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하렘, 이 C......벌
점심시간에 밥 먹기 전 마왕과 조깅을 뛰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달릴 땐 죽을 만큼 힘들어도, 끝나고 나면 꽤 많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머리 묶은 마왕이라는 진귀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나는 뺨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마왕을 쳐다보며, 아까 봤던 뒷모습을 기억했다.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건, 발을 디딜 때마다 요동치던 은색 말총머리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 너머로는 묶이지 못한 짧은 잔털 또한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가장 압권은 머리를 묶을 때 하던 ‘그 자세’였다.
남자가 주차권을 물고 후진하는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두근거리듯, 난 마왕이 머리끈을 입에 물고 긴 은발을 양손으로 모으는 장면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걸 모르는 마왕은 매력 포인트인 머리끈을 벗으며 내게 물었다.
“어떤가, 오늘은 좀 빨리 달려 봤네만. 익일도 이 속도로 달리는 게 좋겠나?”
아니, 어쩌면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끈을 벗으며 고개를 흔들자, 한줄기로 뭉쳐 있던 은발이 흔들리며 퍼지는 게 보였으니까.
난 그 장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달려서 그런 건지,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니……! 오늘, 하아……! 뒤질 뻔했거든?”
“그래도 이번엔 토하진 않았잖나. 내일도 같은 속도로 달리겠네.”
내 말을 무시하는 그녀가 나와 같이 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며칠 전까진 자전거나 전동킥보드를 타다가, 내 발에 속도가 붙고 지구력이 붙기 시작하자 이렇게 함께 달리게 된 것이었다.
이제 그런 걸 타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지헌아~!”
저 멀리서 유리가 자전거를 타고 다가왔다. 내 옆에서 멈춘 뒤 내린 그녀는, 자전거 바구니에서 수건과 물통을 꺼냈다. 그러더니 수건을 내 얼굴에 비비며 땀을 닦아줬다.
“세상에, 땀 좀 봐! 너 진짜 열심히 달렸나 보다. 그치?”
“어, 응.”
“힘들지? 나도 자전거로 따라오는데 힘들더라. 선배!”
유리는 내게 물통을 건네며 마왕을 불렀다.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심하다니, 뭘 말하는 겐가?”
“그렇게 자각 없는 폭력이 제일 나쁜 거예요! 우리 지헌이 쓰러질 뻔했잖아요!”
“짐은 제대로 지헌 페이스에 맞춰 달렸네만……”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왕 말이 맞았다. 나는 온몸이 땀에 젖고, 아무리 숨을 쉬어도 호흡이 가라앉지 않았다. 반면 그녀는 숨이 좀 거칠어지고 땀만 조금 맺혔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내게만 신경 썼다.
“지헌아. 물 마셨어? 마셔야지. 너 주려고 사 온 건데.”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생수통 뚜껑을 땄다.
“…….”
내가 마실 때까지 눈을 떼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 난 할 수 없이 물통 입구에 입을 대고 마셨다.
“꿀꺽, 꿀꺽, 꿀꺽, 후우.”
500ml짜리를 절반 정도 비운 나는 그걸 마왕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내 뜻을 알고 받으려 했지만,
“잠깐만요!”
유리가 막았다.
“이거 우리 지헌이 주려고 사 온 거거든요? 근데 왜 선배가 마셔요?”
“’그’ 지헌이 짐에게 준 게 아닌가.”
“그래도 그렇죠! 선배 건 선배가 알아서 사 마시세요.”
“에이, 치사하게 왜 그러는가. 닳는 것도 아니고.”
마시면 닳는 게 맞았다. 난 마왕 편을 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호흡이 가라앉은 나는 유리를 불렀다.
“유리야.”
“어? 응? 왜 그래. 물 더 마시고 싶으면 마셔. 더 있어.”
그녀는 자전거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한 그대로 바구니엔 500ml짜리 생수병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시선에 난 눈을 피하며 부탁했다.
“아니, 선배도 마시게 하면 안 될까? 어차피 물도 많잖아.”
“그럴까?”
마왕에게 대들었던 태도와 달리, 유리는 바로 바구니에서 물통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자요.”
“어엇, 고맙네.”
“우리 지헌이가 착해서 주는 거예요. 고마운 줄 알아요.”
“그래서 방금 고맙다고 했네만.”
유리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날 돌아봤다.
“지헌아! 나 선배한테 물 갖다 줬어. 나 잘했지?”
“어, 응, 잘했어……”
“너한테 이렇게나 잘해주는 건 나밖에 없지? 그렇지?”
내 고민거리는 너밖에 없어, 이 년아.
사실 고민거리는 유리와 더불어 세희도 있었다. 최근 마왕이랑 함께 놀 때마다 ‘언제 해요?’라며 문자를 보냈다. 게다가 은밀한 사이트를 들어도 언니와 해달라는 문자를 보낸 뒤엔, 원격조종 해킹으로 그 사이트를 꺼버렸다. 그 직후 마왕에게 전화 걸어서 어색하게 만들고.
참고로 그 일 때문에 세희가 말한 ‘그게’ 뭘 의미하는지 겨우 알게 됐다. 그걸 안 직후 마왕이랑 말하는 게 조금 뻘쭘했다.
어쨌든 내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바로 유리였다. 스토킹한 걸 들킨 유리는 아예 날 대놓고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강의 시간엔 쉴 새 없이 말을 걸었고, 운동 중엔 이렇게 참견하기 일쑤였다. 그것 때문에 마왕이랑 느긋하게 놀지도 못하고.
요 며칠간 받은 스트레스를 담아 그녀를 불렀다.
“유리야.”
“응? 왜 그래? 너도 선배한테 물 준 게 마음에 안 들지?”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하면,”
“하면 뭐? 좋다고?”
“아니, 좀 부담스럽다고.”
“뭐?”
유리는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부담스럽다고……?”
“이렇게 계속 좀, 그런데.”
“알았어, 그럼……. 그럼 안 할게…….”
유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내게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포기하는 건 아니었다.
“다음엔 더 잘 할게!”
이것 봐.
내게 무릎 꿇고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문제는 여기가 학교운동장에, 점심시간이라 학생들이 잔뜩 보고 있다는 거였다.
“어어! 그러지마!”
“네가 용서해 줄 때까진 안 일어날 거야!”
“알았어! 알았어! 용서해줄게! 일어나!”
“그래?”
용서해준다는 내 말에 그녀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싫다는 표정을 지으면 굳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이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마왕 또한 아랫입술을 깨물며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먹을 들진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들 보는 앞에선 멋대로 폭력을 행사하긴 싫은 모양이었다.
나도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지만 휘두르진 않았다. 동성인 여자라면 몰라도 남자인 내가 때리면 무조건 삐용삐용, 그러니까 경찰차 탄다는 소리였다.
화를 속으로 삭이는 동안, 유리는 영악하게 웃으며 뻔뻔한 얼굴로 물었다.
“지헌아, 이제 밥 먹을 거야? 어디서 먹을 거야? 응? 혹시 선배랑 먹게? 그럼 나도 같이 먹자. 어디로 갈까? 학식? 아니면 네 자취방에서 뭐 시켜 먹을까? 내가 살 거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계속해서 쏟아지는 질문에 머리가 아찔했다. 난 감정을 최대한 담아 누르면서 마왕에게 물었다.
“야, 너 어떻게 할 거냐?”
“짐은 피,”
“피시방에서 먹자! 지헌아!”
내가 마왕에게 이야기를 돌리니, 유리가 가로챘다. 대답할 기회를 놓친 마왕은 미간을 좁히며 끼어든 그녀를 쳐다봤다. 유리는 그런 시선을 받고도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내게 매달렸다.
“지헌아. 게임하면서 밥 먹으면 좋잖아. 메뉴도 많으니까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고. 그렇지?”
그 모습을 보고 뭐라 할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또 사람들 보는 앞에서 빌 게 뻔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피시방에 가면 적어도 둘이 싸우진 않았다. 아니, 유리가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편이 더 맞았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알았어. 그럼 피시방 가자. 너도 좋지?”
“음.”
아직도 마음이 안 풀렸는지 마왕이 연분홍색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나도 좋은 건 아니지만, 이게 사태를 최악으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있는 차악(次惡)의 선택이었다.
“그럼 피시방에서 점심 먹는 걸로. 근데 그 전에……”
말끝을 흐리며 몸을 내려봤다. 운동하기 전에 갈아입었던 트레이닝복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전에, 나 자취방에서 샤워하고 갈게.”
“자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마왕이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짐도 같이 가지! 짐도 땀을 꽤 흘렸으니!”
“안 돼요!”
이번에도 역시 유리가 끼어들었다.
“자취방에 가서 뭘 하려고요! 저도 같이 가요!”
“아무것도 안 하네만! 그저 씻을 뿐이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지헌일 강간할 거죠!”
“여자가 어찌 남자를 범한다는 겐가!”
“왜 못해요! 무식하게 힘만 센 여자가!”
“뭣이!”
주먹 다툼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 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만! 그럼 다 같이 가면 되잖아!”
내 말을 들은 둘은 가만히 서로를 노려봤다. 거기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마왕이었다.
“알았네. 유리가 있는다고 못 씻을 것도 아니고. 짐은 괜찮다네.”
“……알았어. 우리 지헌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들어야지.”
둘은 서로 알았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그래도 피시방에 가면 나아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더라도 같이 게임을 하면 친한 친구가 된다, 고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다.
40분 뒤, 피시방.
“유리! 자네 눈은 장식으로 달렸는가? 어찌 노틸로 그랩을 하나도 맞히지 못할 수가 있는가!”
“선배는요! 제가 잡아도 킬도 못 내시잖아요! 잡지도 못하는 거 끌어서 뭐 하게요!”
“자네가 먼저 잡아야 킬을 내지!”
“누가 들으면 제가 잘못한 줄 알겠어요? 선배?”
“아니었는가?”
피시방에 와서도 둘이 싸우는 건 똑같았다.
여기 오면 괜찮을 줄 알았다. 최근 유리가 게임을 배우길래 선택한 곳이 이곳이었다. 그런데 낮은 실력은 그렇다 하더라도, 죽으면 무조건 마왕 탓을 하는 게 문제였다.
나 씻을 땐 방에서도 싸우더니, 여기라고 다르지 않았다.
일단 최대한 둘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해 봤다.
“내가 트롤 짓 해서 그래. 미안해.”
“자네는 아무 잘못 없네! 그런데 이 자가!”
“지헌아, 넌 괜찮은데 선배가!”
역시 멈추지 않았다.
내 양옆에서 싸우느라 주변의 이목을 끌 때, 내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일단 받아봤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혹시 강지헌씨 핸드폰 될까요?
”“어떤 년인가(이야)!””
전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는지 둘이 사납게 반응했다. 둘이 처음으로 의견 일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화를 계속했다.
“아 네. 맞는데요.”
-여기가 학생회실인데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양옆에서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학생회실이래.”
그러자 둘은 노려보던 눈길을 거두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분위기는 여전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난 통화를 계속했다.
“거기서 왜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MT를 가게 됐는데, 지헌씨는 아직 신청을 안 했잖아요. 만약 가실 거면 다음주 수요일까지 9만원을 내면 되거든요.
“아, 그래요?”
-네. 꼭 오시길 바랄게요. 안녕히 계세요. 뚝.
다음에도 전화할 사람이 있는지 상대방이 멋대로 끊어버렸다. 내가 폰을 내려놓자 양쪽에서 질문을 던졌다.
“뭐래?”
“뭐라는 겐가?”
“아니, MT 오라고 전화 왔는데.”
“가자! 지헌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가 말했다.
“대학 다니면서 MT 한 번은 가야지!”
그런데 웬일로 계속해서 마왕도 같은 의견을 냈다.
“그렇네. MT 한 번 쯤은 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자네가 간다면 짐도 같이 가겠네.”
반응한 건 내가 아니라 유리였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겐가?”
“선배는 올해 안 간다고 했잖아요!”
언제 그 말을 한 건지 생각해봤다. 그러고 보니 하준이 아직 과대일 때, 그가 같이 MT 이야기를 꺼내기에 안 갈 거라고 했다.
마왕도 그때를 떠올렸는지 하준을 언급했다.
“그땐 그놈이 끼어 있으니 안 간다고 한 것이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날 곁눈질하며, 키보드에 올렸던 손을 움직여 날 건드렸다.
“그런데 지금은 이 지헌이 있지 않나?”
물론 유리가 그걸 보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선배!”
어쩌면 이건 익숙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일본 애니 같은 창작물에선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내용은 흔한 클리셰였다. 둘 사이에 끼인 주인공을 볼 땐 그저 부럽기만 했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누가 이걸 보고 부럽다고 생각할까? 점심까지는 그저 마왕이랑 운동하고 피시방 갈 생각이었는데. 하렘, 이 씨이……벌.
오전 강의가 끝나고 화장실에 가는 중이었다.
“오, 지헌! 어딜 가는 겐가?”
뒤를 돌아보니 마왕이 보였다. 평소대로 검은 추리닝을 입은 그녀는 날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난 반가운 듯이 웃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화장실 가는데, 왜.”
“아앗.”
드디어 매너라는 걸 깨달았는지, 마왕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거, 미안하게 됐군.”
“괜찮아. 그럼 나 화장실 간다?”
“그래. 식사 맛있게 하게.”
“밥 먹으러 가는 거 아니야!”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몸을 그대로 돌려 마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실실 웃으면서 화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식사하러 가는 게 아니었나?”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마왕은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피면서 이유를 조목조목 대기 시작했다.
“먼저, 자네는 친구가 없지 않나.”
얘는 친구라기엔 좀 달랐으니 반박하진 않았다.
“또, 지금이 점심시간이지 않나.”
그것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화장실은 타인에게 들키지 않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지.”
뭔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딱히 틀린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끝까지 지켜봤다.
세 가지 이유를 댄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친구 없는 자네가 점심시간에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가는 건, 밥 먹으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나?”
“아니라고!”
“에이! 짐이 자넬 그리 잘 아는데, 그거 하나 모르겠나.”
“네가 뭘 아는데!”
내 말을 들은 마왕은 웃으며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짐이 하나 예언하지.”
“뭔데.”
“이제 자네는 얼굴을 붉힐 걸세. 붉히지 않는다면, 짐이 자네에게 점심을 사주지.”
“좋아! 해 봐!”
밥을 사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호언장담하자 마왕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자신 있나 보군?”
그러더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어엇, 뭐하냐?”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럴수록 마왕은 계속해서 다가왔다.
“그러지 말게. 자네가 한걸음 물러날수록 짐은 두 걸음 다가갈 것이네.”
“그냥 오지마!”
“어허! 그렇게 가다간.”
딱!
“악!”
“벽에 부딪히고 말 걸세. 뭐, 이미 늦었지만 말일세.”
계속되는 뒷걸음질에, 나는 벽에 뒤통수를 부딪치고 말았다. 머리가 쑤셔오는 고통에 두 눈을 꼭 감고 뒤통수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 눈물 고이는 눈꺼풀 너머로 마왕 목소리가 들렸다.
“짐이 경고하지 않았나.”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다고 생각해, 무의식적으로 눈이 떠졌다. 그러자 바로 코앞에 있는 마왕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아픔은 좀 가시는가?”
날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는 그 말만 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웃는 마왕은 말도 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소희 얼굴을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얀 피부에 솜털이 있는 걸 보는 게 처음이었고, 주근깨가 옅게 박힌 것도 처음 보는 거였다. 그러다 묘하게 반짝이는 연분홍색 입술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바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마왕이 소리쳤다.
“하핫! 짐의 승리로구먼?”
“고개 돌리는 게 아니라 얼굴 빨개지는 거잖아! 달라!”
“아닐세! 자네 얼굴이 빨개진 게 제대로 보이네만.”
“아니거든! 잘 봐!”
“그렇다면 짐에게 얼굴을 보여주게. 그렇게 숨기지 말고.”
그렇게 계속 붙어있으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귀까지 뜨거운 감각이 느껴지지 마왕이 쾌재를 불렀다.
“호오! 짐의 승리로다!”
나는 기뻐하는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래 그래, 네 승리니까 학식으로 가자.”
“음? 그것이 무슨 소린가?”
마왕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한쪽 손을 높이 쳐들었다.
“짐이 이겼으니 그 기념으로 자네에게 한턱 쏘지!”
“쏜다고?”
뭐야. 어찌됐든 자기가 쏘는 거였잖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웃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 사줄 건데. 학식?”
“학생 식당은 좀 질렸고, 보는 눈도 좀 많단 말일세. 그러니 항상 가던 곳으로 하지. 자네는 어떤가?”
내가 그녀와 항상 가던 곳은 얼마 없었다. 검도장, 내 자취방, 그리고…….
“피시방에서 먹게?”
“뭔가. 싫은 겐가?”
“공짜라면 흙탕물도 퍼먹어야지! 가자!”
“어, 음, 진짜로 먹으면 안 된다네.”
“그냥 말이잖아!”
내 대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왕이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핫! 농담일세! 그럼 가세!”
힘차게 말한 그녀는 복도를 걸어갔다. 하지만 이내 발을 멈추었다.
“아, 근데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않나?”
“……하게?”
“왜 그런가. 하루 이틀도 아닐지언데.”
“하루라도 쉬는 날이 없어요, 진짜.”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 맛있게 하게!”
“밥 먹는 거 아니라고!”
농담을 뒤로하고 화장실 변기칸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놨다. 지퍼를 열고 그 안에 책이나 필기구가 아닌 전혀 다른 걸 꺼냈다.
내가 꺼낸 건 아까 편의점에서 산 김밥, 이 아니라 체육복이었다. 마왕을 만난 뒤부터, 점심 먹기 전엔 항상 런닝을 뛰는 게 일상이었다. 끝날 땐 기분 좋아도 달릴 땐 힘들어서 싫은 게 당연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망칠 수도 없고.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갈아입은 나는, 가방을 든 채로 화장실을 나왔다. 그러자 무슨 수문장이라도 된 듯한 마왕이 팔짱을 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나오는군!”
“하아, 나가기 싫었는데.”
“그렇다고 짐까지 싫은 건 아니지 않나?”
“그건 그런데.”
“흐흠!”
내 말을 들은 그녀는 흐뭇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짐이 좋은 건 맞나 보군?”
“잠깐만요!”
그때 유리 깨지는 듯한 목소리가 우리 둘을 갈라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