재갈까지 나왔다. 하지만 수갑 열쇠처럼 생긴 쇳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방 옆에 달린 작은 주머니까지 뒤지던 마왕이 날 불렀다.


“자, 자네.”

그녀는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수갑 열쇠에 대한 행방을 밝혔다.


“아무래도, 집에 두고 온 모양일세……!”

“뭐?”


“미안하네!”


머리가 아파졌다. 그래도 그녀에게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 입장에선 나와 즐기려고 가져왔을 건데, 열쇠같이 작은 물건은 빠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떡하지? 너네 집에 가야 되나?”


“그, 그러면 될 걸세. 허나 어머니께서 계실 건데, 어떡하면 좋겠나.”


“숨어서 들어가면 되지. 너 차 가져왔지.”

“가져왔네만, 이러면 자네가 운전해야 할 걸세.”

“왜? 아아…….”

 오른쪽 손목, 마왕의 왼쪽 손목에 수갑 찬 형태였다. 운전석이 왼쪽에 있으니 오른손에 수갑 찬 내가 운전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면허는 있어도 아직 서투르다는 게 문제였다.

“안 되겠는데. 그럼 택시 타고 갈까?”

“이 꼴로 어떻게 택시를 타나!”

마왕이 수갑 찬 손을 위로 흔들었다. 그러자 거기에 연결된  손목 살갗에 수갑이 파고들었다.

“아악! 흔들지마!”


“미, 미안하네! 일부러 그런 건 아닐세!”

“아니야, 괜찮아.  움직이면 돼.”

어후, 아파라……!

우리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대충 몇 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내 머릿속에서 해결책이 하나 떠올랐다.

“세희한테 부탁하는  어떨까?”

“안 되네! 짐의 누이에게 이런 꼴을 보이란 말인가!”


“그럼 어떻게 해! 너네 어머니한테 부탁할 수도 없잖아!”

“크윽!”

“세희한테 열쇠 가져오라고 부탁해서, 들어오지 말고 문밖에서 열쇠 달라고 하면 되잖아.”


“으으음.”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마왕이 신음했다. 고민하던 그녀는 희망과 절망 섞인 발언을 내뱉었다.

“알았네, 그렇게 하세.”


“그래! 내가 세희한테 전화해서,”

“허나 세희 학교가 끝나려면 시간이 걸릴 걸세.”


“뭐? 얼마나 걸리는데.”


“아마 한두 시간은 걸리지 않겠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루종일 붙어있는 우리였는데, 한두시간 붙어있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안심하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다행이네. 갑자기 급한 일만 안 생기면 지낼 만하겠어.”


“급한, 일이라니?”

갑자기 마왕이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물었다. 난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물은 질문에 대답했다.

“갑자기 아프다던가, 아니면 화장실에 가고 싶다던,”

꾸루룩!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난 곳은 지금 손으로 감싸고 있는 마왕의 뱃속이었다.

“너, 설마.”


“아닐세. 짐은, 아닐, 아닐세.”

하지만 그걸 부정하려는 듯이 그녀 배가 울려 댔다.

꾸룩, 꾸루룩! 꾸루루룩!

“크으윽!”


이제는 그녀 얼굴이 보라색으로 되어 버렸다. 난 그제야 아까 그녀가  먹었다던 아이스크림 통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얇은 차림까지도. 찬 음식을 마구 먹고 몸을 차게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황급히 세희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 사이 마왕은 그 열쇠가 어디 있는지 말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크읍! 보, 보냈나?”

“어, 보냈어.”

“이제, 기다리기만, 으으윽!”

“일어날  있겠어?”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그녀를 천천히 일으켰다. 마왕은 활기찼던 평소와 다르게, 나이 지긋한 할머니처럼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한걸음 디딜 때마다 꾸루룩 소리가 들려오며 마왕이 신음했다. 그래도 그녀는 겨우 변기 위에 앉을  있었다.

나는 그녀가 민망해하지 않기 위해, 밖에 서서 문을 사슬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닫았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이 오길 기다렸다.








세희가 오기까지는 1시간하고도 47분이 걸렸고, 마왕이 한계를 맞이한 건 1시간을  지났을 때였다.


 열쇠가  때까지 울부짖는 마왕을 달랬다.

“으허허허헝!”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울지마, 응?”

“으어헝! 어찌, 훌쩍 그러겠나! 자네, 자네 보는 앞에서, 허허헝!”


“어쩔 수 없었잖아.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고,”

“흐어어엉! 그래도, 그래도!”

“괜찮다니까, 어쩔 수 없었잖아. 응? 그러니까 울지마. 냄새  난다니까? 소리도 안 들렸고!”

“거짓, 거짓말하지 말게! 짐을 위해서 하는 거잖나! 훌쩍!”

“진짜야! 냄새 하나도 안 나! 흐읍, 하! 흐읍, 하! 냄새 안 나는데?”

“……훌쩍! 지, 진짜인가?”


참고로, 사람 속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물론 마왕도 마찬가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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