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그럼 하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월 ○일 영화관, 그날 영웅은 따로 있었다.
기자가 말했던 시간대에 익숙한 기사 제목이 올라왔다. 예상대로 기사 내용은 내가 신문사에 보냈던 자료들과 인터뷰했던 내용이었다. 난 그걸 보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다시 한번 뉴스를 보며, 난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먹었다.
후루룩, 후룩!
거기다 엄마가 갖다주셨던 배추김치까지.
아작아작!
권선징악을 이룬 것 치고는 조촐한 저녁 식사였지만, 난 이 정도로 만족했다. 맛있는 건 지금까지 마왕이 자주 사줬으니까.
그녀 생각이 나서 노트북 옆에 놓인 핸드폰을 쳐다봤다. 기사가 나온 6시부터 여러 번 마왕과 통화하려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받지 않았고, 2시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인터뷰하러 피시방을 나간 게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때 마왕은 게임에 인성질을 하면 나가는 내게 인사했다. 오늘따라 차려 입고 행동이 평소와 다른 그녀였는데, 연락까지 되지 않자 슬슬 걱정됐다.
삑삑삑삑, 삐리릭!
갑자기 현관문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자취방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부모님과 마왕, 이 3명밖에 없었다.
만약 부모님이었다면 미리 전화할 거였다. 그러니 지금 현관문을 여는 사람은 마왕밖에 없었다.
끼익
“음.”
내 예상대로 은발머리를 한 그녀가 들어왔다. 낮처럼 흰색 데님 자켓과 검정 원피스 차림인 마왕은 현관 벽을 손으로 디디며 신발을 벗었다.
낮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니 안심과 함께 여기 왜 왔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도 안심하는 부분이 더 커서 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마왕 뒤에 있는 과대를 보고 내 웃음은 굳어졌다.
“선배, 저 라면 매운 거 못 먹는데요. 어?”
그는 눈을 마주치자, 눈을 크게 뜨며 날 바라봤다. 과대가 들어오던 발을 멈추자, 마왕은 신발 벗느라 굽혔던 허리를 피며 말했다.
“왜 그런가. 어서 들어오게. 어?”
그녀도 놀라면서 과대와 같은 얼굴로 바라봤다.
아니, 너는 왜 놀라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내 방에서 라면을 먹고 있던 것뿐이었는데, 갑자기 들어온 그들은 ‘네가 여기 왜 있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대가 현관문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선배, 쟤가 여기 왜 있어요?”
“저 놈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쟤들이 여기 왜 온 거지? 그것도 같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마왕에게 물었다.
“지금, 지금 너네 뭐하는 거냐. 왜 둘이 같이 있는 건데. 왜 같이 들어오는 거고.”
그러자 마왕의 대답은 황당했다.
“자네 설마, 짐이 사는 방까지 알아낸 것이더냐?”
“무슨 개소리야.”
“이, 이보게! 도망치세!”
질문에도 그녀는 겁먹은 듯한 기색을 보이며 도망치려 했다. 현관 앞에 선 과대 가슴팍을 밀치면서 필사적으로 방을 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과대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선배. 무슨 일이에요? 왜 도망쳐야 되는 건데요.”
“저, 저 놈이!”
마왕이 날 향해 삿대질했다.
“영화관 때 이후로 계속 짐을 따라다녔다네! 만나주지 않으면 짐을 때리겠다고 했지! 어서 도망쳐야 되네!”
평소라면 과대 몸을 밀쳐버린 뒤 도망치고도 남을 힘을 가졌는데, 그녀는 여전히 가슴팍을 밀치는 시늉만 보였다.
그런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왕이 날 스토커라고 하는 것에 상처받았다. 며칠간 친한 친구처럼 지냈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한편 내가 스토커라는 말을 들은 과대는 오히려 방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괜찮아요, 선배. 제가 해결할게요.”
“그건 아니되네! 도망쳐야 할 때일세.”
“선배.”
그는 마왕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생긴 눈으로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해결할게요.”
“자네……!”
그녀는 지금 내게 등돌리고 있어 어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 짓고 있을 표정을 알고 있었다. 이세계로 가기 직전, 과대와 키스할 때 유리가 보여줬던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과대는 마왕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벗지 않은 구둣발로 방바닥을 더럽혔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사실, 누굴 패서라도 이 더러워진 기분을 풀고 싶었다.
“연극은 여기까지 하지.”
덜컹!
철제 현관문 닫는 소리와 함께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겁먹었던 아까와 달리, 즐거움으로 가득 찬 말투였다.
과대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나도 어깨 너머로 현관문을 쳐다봤다. 현관엔 등을 돌린 채 잠금 장치를 일일이 잠그고 있는 마왕이 보였다.
보조 잠금 장치와 걸쇠까지 걸어 잠근 그녀는 방 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때 마왕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 선배, 뭐하시는 거에요?”
나처럼 당황한 과대가 물었다. 그는 아까 내 방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미안하게 됐네, 하준이여. 지헌의 요청이 있어서 말일세.”
“내가?”
“자네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자네는 뭐하는 짓인가, 남의 방에서.”
그녀는 신발을 신은 과대의 발을 지적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 벗게나. 어서!”
“아, 네, 네!”
재촉에 과대가 제자리에서 신발을 벗었다. 신발을 든 채 서있자, 마왕은 그의 신발을 채가듯이 뺏어 신발장으로 던졌다.
“그, 그거 비싼 건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게나. 바닥에 앉든지 침대에 앉든지. 알아서 하게.”
당황한 과대 말을 무시하며 마왕은 침대에 풀썩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뭐냐?”
“뭐겠나, 자네가 이 놈 얼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짐이 직접 배달해 줬건만!”
“뭐?”
확실히 마왕 앞에서 그런 소리를 여러 번 말한 적 있었다. 그녀는 그런 헛소리를 들어주기 위해 차려입고 과대와 만난 것이었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선배, 그게 무슨 소리에요?”
과대는 그녀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마왕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억!”
명치를 맞은 과대는 배를 감싸며 쓰러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기가 흙발로 밟았던 바닥에 뒹굴었다.
“갑작스레 주먹을 휘두른 건 이해해 주게. 자네라도 이랬을 것이네.”
한번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지, 주먹을 내리지 않은 마왕이 날 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이 놈이 얼마나 치근덕거렸는지 아나? 갑자기 어깨에 손을 올리지 않나, 손을 잡으려 하지 않나. 실실 쪼개면서 바라보지 않나. 내색하지 않으면서 거절하는 게 어찌나 힘들었는지.”
“으으으……! 너……!”
“어이쿠.”
과대가 몸을 구르면서 마왕을 쳐다보려 했다. 마왕은 다리를 움직여 그의 눈가에 발을 올렸다.
“치마 입은 숙녀를 밑에서 올려 보는 건 실례잖나.”
건장한 성인 남성을 주먹 한 방에 쓰러뜨린 숙녀가 그렇게 말했다.
“이런 멍청한 놈같으니라고.”
마왕은 그 말을 하면서 처음보는 웃음을 지었다. 눈을 매섭게 뜨며 입꼬리만 올린 채 그를 비웃고 있었다. 낯선 모습을 보이던 그녀는 “훗”하고 웃으며 평소 짓던 미소로 돌아왔다.
“하긴, 어떤 남자라도 짐의 아름다움에선 헤어나올 수 없지. 음.”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어깨에 걸쳐진 머리카락을 털었다. 그 손짓에 은색 머리칼이 은으로 만든 커튼처럼 휘날렸다. 그러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엔 날 지목했다.
“지헌이여.”
“응?”
“이제 자네 차례일세.”
치마 속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마왕은 과대 얼굴에서 발을 치운 동시에 침대 위를 뒹굴었다. 그러고는 옆으로 누워서, 바닥에 엎드린 과대와 나를 번갈아 구경하기 시작했다. 마치 무대 위에 선 배우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평소 추리닝만 입던 그녀가 차려 입고 향수까지 뿌려가며 만든 무대였다. 내가 여기서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린 과대를 일으켜줬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수 냄새를 참으며 벽에 기대 앉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복부를 맞아서 힘이 빠진 그를 앉히고, 책상 위에 있는 폰을 집었다. 그 다음 그들이 오기 전부터 읽고 있던 기사를 검색해 그에게 보여줬다.
“이, 이건!”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는 기사를 본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날 바라봤다.
“이 시발 새끼야! 말 안 한다고 했잖아!”
하도 당당하게 말하는 바람에, 내가 그렇게 말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걸 말할리 없었다.
“내가 언제?”
“유리 그 병신 년이랑 선배 준다니까!”
“왜 짐을 물건 취급하는 겐가!”
“그래서 연락도 안 했, 읍!”
그가 말을 못 마친 이유는 마왕이 그에게 베개를 집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쓰는 베개엔 솜 밖에 들어있지 않아서 다치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침을 배고 잘 걸 그랬다.
어쨌든 난 마왕이 했던 말을 언급하며, 과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유리랑 선배를 준다는 건 뭐냐. 유리랑 선배가 무슨, 뭐, 네 거야? 그런 거야?”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의 이마에 대고 딱밤을 때렸다.
딱!
“앗!”
사실은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정말 폭행으로 고소당할 수 있어서 딱밤으로 참았다. 그래도 이게 꽤 아픈지 과대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 새끼가!”
이제 힘이 돌아왔는지 그가 내 뺨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난 그걸 맞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안 아팠기 때문이었다. 앉아 있어서 힘이 안 들어간 것도 있겠지만, 이럴 거면 차라리 걷다가 넘어진 게 더 아팠다.
놀란 눈으로 맞은 뺨을 쓰다듬자, 과대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프냐?”
“어, 하나도 안 아픈데?”
“뭐! 이 씨……!”
또다시 손을 들기에, 나는 그 오른손을 잡고 비틀었다. 마지 얇은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꺾이는 그의 팔을 보고, 한 번 더 놀라서 폰을 떨어뜨렸다.
“아아악!”
과대는 비어 있는 왼손을 들어 반격하기는커녕, 아픈 자기 손을 감쌀 뿐이었다. 마치 바로 사탕을 쥔 채 병에서 손을 빼지 못하는 원숭이 같았다. 이런 미련한 놈한테 분노하고 복수하려 했던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안 할 건 아니었다. 기사만 쓰는 걸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하나만 더 저지르기로 결심했다.
나는 꺾었던 손을 풀어주고, 대신 그의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픈 손목만 부여잡은 그에게서 핸드폰을 꺼내는 건 쉬웠다. 전원 버튼을 누르니 패턴을 입력하라는 화면이 떴다. 그걸 내밀며 물었다.
“패턴 뭐냐?”
“……”
그는 손목을 감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본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N! 대문자 N!”
다급한 외침을 들으며, 들은 대로 N자로 패턴을 입력했다. 잠금이 풀리며 강아지 사진이 찍힌 배경화면이 나왔다. 거짓말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노란색 메신져 앱을 켰다. 그의 어플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자에게서 온 대화창으로 가득했다. 그 곳엔 과 동기부터 시작해서, 선배, 타과 여자애들, 직장인, 심지어는 중고등학생과 타과 교수님마저 있었다.
난 그 화면을 과대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 사람들이 너랑 나랑 한 통화를 알면 어떻게 될까?”
“뭐!”
“아마, 좆되겠지?”
“후훗!”
웃은 사람은 침대에 누워서 구경하던 마왕이었다.
“좇대로 행동하며 좇같이 굴었던 대가로, 아예 좆이 되는 것도 좋을 것 같군.”
그 라임을 듣고 난 웃어보이며, 친구란에 있는 모두를 한 채팅창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아, 안돼!”
창백한 얼굴로 과대가 소리쳤다. 이렇게까지 다급해 보이는 건 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일어나며 내가 쥐고 있는 폰을 뺏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가 가만히 있을리 없었고, 그가 잡지 못하도록 일어나며 폰을 든 손을 위로 들었다. 과대가 나보다 키가 컸기에, 마왕이 했던 것처럼 배를 때려 꿇어 앉혔다.
“끄윽……!”
마치 따뜻한 물주머니를 때린 느낌이었다. 소름 끼치는 감촉에 휘둘렀던 손을 털었다. 그리고 아까 떨어뜨렸던 내 폰을 주워, 토요일부터 걸렀던 차단을 풀었다.
그 사이 과대는 꽤 아픈지, 힘없는 말투로 애원했다.
“하아…… 하아…… 하지 마세요, 제발요. 네? 하지 말아주세요. 거기 누나랑 형이랑 다 있단 말이에요. 게다가 엄마랑 아빠가 이거 알면 저 죽어요.”
난 고개를 내려 밑에 깔린 과대를 쳐다봤다. 옆으로 돌린 잘생긴 얼굴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걸 보니, 조금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음 파일을 과대 폰으로 전송시키며 그를 불렀다.
“야.”
“……네?”
그가 눈만 움직여 날 올려봤다.
“너 이런 거 가족한테 알리기 싫냐?”
이 말을 하자 과대의 눈에 희망이 감돌았다.
“네! 거기에 할머니도 있어요! 할머니께서 아시면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할머니도 있다고?”
“네!”
옆면만 보이는 얼굴에서,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아시면 돌아가신다고?”
“네! 심장이 약하셔서, 이런 걸로 충격 드리면 안돼요! 할머니 죽어요!”
“그렇구나. 아시면 안 되겠네……”
이제 입꼬리가 완전히 올라가서 거의 웃기 일보 직전이었다.
“게다가 이거 알려주면, 가족 보기 많이 부끄럽겠지?”
“네!”
“쪽팔리겠지?”
“네! 저 자살할지도 몰라요!”
“그렇구나……”
지금 그는 완전히 웃고 있었다. 내가 공감하는 척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니, 안 퍼뜨릴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난 그런 희망을 품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그럼 하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네?”
이때 과대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마치 헛된 꿈을 꿨던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난 그런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미 보냈어.”
“어어?”
나는 웃으며 연락 수십개가 오기 시작하는 화면을 보여줬고, 과대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동자만 굴렸다. 마침내 상황을 파악한 그가 말한 건 단 한마디였다.
“시바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