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그런데 이제 그만 하려고
과대가 없는 강의실은 작은 소근거림으로 가득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재잘대던 여자애들은, 각자 작은 그룹을 나눠서 각기 다른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있을 때보단 조용했지만, 그 분위기는 그때보다 시끄러웠다.
자리에 없을 때가 더 시끄럽게 만들었으니, 과대가 얼마나 과에 파고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온 걸 본 모든 사람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전처럼 내게 관심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날 무시하는 느낌이었다.
이게 현실이었고, 이게 사람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오해를 알게 되면 사과하기보단 무시를 선택한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선택보다, 무시가 더 편한 법이니까.
어쨌든 난 이걸 신경 쓰지 않았다. 기대를 안 하면 실망도 안 하듯이, 난 동기들에게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날 보며 무수히 수많은 악수의 요청을 보내는 것보단, 이렇게 무시하는 게 마음 편했다.
“지헌아, 뭐해?”
유리 목소리를 듣고 난 뒤를 돌아봤다. 강의실 문 너머엔 회색 니트 아래 흰색 셔츠를 껴입고 청바지를 입어 청순한 이미지를 가진 유리가 서 있었다. 그녀가 궁금한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안 들어가?”
웃으며 묻는 그녀의 단발머리가 흔들렸다. 가지런하게 자른 단발 머리가 짧게 찰랑였다. 난 유리가 고등학교부터 유지하던 헤어스타일에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아니야, 들어가자.”
말을 마치며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내 지정석이 되어버린 자리에 앉았다. 유리도 날 따라 들어오며,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흐흠.”
그녀는 앉기 전에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과대를 둘러싸며 앉던 여자애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자신이 일찍 그의 정체를 알아챘고, 그렇기 때문에 먼저 관계를 정리했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그러는 정작 자기는 울면서 전화했으면서.
어제, 자신의 정체가 탄로난 과대는 모든 의지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별다른 저항 벽을 디디며 방을 나갔다. 무력해 보이는 그가 나가고 얼마 안 되서, 바로 유리에게 전화가 왔다.
“지, 지헌아아아.”
전화기 너머에 있는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마도 과대 폰을 통해 보냈던 기사와 녹음을 받고 충격먹은 모양이었다.
유리는 한동안 울면서 통화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다독였다. 그래서 그 결과가 지금 이거였다.
“……그러니까,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강의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도 유리는 날 곁눈질했다. 그 시선이 신경 쓰여서 고개를 돌리면, 마치 안 봤다는 듯이 칠판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다고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펜을 집은 손을 뻗어, 글씨를 긁적였다.
뭐해?
아니, 누가 봐도 공부 중이고 수업을 듣고 있는데! 그걸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면서 뭐하냐고?
강의 도중이라 말은 못하고, 그녀가 적은 글 아래 답변을 남겼다.
공부
그럼 있잖아.
유리는 남기자 마자 그거에 대한 답변을 또 남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고등학교때라면 선생님이 주의라도 줬을 건데, 교수님은 교단 앞에서 묵묵히 강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그녀가 쓴 답변을 읽었다.
오늘도 선배랑 놀아?
그녀가 말하는 선배는 마왕을 의미했다.
어제 마왕은 내가 유리와 통화하는 동안 방을 나갔다. 복수한 걸 기념 삼아서 같이 치킨이라도 먹으려고 전화했지만,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향수 냄새를 없애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래도 파티는 하고 싶었는지, 오늘 저녁 9시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정해서 다행이었다.
그 약속을 생각하며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부정하는 날 보고, 유리는 가지런한 치아를 보이며 살며시 웃었다. 교수님 눈치를 살피며 웃던 그녀는 또다시 내 교재에 글을 적었다.
그럼 오늘도 끝나고 같이 피시방 갈래?
살면서 유리가 나한테 같이 피시방 가자고 권할 줄은 몰랐다. 어제가 피시방 같이 간 게 처음이었는데, 이제는 같이 가자고 권했다.
마왕과 지내면서 유리와의 관계가 많이 바뀐 걸 깨달았다. 저번엔 그저 친구사이로 그쳤지만 지금은 유리가 날 이성으로 보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내 첫사랑이 날 이성으로 의식한다는 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펜을 들어 유리가 쓴 거 밑에 글을 남겼다.
오늘 같이 저녁 먹을래? 내가 살게.
글을 본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바로 앞에 교수님이 있어서 대놓고 웃진 못했고, 손으로 입을 가려 웃는 걸 최대한 참으로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유리의 감정을 다 숨길 수 없었다.
“흣!”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였다. 자기도 그걸 알아챘는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 없다는 걸 알기까지 그녀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느 정도 진정한 그녀는 눈웃음치며 날 바라봤다.
조금 붉어진 듯한 얼굴로, 유리가 작게 속삭였다.
“……응.”
“지헌아, 여기, 여기 맞아?”
초봄이라 그런지, 아직 6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벌써 어두워졌다. 해가 져서 조금 쌀쌀해진 날씨 아래, 내가 유리를 데려간 곳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레스토랑이었다.
강의가 4시에 끝나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나와 유리는 각자 따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 경우는 학교에서 입었던 그대로 왔는데, 유리는 코트를 걸치고 화장을 좀 더 진하게 한 상태였다.
어제 차려 입었던 마왕을 생각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 여기 맞아.”
그렇게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입구에서 맞이했다. 나도 그녀 따라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유리가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 뒀다.
“고마워.”
나한테만 들리도록 작게 말하며 유리가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나는 문을 놨고, 종업원이 물었다.
“두 분이십니까?”
“네.”
“그럼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네. 가자, 유리야.”
“아, 응!”
여길 들어온 순간부터 이상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유리를 데리고 종업원을 따라갔다. 그녀는 우릴 도로가 보이는 창가로 안내했다. 퇴근 시간이라 꽉 막힌 도로를 내려 보며 한쪽 의자 뒤편에 섰다.
“유리야.”
“어?”
“여기.”
내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유리가 내 말을 듣고 의자에 앉자, 그녀가 뿌린 달달한 향수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코로 들어온 숨을 뱉으며, 이세계에서 배운 대로 의자를 밀어줬다.
“지헌아, 고마워.”
“아냐.”
간단하게 대답하며 유리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앉은 동시에, 우릴 안내해준 종업원이 둥근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판을 집어 하나씩 건네 줬다. 그걸 펼쳐 읽기 시작하자 그녀는 오늘 대표 메뉴가 무엇인지, 혹시 알러지가 있다면 바로 알려 달라는 말을 했다.
나는 메뉴판에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유리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난 별로 없는데……”
“그럼 내가 시켜도 되지? 여기 커플 B세트로 주세요.”
스테이크가 메인으로 나오는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자 유리가 먼저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내밀었다. 나도 건네는데 그녀가 물었다.
“익히는 정도는 어떻게 할까요? 레어, 미디움, 웰던이 있는데요, 혹시 설명이 필요할까요?”
“아뇨, 그냥 미디움으로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원만 더 지불하시면 와인 한 병을 제공합니다만, 괜찬겠습니까?”
와인이라. 술을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엔 술이 필요했다.
“네. 혹시 레드와인인가요?”
“그럼요. 와인 주문엔 신분증 확인이 필요합니다. 실례지만 신분증 확인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나와 유리는 각자 민증을 꺼내 보여줬다. 성인인 걸 확인한 그녀는 주문을 전달하기 위해 테이블을 떠났다.
단정한 모습을 한 종업원이 떠나자, 유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헌아, 괜찮아?”
질문의 의도는 내 지갑이 버틸 수 있느냐는 거였다. 이 레스토랑은 가족끼리라면 몰라도 대학생이 가기엔 좀 힘들었다. 하지만 난 이세계에 다녀온 날 합의금으로 받은 돈이 있었다. 한 번 정도는 내 첫사랑한테 저녁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래도……”
“괜찮다니까. 아, 온다.”
입구에서 만났던 여성과 다른 직원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는 영수증과 함께 에피타이저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나는 빵과 스프를 올려놓은 종업원에게, 계산서와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이걸로 미리 계산해 주세요.”
그녀는 별말 없이 카드를 받고 다른 분과 다르지 않게 테이블을 떠났다. 내가 카드를 건네는 동안 유리는 빵을 손으로 찢어 먹었다.
“음! 이거 맛있다! 지헌아, 너도 먹어봐!”
그러면서 자기가 찢었던 빵을 건네 줬다.
빵을 받고, 그녀가 했던 것처럼 빵을 손톱만큼 찢어서 입에 넣었다. 맛은, 그냥 평범한 빵이었다. 그렇다고 그저 그렇다고 할 순 없었다.
“……맛있네.”
“그렇지?”
내 말을 듣고 유리가 웃었다. 입가에 빵조각이 묻어 있어서, 어떻게 보면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빵을 먹다가, 빵바구니에 같이 들어 있던 작은 그릇을 가리켰다.
“거기 체리잼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어!”
“그래?”
아무 생각 없이 빵을 손가락 한마디만큼 찢어, 붉은색 잼을 찍어 먹었다. 딸기잼과 다르게 새콤한 게 강해서 인상적이었다.
한 번 더 찍어 먹으려는데,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유리야.”
“응?”
그녀는 체리잼을 묻힌 빵을 먹으며 대답했다. 그런 유리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이게 체리잼인 거 알았어? 다 빨간 색인데.”
체리잼이나 딸기잼이나 똑같은 붉은 계열이다. 진한 건 체리가 더 진하지만, 레스토랑 특유의 약간 어두운 조명 아래에선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 어?”
“전에도 여기 온 적 있어?”
내 질문을 들은 유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작게 주름 지으며 웃던 눈이, 당황하며 눈동자가 떨렸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변명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아빠 엄마랑 같이 왔었거든, 여기! 가족이랑 왔어, 가족!”
필사적으로 말하는 유리를 보고, 과대랑 왔던 걸 알아챘다. 여길 들어오자 묘하게 안절부절하던 것과, 익숙한 것처럼 주문이 끝나자 메뉴판을 준 게 그 증거였다.
나랑 오기 전에 과대랑 왔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걸로 마음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전직 용사이고 마왕이 전생 마왕이었던 것처럼, 유리가 과대와 만난 것도 그저 과거에 불과했으니까.
나는 당황한 그녀에게서 시선을 내리며, 스프 먹는 데 집중했다.
“부모님이랑 오셨다고?”
“응! 저 쪽에 앉았어!”
안 궁금한데도 굳이 가족석 쪽을 가리키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할 말은 얼마 없었다.
“아 그래?”
“그, 근데 있잖아, 지헌아. 수업 따라가기 힘들지 않아?”
이제는 아예 대화 주제를 돌려버렸다. 방금 전 주제를 잊게 만들기 위해선지, 유리는 계속해서 상관없는 이야기를 말했다.
난 쏜살같이 들려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대충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오늘은 내가 고백을 하기 위해 그녀를 데려왔다. 너무 긴장되서 지금 먹고 있는 스프 맛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스프를 다 먹을 때 즈음, 종업원이 카트를 끌고 다가왔다. 그녀는 빈그릇을 치운 후,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각자 앞에 두었다. 포크와 나이프 같은 식기와 더불어 투명한 유리로 된 와인잔도 놓았다.
“……”
앞에 음식이 놓여지자, 시끄럽게 떠들던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지던 그녀가 입을 연 건 종업원이 와인병을 기울일 때였다.
쪼로로록!
“와!”
투명하고 둥근 유리잔 안에 붉은 와인이 작게 파도 치며 담아지는 게 신기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마치 철없는 아이처럼 보였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종업원은 계산된 카드와 영수증을 테이블에 둔 뒤, 빈 카트를 끌고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 난 와인잔을 집어 유리에게 내밀었다. 유리도 나와 맞춰서 자기 잔을 집어, 내 잔과 부딪혀 건배했다.
쨍!
건배를 마치고 각자 와인을 한 모금씩 마셨다. 유리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고, 나는 나이프로 접시를 마찰시켜 시끄럽게 써는 그녀를 쳐다봤다.
나는 와인잔 목을 검지와 엄지로 매만지며 유리를 불렀다.
“유리야.”
“응?”
“사실, 내가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새침한 얼굴을 하며 집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 놓았다.
“뭔데?”
“아니, 우리가 만난지 좀 됐잖아. 대충, 7년이었나?”
“대충 그렇게 됐지.”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뭔데?”
물어보는 그녀의 얼굴은 어제 과대가 보여줬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헛된 희망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난 7년전, 그때부터 했어야 할 말을 입에 담았다.
“널 좋아했어.”
“나도! 그럼 우리 사귀,”
“근데 이제 그만 하려고.”
“……뭐?”
이때 유리의 표정이 정말 가관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생각했던 멍청한 계획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부분에서 막힌 모자란 꼬맹이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과대에 대한 기사와 녹음을 보내자, 얼마 안 가서 유리가 전화했다. 그건 나와 달리 그녀는 과대를 차단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차단했다면 그의 번호로 보낸 기사와 녹음을 받지 못했을 거니까.
그 놈 말을 인정하긴 싫지만, 이것만은 맞았다. 유리가 그저 그런 여자에 불과하다는 걸.
처음 봤을 때처럼 빛나 보이거나 특별하지 않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여자들과 비교해서 별다를 게 없었다. 유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어장관리를 이상하게 칠 뿐, 다른 사람들과 특출난 부분은 전혀 없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