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오빠는 진짜 귀엽네요
평화로운 주말 오전, 난 바로 나갈 수 있게 청바지에 맨투맨이란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대로 핸드폰을 보면서 마왕이 오길 기다렸는데, 갑자기 현관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이 노크 소리를 듣고, 난 누가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왕이라면 노크 없이 비번 치고 들어왔을 거고, 부모님이었다면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하셨다.
머릿속으로 누가 온 건지 계산하는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저예요. 문 좀 열어주세요.”
차가우면서도 도도한 목소리의 주인은 세희였다.
내 방에 왔을 때 좋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찜찜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현관문까지 가서 문을 열어주니, 청바지에 보라색 맨투맨이라는 간단한 차림인 세희가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빠.”
“어, 응.”
그녀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고운 흑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스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풋풋하면서도 귀여운 차림인 세희에게 어색하게 반응했다.
그것도 그럴 게, 세희가 온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너 왜 왔어?”
“언니가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
“소희가? 왜?”
물으면서도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전화 걸었다. 통화하는 동안 여기 계속 서 있으면 미안하니, 세희를 안으로 들였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들어와.”
“네, 감사합니다.”
그녀 먼저 안으로 보내고 현관문을 닫는데, 그때 마왕이 전화 받았다.
-음, 세희 왔는가?
받자마자 하는 말을 보니, 정말 마왕이 보낸 게 맞는 모양이었다.
“어, 왔는데. 네가 여기 오라고 했어?”
-맞네만.
“왜? 아니, 세희도 놀러 가는 거야?”
-세희도 같이 온다고 했잖나. 짐이 말 안 했던가?
“말 안 했어!”
-흠, 그런가 보군. 핫핫핫!
뻔뻔하기는…….
“그런데 넌 왜 안 오고 세희만 와?”
-아, 그것 말인가. 갑자기 경찰서에 볼일이 생겨서 말일세.
“왜, 너 사람 죽였냐?”
-짐이 왜 사람을 죽이는가!
“그럼 팼구나?”
-아닐세! 거기 보관된 총기 때문일세! 가서 누락된 서류가 있으니 빨리 오라고 하잖나!
“그런 거였냐? 다행이네.”
-분명히 다행이네만!
마왕 말투는 화난 것 같아도, 들리는 목소리는 웃는 것처럼 밝았다. 내 농담에 맞춰주면서 그녀도 즐기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농담을 던지던 나는 문득 세희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디 앉아 있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뻘쭘하게 서 있는 걸 보고 생각난 나는 바로 마왕에게 물었다.
“그럼 세희는 내 방에 잠깐 데리고 있으면 되지?”
-미안하지만 그렇게 해주게. 조금 늦어질 것 같으니 점심도 먹여주고.
“점심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나. 음식 가리거나 하지 않으니, 시켜줘도 괜찮고 직접 차려줘도 괜찮을 걸세. 물론 식비는 짐이 대겠네.
“아니 그건 괜찮은데, 일단 알겠어.”
-면목이 없구먼. 고맙네.
“고마우면 빨리 와. 이따 보자.”
-음, 이거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뭐.”
-기대했는가? 짐과 단둘이 있는 것이.
“……시끄러워!”
-아핫핫! 그럼 이따 보세!
발랄한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아직 서 있는 세희에게 돌아봤다.
“서 있지 말고 앉아. 다리 아프게.”
“네.”
바닥에 앉으라는 뜻이었는데 그녀는 침대에 앉았다. 그러더니 정리 안 된 침대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 오기 전까지 누워있었나요?”
“그랬지.”
“흠…….”
풀썩
갑자기 세희가 침대에 등을 뉘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몸을 돌려서 침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흐으읍.”
“너 뭐해!”
놀라서 황급히 침대로 다가갔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세희가 고개 들며 담담히 말했다.
“냄새나진 않네요.”
“당연하지!”
“정말 아깝네요.”
“아깝긴 뭐가 아까워!”
확 그냥 침대에서 일어나라고 하려다, 손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건 주의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너 점심 안 먹었다며. 뭐 먹을래.”
“점심이요?”
“응. 네 언니가 점심 먹이라고 했는데. 먹었어?”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지금 먹자. 아, 혹시 배 안 고파?”
“아니요.”
“다행이네, 뭐 먹을래? 시켜 먹을,”
“오빠가 먹고 싶네요.”
“피자 먹자! 피자! 치킨이나! 아니면,”
“아니면 오빠가 저 드셔도 돼요.”
“아아! 그냥 여기서 차려 먹어야겠다!”
이제 막 한창인 사춘기라서 그런가, 수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몸을 돌려 냉장고 옆에 세워진 밥상을 집었다. 서둘러 밥상 다리를 펴서 바닥에 설치하고,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냈다.
반찬을 차리는 사이, 세희가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오빠.”
“어?”
어제 먹고 남은 된장찌개를 불에 올리며 대답했다.
“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괜찮아. 앉아 있어.”
“앉아 있기만 하면 뭐해서요. 말씀해주세요, 뭐하면 되는지.”
“어어, 그러면 즉석밥 좀 데워 줄래? 거기 냉장고 위에 있어.”
“네.”
난 또 야한 농담을 할 줄 알았는데, 도와주려고 해서 다행이었다. 기특하기도 했고, 괜히 의심해서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품으며 수저통에 있는 식기를 뽑았다.
“읏! 읏!”
갑자기 옆에 있는 냉장고쪽에서 작은 신음이 들렸다. 고갤 돌려보니 세희가 손을 높이 뻗어, 냉장고 위에 있는 즉석밥을 잡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난 그제야 세희가 아직 냉장고 위에 손이 닿을 만한 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수저를 밥상에 대충 내려놓고,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그녀 뒤에 섰다.
“미안, 이건 내가 할게.”
“!”
사과하며 그녀가 집으려 했던 즉석밥을 집었다. 종이로 된 포장지를 뜯고 거기서 2개를 꺼내 세희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데워, 너 왜 그래?”
세희는 받아들기는커녕,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날 바라봤다. 그 눈빛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경악은 절대 아니었고 놀라움이라고 하기엔 좀 모자랐다.
“…….”
“세희야?”
“아, 네. 죄송해요.”
내가 이름을 부르자 드디어 그녀가 정신 차리고 즉석밥을 받았다. 그걸 뺏듯이 가져간 세희는 내게 말 걸지 않고 바로 냉장고 옆 바닥에 있는 전자레인지로 움직였다.
모습이 조금 이상한데…….
보글보글
아 된장찌개!
냄비를 올려 놓은 걸 기억해내고 서둘러 불을 껐다. 뚜껑을 열어 확인해보니, 타진 않고 조금 졸았을 뿐이었다. 거기서 물을 반 컵 정도 붓고,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된장찌개가 다시 끓을 무렵, 즉석밥을 돌린 전자레인지에서 삐, 소리가 났다. 밥이 다 데워졌다는 거였다.
세희는 즉석밥 비닐을 뜯고 밥상에 올렸다. 나도 냄비 받침을 놓은 뒤, 그 위로 냄비를 내려놨다. 우리 둘은 같이 반찬 뚜껑을 열고, 밥 먹기 시작했다.
“잘 먹을게요, 오빠.”
“어, 맛있게 먹어.”
마왕네 집에서 저녁 먹을 때와 달리, 세희는 먹으면서 나와 대화하려 했다.
“오빠.”
“응?”
“맛있네요. 꼭 저희 집에서 먹는 것 같아요.”
“어, 그거 너네 언니가 가져온 거야.”
“…….”
“……그래도 된장찌개는 내가 끓였어.”
“후루룩, 맛있네요.”
“인터넷 보고 만들었어. 잘했지?”
“네, 매일 먹고 싶을 정도로요.
“고마워. 아 그리고 김치는 우리 집 거야. 한 번 먹어봐.”
내 말에도 불구하고 세희는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이상하네요, 거기선 다르던데…….”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방금 한 혼잣말을 무마하려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오빠, 저도 저희 어머니께서 만드신 거 가져왔는데요. 드실래요?”
그 말에 순간 세희가 이 방에 들어올 때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 손에 들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져왔다고?”
“네.”
“뭐 가져왔는데.”
“저요.”
“컥! 콜록! 콜록!”
너무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계속해서 기침해대는데, 세희는 그걸 보고도 뻔뻔하게 “맛있게 생겼죠?”란 소리나 지껄였다.
“콜록, 콜록! 꿀꺽꿀꺽”
기침은 냉장고 안에 있는 물을 꺼내 마시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그래도 끝나지 않은 잔기침에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될까?”
“뭐가요. 저 맛있어 보인다는 거요?”
“그래! 그거!”
“이게 왜요?”
“왜긴 왜겠어!”
“잘 모르겠는데요. 알려주세요.”
순간 말문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뿐히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다른 남자애들한테도 이러고 다니진 않지?”
“어머나, 혹시 질투하시는 건가요?”
“아니야!”
“어쩌죠, 이미 몇 번 해봤는데.”
“했, 했다고?!”
“그런데 반응은 오빠랑 달랐어요.”
무슨 말인지 싶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세희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말만 걸어도 남자애들은 발정하면서 좋아하거든요. 근데 오빠는 아니었어요.”
“그건 내가 성인이고, 대학생이니까 그런 거지.”
“어른도 똑같았어요.”
“어떤 새끼들인데.”
성인이 건드렸다는 말에 저절로 혈압이 올라갔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런 내 모습에 놀랐는지 세희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평소처럼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
“괜찮아요. 이미 신고도 했고, 제가 직접 처리했어요.”
“처리했다고? 어떻게?”
“문자 보내서요.”
그 말을 듣자 그녀가 내 폰을 해킹한 방법이 떠올랐다.
“그렇게?”
“네. 경찰은 제외하고 그 사람 주위에 알려드렸죠. 어떤 인간이고, 어떤 걸 보면서 치는지.”
“뭘 친다고?”
“게다가 반응도 오빠랑은 달랐어요. 그 인간들은 제가 이런 이야기할 때마다 동정하는 척하죠. 저와 공감하면서, 저와 조금이라도 친해지려 했어요. 오빠처럼 화내주는 사람은 없었죠.”
“아니, 그거는,”
“그리고, 오빠는 조금……”
내 말을 끊은 세희는 정작 자기 말끝을 흐렸다.
“아니, 많이 달라요. 꾸미지도 않고, 자연스럽고. 있는 그대로였잖아요, 오늘도.”
“안 꾸민 게 무슨 상관인데?”
세희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소리만 뱉었다. 안 꾸민다는 점은 마이너스요소일 건 분명했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이 점이 장점처럼 이야기했다.
내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봤는지, 갑자기 세희가 갑자기 탄식했다.
“아아, 역시 언니 말씀이 맞네요.”
“뭐?”
삑삑삑삑!
그 순간 갑자기 뒤쪽에 있는 현관문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노크 없이 비번치고 들어오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 엇?”
다시 세희를 바라보려다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버튼 누르듯이 내 코 끝을 검지로 눌렀기 때문이었다.
“역시.”
차가우면서도 검은 눈이 가늘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나는 저 작은 악마 같은 웃음에 사로잡힌 것처럼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오빠는 진짜 귀엽네요.”
“……너.”
삐리릭!
“짐이 왔다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네!”
놀라서 뭐라도 말하려 할 때, 뒤에서 들려오는 마왕 목소리에 생각이 묻혀버렸다.
“하핫! 밥 먹고 있었는가! 짐도 함께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