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다시 이세계로......?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뭔데?”
물어보는 그녀의 얼굴은 어제 과대가 보여줬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헛된 희망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난 7년전, 그때부터 했어야 할 말을 입에 담았다.
“널 좋아했어.”
“나도! 그럼 우리 사귀,”
“근데 이제 안 하려고.”
“……뭐?”
이때 유리의 표정이 정말 가관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생각했던 멍청한 계획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부분에서 막힌 모자란 꼬맹이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과대에 대한 기사와 녹음을 보내자, 얼마 안 가서 유리가 전화했다. 그건 나와 달리 그녀는 과대를 차단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차단했다면 그의 번호로 보낸 기사와 녹음을 받지 못했을 거니까.
그 놈 말을 인정하긴 싫지만, 이것만은 맞았다. 유리가 그저 그런 여자에 불과하다는 걸.
처음 봤을 때처럼 빛나 보이거나 특별하지 않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여자들과 비교해서 별다를 게 없었다. 유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어장관리를 이상하게 칠 뿐, 다른 사람들과 특출난 부분은 전혀 없는 여자였다.
그런 유리가 영문모를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지헌아. 그게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너 좋아했고, 이제 안 그렇다고.”
“뭐?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내가 너 첫사랑 아니야?”
“그건 맞긴 하지. 그런데 이제 아니라고.”
내 대답에 그녀는 잡고 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세게 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포크에 꽂힌 스테이크 조각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유리가 물었다.
“왜, 왜 날 안 좋아하는 거야? 응? 첫사랑이잖아. 7년동안 나 좋아했잖아.”
“그렇긴 했는데, 시간도 많이 지났고. 그래서 그런가 봐.”
“아니, 7년 동안이나”
“말했잖아. 시간이 너무 지났다고.”
이세계에 있을 적, 내 부하가 말했다. 짝사랑이 1년을 넘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그 말이 맞았다. 돌아온 직후는 그때 그 기억이 남아있어 감정적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유리를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다니. 무슨 소리야? 그리고 몇 년 동안 좋아했는데 그게 어떻게 금방 바뀌어?”
오히려 7년 동안이나 유지하면 안 되는 짝사랑이었다. 바로 고백하고 차이든가, 아니면 아예 상종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 그래. 내가 그동안 너 안 좋아해서 그래? 아니, 나 지금 너 좋아한다니까?”
“……유리야. 그건 아니야.”
“맞잖아! 내가 너 안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그녀는 지금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난 그런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차라리 계속 안 좋아하는 게 나았지. 이렇게 될 바엔.”
“뭐?”
“그냥 날 싫어하지 그랬어. 그렇다면 7년을 널 좋아하면서 허비하진 않았을 건데.”
“아, 아니, 그게……”
“넌 날 장난감으로 밖에 보지 않았어. 아니, 장난감보단 허세용 장신구였지.”
“아, 아니야, 지헌아.”
난 유리가 그동안 강의실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잊지 않았다. 그녀는 과대가 자신을 무시하면서도 그의 눈치를 보며 내 옆에 앉았다. 그가 파멸한 직후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른 여자애들을 둘러봤다. 마치 자기 쪽에서 과대를 거른 듯이.
가장 먼저 의심이 든 건 과대에게서 유리가 날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유리는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말한 거였고. 말한 이유는 뻔했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하나의 스펙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진심을 다해 좋아했어도 유리에게 있어 나는 스펙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증거였다. 몇 년동안 매달릴 만큼 유리가 매력적인 여자라는 증거.
안 되겠다. 더 이상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 먹었던 빵이 올라오는 걸 참으며, 카드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계산했으니까 맛있게 먹고 가. 다신 아는 척하지 말고.”
“지헌아!”
유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일어났다.
“나한테 사귀자고 말할 거 아니었어? 그럼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이때 그녀는 거의 비명 지르듯이 말하고 있었다. 난 얼굴이 창백한 유리에게 말했다.
“예의였어. 내가 허비했던 7년의 시간에 대한 예의. 그 시간이 아까워서, 마지막은 가능한 괜찮게 끝내고 싶었거든. 그리고……”
“그리고?”
“궁금했거든. 네가 편해져서 두근거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안 좋아하는 건지. 그래서 가능한 분위기 있는 곳에서 고백해봤는데, 하나도 설레지 않더라.”
그 말을 끝으로 난 레스토랑을 나가려 걸어갔다. 그런 날 유리가 붙잡았다.
“지헌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용서해줘! 제발!”
“용서라니, 난 널 진작에 용서했는데.”
말하면서 소매에 매달린 손을 떼어냈다.
“지헌아……!”
그녀가 눈물 맺힌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난 그 안에 담긴 희망을 짓밟았다.
“넌 그냥 철없는 여자애니까. 용서할 게 없지.”
“응?”
“그리고 용서하지 않더라도, 내가 널 좋아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아, 아니……!”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런 날 막은 건 유리의 비명소리였다.
“꺄아아악!”
그 소리는 공포가 아닌, 분노로 가득 찬 비명이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유리는 눈물 흘리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손님!”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던 종업원이 달리듯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나마 이성이 있어 보이는 내게 말했다.
“손님, 혹시 조용히 하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바로 나갈게요.”
나는 말을 마치자 마자 바로 입구로 걸어갔다. 그런 날 보며 유리가 소리쳤다.
“어딜 가!”
그 말을 무시하며 레스토랑을 나갔다. 입구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까지 도착할 때, 그녀가 날 따라잡았다.
“왜 가! 나랑 사귀어! 사귀자고오오!”
그녀의 비명에 귀가 울렸다.
난 더 이상 참기 힘들 것 같아서,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런데도 유리는 날 따라오며 말했다.
“왜 안 사귀는 거야! 부모님한테도 우리 사귄다고 말해놨단 말이야!”
“……”
“우리 고등학교 얘들도 나랑 너랑 사귀는 줄 안다고!”
“……”
“그럼 우리 딱 한달만 사귀자. 아니 일주일만! 응? 딱 일주일만 사귀고 결정하자!”
“제발 그만해!”
참다 못해 나는 그녀 어깨를 잡았다. 이제는 거의 흐느낌이 된 그녀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알던 첫사랑 유리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 밝고, 명랑하며, 낯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하게 지내주는 여자애였다. 가능하면 내 첫사랑을 그런 밝은 인상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렇게 질척대며 안타까운 사람이 아니라.
그런 감정과, 지금까지 전혀 날 봐주지 않았던 분노를 담아서 그녀에게 말했다.
“더 이상, 날 네 자존감 올리는 도구로 보지 말아줘. 제발.”
“……훌쩍.”
내 말을 들은 유리는 눈물을 글썽였다. 한두방울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미안해, 지헌아! 훌쩍, 미안해!”
난 그런 그녀를 둔 채, 뒤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유리는 일어나지 않고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발버둥치며 흐느꼈다.
“지허나아아! 미안, 미안해! 제발, 훌쩍, 용서해죠오오!”
누가 그랬다. 여자의 무기는 눈물이라고. 난 그 말을 마음 깊이 체감했다. 아무리 내가 그녀에게 두근거리지 않더라도, 저 울음을 들을 수록 발걸음이 늦춰졌다. 하지만 난 돌아가지 않았다. 만약 돌아가서 안아준다면 이보다 더한 고통을 맛볼 거였다.
유리 장신구로 전락해서, 자존감이 추락하고, 모든 요구를 들어줬어야 했고, 참다 못해 헤어지려 해도 저렇게 울면서 매달릴 거였다. 지금 떠나지 못하면 평생 떠나지 못한다.
내려가는 비상계단은 좁아서, 그녀 울음 소리가 크게 메아리 쳤다. 그것 때문에 난 1건물에 나갈 때까지 유리가 말하는 걸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허나아아! 내가 너 좋아한다고오! 만나줘어어!”
“야 이 개새끼야! 만나 달라고! 너 그 미친년한테 가는 거지! 그런 거지!”
“미안해 지헌아! 욕해서 미안해! 제발 와 줘! 가지마!”
“가지 말라고 이 씨발새끼야! 너 나 아니면 어떤 년이 만나줄 거 같아!”
“아니야, 방금은 진심이 아니었어! 미안해! 가지마! 가지말라고 했잖아!”
“가면 나 죽는다? 나 진짜 죽어!””
……첫사랑은 달달하고 새콤하다는데, 내 경우엔 더럽게 썼다. 그것도 존나게.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생각없이 걸었더니 벌써 자취방 건물 앞이었다.
여기 올 때까지 기억나는 건 몇 개 없었다. 계속해서 전화오는 유리 번호를 차단하고, 익숙한 풍경을 찾으면서 발을 움직였다.
아, 내 첫사랑을 찬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깔끔하게 헤어지고 나올 계획이었는데, 꼬여버려서 기분이 더러워졌다.
유리와 관련된 계획은 이제 다 엉망이 되어버렸다. 내 방엔 아직도 유리와 함께 할 미래 계획들이 적힌 노트가 있었다. 찐따 같은 내용들 밖에 없는 노트였다.
어떻게 고백하고, 데이트는 어디로 다닐 것이며, 프로포즈는 어떻게 할 건지, 신혼집, 아이, 쓸데없는 망상 밖에 없었다.
병신 찐따 같은 글이라도, 그걸 쓸 때는 행복했다. 마음만은 이미 서로 늙어가는 손을 맞잡은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행복했다며, 서로 만나서 다행이라며, 그렇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서 행복했다며.
근데 이제 그럴 가능성은 아예 0이 되어버렸다. 과대와 키스할 때만 하더라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마왕과 친하게 지내고 오늘 저녁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들이었다. 그런 가능성을 내가 직접 없애 버린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리를 찬 걸 후회하진 않았다. 그녀는 늪과 같은 사람이었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 항상 내 의지는 무시되고, 그녀만을 위한 인생을 살며, 결국 빛이 바래면 다른 놈으로 교체될 거였다. 마치 과대가 몰락한 직후 날 고른 것처럼.
내가 이걸 예상한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한번 버려졌으니까, 용사로써.
사람들은 용사를 무슨 대단한 존재로 생각한다. 천사와 왕족의 혼혈이라는 거짓말을 믿을 만큼.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호문쿨루스가 용사의 정체인 것처럼, 용사는 그저 인류의 마스코트에 불과한 존재였다.
왕국 놈들은 편했겠지. 나 같은 찌질한 놈이 용사가 됐으니까. 그들 손에 주물러지기도 편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솔직히, 마왕을 무찔렀을 땐 더 이상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살게 되지 않을 거라고 기뻐했다. 정략결혼이긴 하나 예쁜 아내와 시골에 가서 느긋하게 살 거라는 생각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암살자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부하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그걸 듣고는 느껴지던 건 분노보다는 체념이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눈치채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쓸모 없어진 도구는 버려지는 게 당연한 거였는데. 그게 무기라면 다른 사람이 쓸 수 없게 망가뜨리고.
난 왜 그런 것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남았을까. 유리가 그런 여자인 것도 모르고 열렬히 사랑했을까. 답은 뻔했다. 내가 병신이니까.
이때, 내 뒤에서 밝은 불빛이 켜졌다. 내 그림자가 길어진 걸 보니 낮은 위치에서 켜진 거였다. 자동차 라이트인 모양이었다.
부우웅!
이어서 엔진음이 들렸다. 이렇게 좁은 골목에서 들을 수 없는 커다란 엔진음이었다. 이 정도면 고속도로에서나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점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내며 자동차가 내게 달려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런 풍경을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기억났다. 유리의 첫키스를 목격한 날이었다. 그날도 이렇게 어두운 마음으로 걷다가 차에 치일 뻔했다.
만약 이번에도 이세계로 간다면, 처음 소환되었던 그때로 가고 싶다. 이번엔 누군가의 도구로 생각되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살고 싶었다.
부우우웅! 꽈앙!
털퍼덕!
달려온 차는 날 치고 나서야 멈췄다.